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선조님 행적 19

경향복기고실(京鄕卜基古實)

종계를 중심으로 시조(김선평 901 - ) 이래 사시던곳을 추적하는데 일부 기록이 남아 글을 쓸 수 있어 감사한다. 아래와 같이추리하였다. ⓛ 안동부內의 강정촌(江亭村)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종통의 맥을 이어오기를 450년인데 오랜 세거지인지는 이전 기록이 없어 분명하지 않다. 1390년에 작성된 안동부(安東府) 김득우(7世 金得雨) 호구 자료에는라는 글자가 보인다. 따라서 족보상 7世 김득우의 출생 연도가 1331(고려 忠惠王 1) 년임을 알 수 있다. 김득우(金得雨 1331 - ?), 김혁(8世 金革) 부자는 안동부 내의 강정촌[江亭村(歸來亭 있는 곳으로 경상북도 안동시 옹정골길 19-4]에서 생활하고 계셨다. ② 김득우 부자는 강정촌를 떠나 안동 풍산현의 불정촌(佛頂村)으로 이주한다. 소요산(素..

초기 세계(世系)를 잃다?

세보 수편에서 보면 1世 습돈(習敦)을 안내하면서 시조에서 부터 부군(府君)에 이르기까지 세계(世系)를 잃었다고도 하고 혹은 처음부터 잃지않았다고 하였는데 진위를 알 수 없다. 태사공께서 신라 효공왕 5년(901년 신유)에 경주 흥덕궁(興德宮)에서 탄생하셨다고 기록되었는데 족보상 년대가 기록되기는 9세 비안공(諱 三近) 때부터이나 맞지않고 11世 學祖부터 시조까지 추적한다. 시조 1世 2世 3世 4世 5世 6世 7世 8世 선평 습돈 習敦 여기 呂基 남수 南秀 희 熙 자 字 근중 瑾重 득우 得雨 혁 革 901년 - ? 9世 10世 11世 삼근 三近 계권 係權 학조 學祖 1431-1514 시조로부터 11世학조께서 탄생하기 까지는 530년이란 공간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 족보상 약 10대가 흘러갔음인데 이는..

학조대사(學祖大師)

고려 개국공신 김선평(金宣平 901 - ? )의 후예(11世)로 종통의 맥을 이어오길 530여년으로 1431년(세종 13)이 되었다. 조선(1392년 - 1910년)이 개국하고 제4대 세종 임금이 밝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지 13년째로 접어들었다. 경상도 안동부 금산(오늘날의 소산리)에는 비안 현감을 지내신 김삼근(金三近 1419 -1465)이 풍산 불정촌(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하리리 부근)에 살다가 금산(金山 오늘의 풍산읍 소산리)으로 옮겨 입향하고 자리 잡은 안동김씨 씨족마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곳 돈소당((敦素堂 비안공 구택)에서는 할아버지(김삼근)와 할머니(상락김씨) 그리고 가족이 자리를 잡았는데 부친 판관공[金係權, 1410년(태종 10) - 1458년(세조 4)]께서 출사(出仕)하..

서미동(西薇洞)을 다녀와서

하늘 아래 첫 동네에는 은자(隱者)들이 찾아들었지 아득한 옛날 이야기 풍경(風磬) 소리 들려오고 은자암(銀子巖)에 담긴 지혜 자자손손(子子孫孫) 이어지리니 갈고닦아 그 광채 끝이 없으리이다 어리운 장군 바위 수호신 되어 우뚝합니다 소통(疏通)을 도출하는 大義 사랑이란 울타리 안 머물러 이어왔고 이어갈 것입니다 꼬끼오 ~ 꼬끼오 ~ 산골마을의 기상 나팔소리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굶고 아픈 이웃은 없는가? 나누는 삶 홀로이지 않습니다 아침해가 떴습니다 우애를 다지는 밥상 노고지리 우짖는 깊은 산골에선 논밭에서 해 뜨고 해가 집니다 황폐화를 가져온 내우외환 깊이깊이 새겨 유비무환입니다 두 분 정승(政丞) 1)의 흔적 예비하신 터전이 분명합니다 세월은 흔적마저 지우려는가? 농환재(弄丸齋) 2)는 찾지 못했고 木石..

은자암 이야기

2020, 6, 12일 안동김씨 역사문화 답사팀은 오후 안동시의 소산 마을에서 흔적을 찾았습니다. 저녁 때가 되어 하룻밤 유숙할 곳으로 김모현 삼당공파 회장님의 학가산 기슭(보문산), 중대바위(장군바위) 아래에 있는 서미동(西薇洞) 시골집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은 학조대사(燈谷 1432 - 1514)께서 한때 머물르셨다는 중대사(中臺寺) 흔적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두 정승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서애 유성룡(柳成龍 1542 - 1607)이 58세에 농환재(弄丸齋)라는 초가를 지어놓고 만년을 보내시다가 64세에 운명(殞命) 하셨습니다. 또한, 청음 김상헌(諱 尙憲·1570 -1652)은 병자호란 후 몇 칸 초옥을 지어놓고 4년간(1637 -1840) 울분을 달랜 곳입니다. 서미동 마을 가까이 이르러..

역사문화 답사기(충북, 경북)

안동김씨 역사문화 답사팀이 2019년 설립되고 세 번째의 답사가 1박 2일의 일정으로 6월 12일 금요일에 경의중앙선과 3호선의 옥수역 4번 출구에서 시작되었다. 15인여 함께한 탐방은 첫 번째가 학조대사 화상탑이다. 속리산 법주사 계곡을 끼고 가는 길은 좁고 굽은 십 리 길에 이르러 짧은 여정상 미리 복천암에 부탁했단다. 두 번, 소형 승합차로 깊고 비탈진 계곡길을 돌아 복천암에 도착했고 탑이 있는 동산에서 회동했다. 세조조에 국사로서 활약했던 학조대사(燈谷: 1432-1514)와 스승이신 신미대사(信眉大師 1403 -1480)의 부도탑이 나란히 서있어 설법하시려는 듯 중생 사랑은 끝이 없다. 비탈진 산길을 어떻게 옮겼을까? 안동김씨 현달(顯達)에는 학조대사가 있다고 널리 알려졌는데 이는 조카이신 서윤..

역사문화 답사기(여주, 이천)

안동김씨 대종중 역사문화 답사팀이 지난 5월 창립되고 그 두 번째 답사다. 여주시 대신면 초현리 아 랫 새재 마을 뒷동산에는 문곡 김수항의 대를 이은 세 분(일묘사충으로 창집, 제겸, 성행)과 이장(履長 휘 성행의 아들)의 묘역이 있다(문곡 산소는 남양주시 이패동 돌누깨 마을에 있는데 시간상 여주 쪽에만 다녀왔다). 문곡 종가댁의 선산인 대신면 초현리 분산(墳山)을 둘러보기 위해 아침 8시 30분 종로구 운현궁 앞에서 회동했다. 달려 10시 30분경에 도착했고 선산을 지키는 연동 형님을 인사하였다. 이어 안동시 안동김씨 풍산 화수회에서 두 대의 버스를 동원 합류하였으니 뜻깊다. 차례대로 성묘한 후 여주 신륵사로 향했다. 경내를 둘러보고 점심 후 이천의 풍고 김조순 묘역을 탐방하였는데 얼룩진 근세사를 바로..

곡운구곡

도시의 혼탁함 굽이굽이 물줄기 따라 씻어낸다. 2010년 10월 19일 화요일 ] ▲ 곡운 수증 추모비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의 일. 어느 선비가 춘천 박사마을 서면을 거쳐 굽이치는 소양강 물줄기를 따라 춘천부 화학산의 끝자락 사창리로 향하여 굽이굽이 감아돌아 흘러가는 계곡에 이르러 발길을 멈추고 감상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산수는 봉래산 만폭동을 첫째로 치지만 수석이 평평하고 골이 넓어서 유영(遊泳)하고 반환(盤桓)하며 서식(栖息)하고 경착(耕鑿)할 만하기로는 저 만폭동이 이곳보다 못한 바가 있습니다. 더구나 매월당의 유적이 여기에 있으니, 내가 터를 잡아서 의지할 곳으로 삼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라고 송시열에게 말한 곳. 하늘빛 아홉 굽이 시냇물 앞에서 숨이 멈추는 듯한 놀라움에..

김계행의 묘갈명(墓碣銘)

국역 국조인물고 김계행 [金係行] 원본글 출처 김계행의 묘갈명(墓碣銘) 저자 이광정(李光庭) 대표관직 대사간(大司諫) 이명 자 : 취사(取斯) 호 : 보백당(寶白堂)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속고3 경재(卿宰) 명(明)나라 정덕(正德, 무종(武宗)의 연호) 12년(1517년 중종 12년) 12월 신해일(辛亥日)에 대사간(大司諫) 보백당(寶白堂) 김 선생(金先生)이 대질(大耋, 고령(高齡))로 일생을 마쳤는데, 그 이듬해인 무인년(戊寅年) 3월 임오일(壬午日)에 학가산(鶴駕山) 아래 직곡(稷谷)의 을좌(乙坐)의 터에 장사지냈다. 비석(碑石)은 있지만 비문(碑文)이 없는 지가 대체로 2백 15년이 되었는데, 어느 날 공의 8세손(世孫) 지항(至恒)과 9세손 이호(爾鎬)와 영(泳)이 평원(平原) 이광정(李光庭)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