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庶尹公의 후예 81

文正公(諱 尙憲)派 文獻資料

宗會通文(癸巳 1773, 英祖 49) 풍고집의 김이기 행장(伯父牧使府君行狀) 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기축년(1769, 영조 45, 46세)에 전부(典簿)를 거쳐 영천 군수(永川郡守)로 나갔다. 병신년(1776, 영조 52, 53세)에 사릉 영(思陵令)을 거쳐 인천 부사(仁川府使)로 나갔다. 여기에서 해당 癸巳(1773년)는 목사공(諱 履基)께서 영천(永川) 군수로 근무하고 있을 때로 문중회의가 있었는가 보다. 淸陰先祖祠版將以[丁未 1847년(憲宗 13) 종손 英根(1805 - 1885) 발문] ㅎ

一中(김충현)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

一中(金忠顯 1921-2006)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서울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는 그 뜻을 기리는 행사가 오후 6시부터 있었다. 동 미술관에서는 一中의 서예가 주를 이루고 청음(김상헌) 등 직계의 정신까지 곁들였는데 전시는 7월 6일까지 계속된다. 저희 안동김씨 문중에서는 대종중 김세한 회장님과 일행 그리고 소속 서윤공파에서 참석하였는데 십여 분이다. 一中은 문곡 김수항(諱 壽恒) 아들 6昌중 막내(昌立)의 맥을 이어받은 종통(宗統)으로 맏형은 文顯이시다. 창녕위댁으로 불리기도 하는 가문에서는 한말 우국 순절하신 김석진이 그 증조(曾祖)이시다. 一中은 동생 여초(金膺顯 1927 - 2007)와 함께 최근세 서예사에 공헌한바 크다.

삼연(諱 昌翕)선조를 뵙다

먼저 삼연(김창흡)에 대해 알아보자 : 클릭> 김창흡(金昌翕) 요산단(堯山壇) 조선 헌종 때 신읍리 요골 뒷산에 사당을 창건하여, 1850년(철종 1)에 ‘요산 영당(堯山影堂)’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 영당은 요산사(堯山祠)로도 불려졌다. 『삼연선생연보(三淵先生年譜)』[김수근(金洙根)이 지음]에 의하면 본래 ‘선생의 묘 아래에 병사(丙舍)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불을 질러 없어졌다. 그 자리에 포천현의 인사가 발의하여 영당을 짓고 가묘(家廟)에 있던 영정을 옮겨 봉안하여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하였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영당이 훼철되자, 포천 유림들이 영당은 없어졌지만 향사는 폐할 수 없다 하여 그 터에 단을 만들고 향사를 이어왔다. 이것이 요산단이다. 6·25 ..

김좌진 장군을 찾아서

정현 제의로 오늘도 탐방길에 나섰다. 추사 선생님의 탄생지인 충남 예산으로 향하는데 중간 홍성의 김좌진 장군의 고택이 추가되었다. 같은 문중 서윤공의 후예로 청음(김상헌)의 친 형님 선원(휘 상용)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처음 막히던 고속도로가 이내 뚫리기 시작하였고 서해안을 끼고 달리는 길, 서해대교에 이르렀다. 웅비하는 기상 평택항이 이웃인데 8년 전 용돈이라도 벌겠다며 김준한 아저씨와 보따리상으로 중국의 웨이하이를 오가던 바다를 바라보며 한 치 앞을 헤아릴 수 없는 오늘을 읽는다. 理性이 있어 있음인데 짐이 곧 법이 될 수 없습니다. 원로회의 열어야 합니다. 바로 세움에 正義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음은 가치이기 이전에 창조주의 질서이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리완 서울에 있고 합류하겠는 아들 부부이다...

농암, 대사간을 사직하고 대사헌을 명받다.

관련 : https://www.youtube.com/watch?v=j3Imme1p3hY&list=PLEHM3-PlyNB5lFw4Dfe3kE3bCmyHV2V_X&index=3&t=1168s ○ 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1월 19일 무술 1번째기사 1687년 청 강희(康熙) 26년 김창협·김우항·오도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창협(金昌協)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우항(金宇杭)을 지평(持平)으로, 김만길(金萬吉)을 교리(校理)로, 민진주(閔鎭周)를 수찬(修撰)으로, 오도일(吳道一)을 응교(應敎)로, 신계화(申啓華)를 승지(承旨)로, 이유(李濡)를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삼았다. 전(前) 감사(監司) 윤계(尹堦)는 강화(江華)에 있을 때의 일 때문에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출처 : htt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