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 948

김대건 신부 편지에서의 황산과 추사

https://blog.naver.com/starlite03/222745048991 김대건 신부의 편지 11: 과오가 아니라 덕행 서울에서, 1845년 4월 6일 천주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 리브와 신부님께 공경하올 신부님, 제가 중국에... blog.naver.com 본문 내용 끝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그는 예비신자이고 궁중의 2품 고관인 김정의와 순교자 유 아우구스티노와 친분이 매우 두터왔습니다.」 옮긴이 주 : 윗글에서 「김정의를 김정희」로 바로잡는다. 김정희는 호가 추사이고 글씨로서 널리 알려진 분이시다.

용문산이 품은 역사 문화유산

어제는 양평군 용문 장날이다. 초교 동창 박명수의 제안으로 전철에 탑승했다. 마침 정현 시골집으로 귀가 한다하여 동행했는데 장터를 찾기 전에 근처 용문면의 명소로 상원사와 운계서원 그리고 세심정을 찾았다. 답사를 마치고 용문 장터를 찾았는데 정현은 귀가했고 벗과 함께 칼국수 점심이다. 이어 돌기를 몇 바퀴 이어가야 할 유산으로 현대화를 피해 갈수 없음인데 어릴 적 장터 되살아 난다. 대대손손 언제까지 이어가기를 바란다. 근처 잔디밭에 앉아 막걸리 잔 기울이며 지나간 이야기 보따리 풀으니 끝없구나. 오가는 길, 무릉도원 협곡에는 한강물이 흐르고 봄빛이 가득한데 나루터는 어디로 갔는가? 저 물결 위에 돛단배 띄어놓고 백두대간 노래하고 싶다. 상원사 용문산 줄기 우측 능선 아래 연수리 계곡에는 창건년대가 고려..

북학파의 스승 김원행

김원행 1702년(숙종 28)∼1772년(영조 48).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운루(雲樓). 아버지는 승지김제겸(金濟謙)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로 이조 terms.naver.com 북학파 조선 후기에 청나라의 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학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북학’이란 청의 학문이나 문물을 뜻한다. [풀이] 조선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청에게 무릎을 terms.naver.com 길러낸 제자들 횃불이 되다 연암(燕巖) 박지원①…홍대용과의 도의지교(道義之交)와 북학파 - 헤드라인뉴스(HeadlineNews) [한정주=역사평론가] 18세기 조선의 문예부흥과 지식혁명을 이끈 세력은 두 개의 재야 지식인 그룹이었다. 그 하..

(북학파)낙론의 대학자들 탕평비를 마주하다

낙론 대학자들이 사도세자 성균관 입학식에 대거 참석한 이유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⑦ 2차 논쟁 시작되다 www.hani.co.kr 호락논쟁 조선 후기 성리학에서의 인물성 동이에 관한 논쟁. [내용] 호락 시비 혹은 인물성 동이 논쟁이라고도 한다. 처음 이 논쟁은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발생하였다. 한원진(韓元震)은 인물성(人 terms.naver.com

진경문화의 대가들

겸재 정선 그림으로 일세를 울리다 겸재의 그림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후원 세력이다. 당대의 명가인 안동 김문이 그를 후원했고, 겸재는 그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안동 김문의 주거지인 청풍계(淸風溪)를 여러 번 그렸 terms.naver.com 사천 이병연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 1671~1751년)의 본관은 한산, 자는 일원(一源)으로 18세기 전반 영조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이 시대에는 조선적 특수성을 내포한 문물 제도가 재정비되고 조선적 예술 terms.naver.com 조영석 조선 후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화가이다. 사실주의와 효용주의를 토대로 한 개성적인 회화론을 정립하고 이를 실천한 창조적인 회화 작품을 보여줌으로써 18세기에 조선적인 풍속화와 화훼영모 terms.naver.com

석실서원, 진경문화를 출산(出産)하다

석실서원을 가리켜 진경문화와 북학파의 산실이라고 하였다. 씨앗 된 두 할아버지(13대조 청음과 그 형님 선원) 정신이 파종되었는데 병자호란을 통해서 나타난 불굴의 충절을 본받기 위함이다. 싹트고 무럭무럭 자라 그 열매 조선 후기 양식으로 되었는데 1870년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있었다. 세월은 흔적마저 지우려는가? 옛 문화를 오늘에 되살림은 가치이기 이전에 순종(順從)이라고 할 수 있다. 배출된 선현은 줄줄이 등댓불이었고 배향록 또한, 문제 될 수 없다. 잊혀 가는 현실 속에 벽은 높아만 가고 관련 문중은 외면하니 부끄럽다 어찌 아니 하겠습니까?. 그런 속에서도 일깨우는 분들 있음은 기여한 바 크기 때문이다. 얽히고설킨 실타래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은 없을까? 농암[農巖 金昌協 1651(효종 2) ..

석실서원 백두대간을 노짓다

진경문화와 북학파의 산실, 석실서원(아래 클릭) '조선의 화성' 겸재, 중국풍 벗어나 조선의 실제 모습 그리다 겸재 정선 진경문화의 요람 석실서원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집필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1561~1637)... www.ajunews.com 석실서원(石室書院)은 1656년 선원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의 도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창건되었다. 처음 청음(김상헌)의 정침(正寢 와부읍 덕소리 312)에서 출발하였다고 추정하는데 얼마 후 십 여리 떨어진 미호변으로 옮겼고 이어 1663년(현종 4) 석실사(石室祠)라는 편액을 하사받고 사액(賜額)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 정신은 祖孫(김창협과 김원행)을 통해 나타났는데 조선 후기 교육사업의 요람이었다. 1697년엔 김수항, 민정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