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일묘사충(一廟四忠) 11

일묘사충유교(一廟四忠遺敎), 발문(跋文)을 쓰다

발문(跋文) 현 안동김씨 대종중 회장님이시며 본 일묘사충유교((一廟四忠遺敎)를 편역하신 김위현 님과는 같은 공간에서 3년여 함께 일한 적이 있습니다. 2014년 어느 날, 일묘사충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저의 어머님께서 필사하신 김제겸(諱 濟謙 1680 ~ 1722, 호 : 竹醉, 시호 : 忠愍)의 임인유교와 회장님께서 갖고 계신 같은 책을 열람하게 되었는데 필사하신 분만 다를 뿐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기사환국(1689년)과 이어지는 신임사화(1721 ~ 1722)로 화(禍)를 입으신 김수항(諱 壽恒 1629 ~ 1689, 호 文谷, 시호 : 文忠) 이하 4대의 한글로 된 기록을 갖고 계셨는데 알아보기 쉽도록 현대어로 번역해 세상에 펼치시려는 높은 뜻을 갖고 계셨고 그 첫 번째..

김창집 묘지명(金昌集墓誌銘) 1)

https://www.yeoju.go.kr/history/jsp/Theme/Theme.jsp?BC_ID=g0072 김창집 묘지명 - 여주시사 김창집(金昌集) 묘지명(墓誌銘)1) 공의 성은 김씨요, 휘는 창집,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이니 안동 고려태사 선평의 후예로 벼슬이 이어온 지 팔백여년에 증조는 좌의정 문정공(文正公) www.yeoju.go.kr 공의 성은 김씨요, 휘는 창집,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이니 안동 고려태사 선평의 후예로 벼슬이 이어온 지 팔백여년에 증조는 좌의정 문정공(文正公) 상헌(尙憲)이요 고(考)는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수항(壽恒)이니 함께 문장 절의로써 사림의 영수가 되어서 문호가 더욱 커지고 현달하였다. 공이 인조 무자 시월 이십구일 술시에 출생하였..

사람은 죽음을 맞이할 때 어떤 마음일까?

안내하는 글은 문곡[文谷 金壽恒. 1626-1690. 시호 : 文忠) 1)]께서 기사환국으로 진도로 유배되고 후명(後名 : 예전에,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죄인에게 사약(賜藥)을 내리는 일을 이르던 말)을 듣고부터 5일간 가족과의 나눈 대화입니다. 이를 셋째 아들 휘 창흡께서 기록하였는데 이를 가문에서 한글로 필사, 네려오던 것 중 하나로 현 안동 김씨 대종중 회장이신 김위현 님께서 간직하고 계시다가 최근 알아듣기 쉽게 편역하셨고「기사유교」라는 책으로 선보였습니다. 문곡께서는 1689년(숙종 15) 장희빈의 소생 윤(昀)을 원자로 책봉함에 있어 반대한 서인 측이었습니다. 기사년(1689년)에 숙종의 어명으로 태조 이성계의 초상을 전주에 모셔놓고 돌아오던 중 남인의 탄핵으로 진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3월 28..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만난 숙종과 김창집

필자의 10대조 김창집 [金昌集, 1648(인조 26)∼1722(경종 2)]에게 내린 숙종대왕의 글로 석판(중간 보이는 두 개의 돌판)에 각자 되었다. 감회에 젖어 관람하는 어느 여사에게 부탁하였다. 숙종의 글로 돌판에 각자 하였는데 가깝게 보지 못해 사진으로는 해독이 불가하다. 그러나 아래 해제가 있다. 석판에 해제된 글로 위사진에는 작아 알아보기 어려워 아래 옮긴다. ------------- 肅宗大王 御筆 賜戶曹判書 金昌集 호조판서 김창집에게 줌 昨夢與先卿想見, 覺來起坐. 問夜何, 其則曉鐘己擊矣, 不勝悽然, 明燭志感 지난밤 꿈에서 그대와 만났습니다. 깨어나 자리에 앉아서 밤이 몇 시인가 물어보니 새벽 종소리가 이미 울리고 있었습니다. 쓸쓸한 감회를 견딜 수 없어 촛불을 밝혀 나의 감회를 적어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