기증유물 도록/서적

선세유교

추읍산 2009. 12. 30. 19:15

 

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 <역사관> 소장.     도록, p162

 

 

 

 

선세유교

 

 

1722년 김제겸(金濟謙)이 세상을 떠나며 자녀들에게 남긴 유교(遺敎)를 한글로 번역한 책. 필사본. 1722년 8월 24일에 세상을 떠나며 충민공(忠愍公) 김제겸이 남긴 유교는 김원행(金元行)이 한문으로 기록해 둔 것인데, 이것을 집안에서 번역하여 대대로 전해내려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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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추읍산)가 쓰는 글

 

위 사진에서의 글씨는 필자의 어머님이신 풍산홍씨께서 필사한 것입니다. 『그러면 위 책을 필사하게 된 과정을 쓴, 필자의 블로그의 [문정공파, 직계조상편의 일묘사충]의 글 일부를 인용합니다.』


 --생략. 제가 태어나서 성장한 곳은 양평군 개군면 향리(楊平郡 介軍面 香里, 당시는 여주군)인데 또 한곳의 선영이 있었습니다. 여주군 흥천면 효지리인데 그곳에는 5대조 황산 김유근[영안 부원군 김조순의 장자이나 종백부 김용순(金龍淳)에게 입후], 그리고 6대조 김용순[1754~ 1823 |자: 시백(施伯)]의 묘소가 있었습니다(지금은 모두 개군면 선영으로 모셨습니다). 양 선영은 30리 거리이고 당시만 해도 1950, 60년대 초라서 차편이 아닌 걸어서 어머니와 함께 1년이면 몇 차례씩 다녔습니다. 여주군 대신면 양화 나루에서 배를 타고 남한강을 건너 흥천면 효지리를 다녔는데 돌아올 때는 중간 기착지로 여주군 대신면 초현리, 아래새재 마을에 들리곤 하였습니다.


그곳은 11대조 문곡 김수항 할아버지의 종가댁으로 당시 종손이신 김익한 아저씨께서 사셨습니다. 그곳엔 대방 마님이라고 불리던 노(老) 할머님(김익한 모친)이 계셨는데 그 할머님으로부터 위 일묘사충에 얽힌, 그 당시의 피눈물 나는 유서, 한글로 그것도 붓글씨로 기록한 책인 죽취 김제겸선세유교, 충민공 임인유교(先世遺敎, 忠愍公 壬寅遺敎)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위 책이 쓰이게 된 역사를 추적합니다. 추리하면, 9대조 충민공 죽취 김제겸 할아버지께서 1721년 12월 12일 울산으로 유배당하시고 다음 해인 1722년 4월 24일 유배지를 찾아온 셋째 아들 미호 김원행 할아버지께 유언하시고 한글로 써 주신 것을 미호 할아버지께서 정리(整理)하신 것으로 이 한글 유서를 문곡 종가댁에서 보관하면서 알아듣기 쉽게 교정한 것으로 생각합니다(이해하는데 나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옛 글로 쓰여있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김제겸은 울산 유배지에서 부령으로 옮겨지고 1722년 8월 24일 사약을 받으셨는데, 그 4개월 전 쓰신 것으로 여기서 잠깐 읽는 분의 혼돈을 피하고자 말씀드리자면, 미호 김원행 할아버지는 농암 김창협의 아들 김숭겸(金崇謙)에게 입후되었습니다).


 이 피눈물나는 기록을 어머니께서 저희 보라고 붓글씨로 옮겨 놓으셨고 그리고 5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문곡 김수항의 종가댁인 그곳 마을 뒷산엔 위에서부터 몽와 김창집 묘소, 죽취 김제겸 묘소, 취백헌 김성행 묘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1990년대 초 복원한 일묘사충(一廟四忠, 철종대왕 어필)현판이 있는 조그마한 각(閣)이 있습니다(김창집의 부친인 문곡 김수항의 묘소는 남양주시 이패동 돌누께 마을에 있습니다). 필자는 300년 전 있었던 장희빈(張禧嬪)이라는 여인으로 말미암아 잉태되고 전개되는 이 슬픈 이야기 일묘사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1689년(숙종 15) 있었던 기사환국으로 인하여 문곡 김수항(11대조)은 사약을 받게 됩니다. 이로부터 33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때 1721년과 1722년에 걸친 신임사화라는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1722년(경종 2), 김수항의 큰아들 김창집(10대조), 그 큰아들 김제겸(9대조)도 사약을 받았습니다. 이때 김제겸의 큰아들 김성행(8대조 김달행의 큰 형님)은 누명을 쓰고 고문으로 운명하십니다.


이 4대에 걸쳐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충성을 다한 이 슬픈 가문의 역사는 후에 나라로부터 모두 복권되고 명부조, 일묘사충, 4대불천지위, 4대충신(命不祧, 一廟四忠, 四代不遷之位, 四代忠臣) 이라는 크나큰 가문의 영광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큰 교훈으로 다가옵니다.


필자는 일묘사충이라는 낱말을 만든 기사환국, 신임사화에 대하여 짧은 지식이나마 아는 데로 적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문곡 김수항, 몽와 김창집, 죽취 김제겸의 유언을 붓글씨로 적은 이 책들은 당시 문곡 종가댁 김익한 아저씨께서 한글 박물관 또는 어느 연구기관에 기증하신 것 같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한글 박물관에서 돌아가신 아버님의 유서라는 이름으로 위 기사유사, 임인유교(己巳遺事 壬寅遺敎)의 내용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하생략.--


이어지는 글은 기사환국, 신임사화, 돌아가신 아버님의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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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의 글(선세유교)속의 일부인 아래의 유교(遺敎)가 나오는 한글 박물관의 『션고유서와 이를 현대어로 번역한 돌아가신 아버님의 유서(遺言) 』를 옮깁니다.


원문 

션고유셔

너 일졀이 다시 잡슐 잡의 사을 갓가이 말미 가니라 오셕 경셕 셕증을 모미 시례로 치고 가히 식 잇 사의게 의탁야 셩게 고 문 희경(니) 뎡 쟝암(뎡호)이 가히  거시오 임열 혼인은 셔 뎡 고디 잇고 오셕은 됴쟝(됴샹경)이 고져 던 거시니 만일 리디 아니면 고 아니면 니뎡영(니뎡영은 님월군 아들이오 됴졍승 사회라) 집의셔  구더니 만일 다 나은 곳이 업거든 허락미  무방고 션 졔 내 감히 고티디 못 배어니와 우리 부쳐 이후 유밀과 영〃 폐고 묘졔예 다만 쥬과 포헤만 고 파 뫼 큰 와혈이니 혈법으로 의논 말고 삼 다 영장되 셔인의 무덤텨로 미 무방고 댱단 산소 만일 크게 나무라니 잇거든 가히 몬져 옴기고 네 어마님 슈의와 관판을 몬져 음겨 둘 거시니 아디 못게라 몬져 얏가 파 뫼히 만일 모립면 맛당히 다 날을 기리리라 너희 장후의 가히 죵권야 후 두게 라 아바님 결셔 올리고져 되 아 못니 혹 이 로 올가 틈이 업가 노라 누의님 밧브기 심야 기 어렵고 네 어마님 내 이 판단 후 가히 뎍은 로 셔히 니고 관렴을 반시 경고 박기로 좃고 칠은 뎡문의셔  되만 니 이 가히 본바 거시오 달은 실니 가히 애오니 그 부옹 셤기기 날 셤기 야 글 호미 가니라 슉쳔 아 죵내 미심니 맛당히 누의님와 일가 모든 사으로 더브러 샹냥야 샤 다 가히 구챠히 못

(此間 三行 漏落)

거시 업니 이  아니 아디 못리라 이 이 븟그러우미 업니 맛당히 우을 덕음어  들 거시로 마 닛디 못믄 노친이라 을 가히 질뎡 거시니 의로 욕되이 야니리라(‘아니리라’의 오기) 임인 월 이십 일 안보셔 원(元行)  주오신거시라

 

참고 : 원문인 옛 글자가 입력이 안 됩니다. 다음 맨 아래의 출처를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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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어 번역 돌아가신 아버님의 유서(遺言)

너희들은 일절 다시는 잡된 술수를 쓰거나 성품이 잡스러운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손자 오석과 경석과 석증이는 모름지기 때에 알맞은 예를 따라 가르치고, 학식 있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부탁하여 학문을 성취토록 하여라. 문자를 잘 아는 희경(熙卿) 이재(李縡)와 장암(丈巖) 정호(鄭澔)로 가히 스승 삼을 만하니라. 임열의 혼인은 벌써 정한 곳이 있고, 오석의 혼인은 일찍이

조상경(趙尙絅)의 집안과 하려고 했던 것이다. 만인 그 집안에서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면 그대로 하고, 그렇지 아니하면 이정영(李正英)[이정영은 임월군의 아들이며 조정승(趙政丞)의 사위다]의 집안에서도 혼처를 구하고 있으니 만일 달리 더 나은 혼처가 없으면 허락해도 무방하니라.


선대(先代)의 제사는 내가 감히 고치지 못하는 바이로다. 우리 부처(夫妻) 이후의 제사에는 유밀과를 영원히 제상(祭床)에 올리지 말아라. 묘제(墓祭)에는 오직 술과 과일, 포육(脯肉=고기 말린 것)과 식혜만 하여라.


파주(坡州)에 있는 우리집 선산은 큰 소쿠리터이니 풍수로 따지지 말고 삼대(三代)의 장사를 여기에다 지내되, 서인(西人)파의 무덤 모양으로 함이 무방하니라. 장단(長湍)에 있는 산소가 (좋은 터가 아니라고) 만일 크게 나무라는 사람이 있거든 옮겨도 가하니라. 네 어머니의 수의(壽衣)와 관판(棺板)을 먼저 옮겨 두도록 하여라. 혹시 먼저 옮겨 두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도다. 파주의 묘터가 만일 물에 잠겨 있으면(=沒入해 있으면) 마땅히 다른 날을 기다리도록 하여라.

너희들은 장사를 치른 후에 형편에 따라 (양자를 얻어) 후사를 두도록 하여라. 아바님 영전에 나아가 작별의 글을 올리고져 하되 차마 하지 못하였다. 이제 이 뜻을 사뢸 틈이 없을 것 같구나. 누이님내께는 너무 바빠서 하기 (사뢰기) 어렵고, 네 어머니께는 나의 생사(生死)가 결정된 후 여기에 적은 뜻을 자세히 이르도록 하여라.

장례는 반드시 검소하고 소박하게 하여라. 관에 칠할 옻진은 정(鄭)씨 문정에서 한 되만 하니 그것을 가히 본받음직하니라.

(내가 이제 죽게 되니) 달행(金達行)은 글공부가 끊기게 되어 가히 애닯지만, 장인 섬기기를 나를 섬기듯 하며 글을 배우도록 하여라. 숙천의 아이는 종내 미심쩍으니 마땅히 누이님내와 일가 모든 사람과 의논하고 깊이 생각하여 (양자로) 취하거나 않거나 하여라. 이 일은 구차스럽게 못하는 것이니 (此間 三行 漏落) ····할 것이 없으니 이 뜻을 알 것이니라. 나의 이 마음이 부끄러움이 없으니 마땅히 웃음을 머금고(=기쁜 마음으로) 땅에 들 것이로다(=죽음을 맞이하리라). 허나 차마 잊지 못함은 늙으신 어머님이라. 내 마음의 갈피를 잡았으니 의(義)에 욕됨이 없으리라.

임인년(1722년) 사월 이십 사일 안보(安保)에서 아들 원행(元行)에게 써 주신 것이라.                                      집필자 백두현 (경북대학교)

 

출처 : http://www.hangeulmuseum.org/sub/hanLife/document/testament01.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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