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그리운 어머니 25

큰 외가의 奬學事業

오늘 필자의 blog를 살피다 유입 경로에서 홈병흠 이라고 뜨지 않는가. 찾아가니 아래와 같은 기사가 여러 곳에서 떠 처음 아는 사실이다. 형제는 미국에 나가있고 형수님하고 선영을 지키고 계시는데 이웃 소학리의 홍대식 형님도 운명하셨으니 어찌 헤쳐나가실까? 좋은 일 하심을 오늘에서야 알았고 聖堂에서도 열심이라고 들었는데 연로하신 지금 몸이 많이 불편하시단다(지난해 여름 전화로). 홍병길 형님 지난해 가을쯤 귀국하시면 함께 뵐까 했는데 코로나에 막혔는가 보다. 남은 여생 편안하시기를 기도드린다. 성공의 진정한 완성은 나눔 배움의 열정 아낌없이 후원 포천 이당내촌장학회 심사회의서 장학생 6명 선정 기자명 박덕준 기자 입력 2016.01.27 포천 이당내촌장학회는 지난 25일 내촌면사무소에서 장학생 선정 심사..

홍대식 형님을 보내다

외사촌 형님으로는 유일한데 의현 결혼식이 2016, 3, 26일있었고 그때 뵈었는데 이 세상에서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명절 때는 꼭 전화를 주셨고 드문드문이지만 만났는데 근래에는 소식이 끊겨 모두가 제 못난 탓입니다. 2년 전, 연말인가? 결혼한 의현 아기 소식 없느냐는 형수님과의 통화를 끝으로 모두 제 못난탓입니다. 안 좋은 느낌 속 최근에는 전화하기조차 두려웠고 23일 오후 4시 41분 주일이고 성당에 다녀와 집에 있는데 은경으로부터 전화가 왔고 불길한 예감 속 무슨 일 있느냐? 좋은 일이냐? 나쁜 소식이냐? 적중했고 대식 오빠가 한남동 순천향 병원 장례식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가시고 추억으로만 자리 잡아 오늘 장례절차를 진행하였습니다. 먼저 가신 가족과의 재회 그 자리에는 분명 고모님(저의 어머님..

홍철주와 장화식

한국의 박물관: 우표 홍철주와 장화식 [洪澈周, 張華植] 홍철주(洪澈周 : 1834~1891)는 1887년 3월에 개설된 조선전보총국(朝鮮電報總局)의 총판으로 우리나라 전선 가설에 커다란 공을 세웠다. 그는 한성판윤과 공조판서 등을 지내기도 했는데, 조선전보총국의 본격적인 업무 개시에 앞서 『전보국전무국기(電報局電務局記)』를 펴내 전신의 중요성과 전신 개설의 의의를 밝히고 종사원들의 책임의식을 강조했다. 또한 오늘날 국내전보규칙의 전신이 된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법규인 ‘전보장정(電報章程)’을 제정하여 근대 전신의 토대를 닦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홍철주 선생이 사용하던 호패와 요대 부싯돌 장화식(張華植)은 고종 13년에 의금부 도사로 입관한 이래 한성판윤, 육군참장을 거쳐 1904년 8월 통신원 회판이 ..

안핵사 홍철주

무분별 세금 거두는 아전 횡포에 항거 동헌 옥문 부수고 아전집 찾아 불질러[조선시대 울산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6) 울산백성이 폭동을 일으킨 이유 ▲ 1875년 세금에 고통 받던 울산백성들은 아전의 횡포에 항거, 폭동을 일으켰다. 일러스트=곽영화 1875년 4월 24일, 그들은 거사일을 이날로 잡았다. 부사 정기대가 부사직을 그만두고 동헌이 비어 절호였다. 날이 밝자 박남표가 앞장서 선창하며 사람을 이끌었다. 안만종, 김응기 등이 동헌으로, 이규연 등은 아전 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아전인 김진훈과 박인현은 줄행랑을 친 후였다. 이에 분개한 사람들은 아전 집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동헌에서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옥문을 여는 일이었다. 울산부 감옥에 갇힌 죄인 상당수는 세금을 내지 못해 잡힌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