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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의 묘지명(墓誌銘)

추읍산 2018. 6. 25. 13:58

국역 국조인물고

김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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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글 출처김창숙의 묘지명()
저자김창협()
이명 : 중우()
: 삼고재()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42 사자()


군의 이름은 창숙()이고 자()는 중우()이며 안동인()인데, 나의 큰아버지 곡운 선생(, 김수증())의 둘째 아들이다. 나와 같이 신묘년(, 1651년 효종 2년)에 태어났으나 생일이 나보다 늦어 나를 형으로 불렀다. 젊어서부터 교유한 사람이 드물었고 비록 같은 마을 사람이라도 서로 왕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날마다 형제들과 같이 모여 노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중에서도 나를 매우 사랑하여 병환이 나 죽음에 임해서도 손을 붙잡고 다시금 학문을 강론하지 못함을 한스러워하였다. 그가 죽은 지 이미 20여 년이 되었으나 나는 여전히 잊을 수 없다.

군의 위인이 청수하고 간이한데다 욕심이 적어 꾸미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부모가 매우 사랑하였다. 몇 살 때부터 이미 글을 알았고 시()는 청초()하여 좋아할 만하였는가 하면 전서()와 예서()는 옛것과 흡사하였다. 평소 일체 속세의 일로 자신을 얽매지 않고 온종일 한적하게 지내면서 오직 경전()과 서화()를 탐독하였는데, 그의 기문()과 감상()이 모두 남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 동방의 풍속은 옛것을 좋아하지 않아 금석(), 완담()의 조각을 소장한 사람이 드물었으나, 군은 위로 고려, 신라 시대까지 빠짐없이 수집하여 기록하고 이어 세대의 고하와 인물의 출처를 고찰 평가하여 박식의 자료로 삼았는데, 해박하게 꿰뚫어 누락된 바가 없었다. 그가 더 살았더라면 구양 영숙()의 ≪집고록()≫과 조명성(, 송 고종() 때 사람)의 ≪금석록()≫처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군이 죽어 애석한 바가 어찌 이 일 하나뿐이겠는가? 군이 본래 말쑥하게 여윈데다가 각기()병까지 앓아 몇 년 사이에 극심해져 항상 서실에서 기거하면서 문밖으로 나가지 못하였으므로 좌우에 도서()를 진열해 놓고 날마다 읊조리고 평가하는 것을 일로 삼아 병이 없는 것처럼 살았다. 병환이 위독하자 온 집안사람을 불러 놓고 각각 부탁하였는데, 한마디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여종이 솥에 약이 다 떨어졌다고 고하자 군이 말하기를, “약이 다하였으니, 사람도 갈 것이다.” 하였다. 이내 계축년(, 1673년 현종 14년) 10월 3일에 세상을 떠나 아무 달 아무 날에 양주() 석실() 선영의 안에 묻히었다. 군이 일찍이 자신이 거처하는 서재의 이름을 ‘삼고()’로 지었는데, 이는 자신이 고문()과 고서(), 고화()를 좋아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재() 송 선생(, 송시열())이 그것을 취하여 그의 묘소에 ‘삼고재() 김생()의 묘소’라고 표시하였으니, 이것만으로도 불후()할 것이다.

우리 김씨()는 고려() 태사() 김선평()에게서 비롯되었다. 증조 휘() 상헌()은 좌의정() 문정공()으로 세상에서 일컬은 청음 선생()이고, 할아버지 휘 광찬()은 동지중추부사()이고, 큰아버지 휘 수증()은 돈령부 도정()이고 부인 창녕 조씨()는 참판() 조한영()의 딸이다. 군은 군수() 이신하()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의 아우 김창직()의 아들 김오일()을 후사로 삼았다. 김오일은 남달리 총명이 숙성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군을 매우 닮았다고 하였는데, 8세에 갑자기 죽었으므로 다시 종형()인 김창집()의 아들 김호겸()을 후사로 삼았다. 아! 음양의 기운이 고르지 않아 인재를 얻기 어려운 지 오래 되었다. 청명() 영수()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은 항상 두터운 복과 장수의 명이 부족하였으니, 군만 아니라 이러한 사람이 많았었다. 군만 유독 운명에 어찌하겠는가? 그러기는 하지만 또한 슬픈 일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아! 애달픈 중우()여, 상(, 옛 순() 임금의 아우)은 우둔()해도 장수했는데 그대만 오래 살지 못하였고, 음험한 성질이었어도 다복했는데 그대만 복 누리지 못했도다. 예로부터 그러하였지만 현명한 이에겐 손상 없었도다. 내가 그 무덤에 명() 지었노니, 귀신은 애통하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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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김창숙 [金昌肅]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