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남양주역사문화포럼

효명세자와 남병철 형제 그리고 박규수

추읍산 2019. 10. 3. 11:39

남양주와 관련 인물로서 세 분(박규수, 남병철, 남병길)을 공부하는 뜻깊은 시간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세 분은 효명세자와 관련 있어 부분적이긴 하지만, 알아보고자 합니다. 기록과  위치는 세자께서 중심에 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박규수와 남병철, 남병길 형제의 교유는 세교를 통한 유대 와 높은 학문(學問)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서 같은 시대 효명세자를 중심으로 이곳(남양주)에 흔적을 남기신 남병철 형제와 박규수 그리고 편지를 통해서 본 효명세자 이야기를 곁들이고자 합니다.


○ 효명세자(1809 - 1830)


지난 6월 27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효명세자 특별전의 개막식이 있었고 필자도 참석한 바 있습니다. 약 석 달간 이어진 전시에서 두 번의 학술대회가 있었고 많은 관심과 사랑 속에 9월 22일 막을 내렸습니다. 학문을 좋아하고 예술적 감각이 탁월했던 효명 세자가 1827년 2월 18일 대리청정을 시작하여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는 등댓불이 되어 나라의 나아갈 길을 밝힌 지, 만 3년여인 1830년 5월 6일, 묘시(卯時 : 5시 ~ 7시)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좀 더 오래 사셔서 못다 이룬 할아버지 정조대왕(正祖, 재위: 1776∼1800)의 나라사랑의 구현을 보고 싶어 했던 소망 또한, 멈췄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집에 전하여오는 세자께서 여섯 살부터 큰 외삼촌(황산 김유근 1785 - 1840)께 보내신 8통의 편지와 경헌집(敬軒集), 예제(睿製) 등의 흔적을 통해서 세자를 생각했고 동경했습니다. 보다 관심을 갖고 다가갔음은 2009년 기증유물 도록이 나올 무렵으로  저의 블로그 http://blog.daum.net/0113508344 에는 「효명세자와 김유근」이라는 카테고리가 있고 이는 더디고 더딘 여정에서 못난 저의 마음입니다. 효명세자님 사랑합니다. 그 이름 간직하고 이어가겠습니다.


오늘날 진작례(進爵禮) 등을 통한 흔적이 되살아나고 있음을 보면서 타고나신 취향을 나라사랑이라는 높은 안목으로 접목시킨 세자를 생각합니다. 춤과 음악 등 예술적 취향이 어린 시절부터 싹텄음은 외삼촌(김유근)에게 부채와 향 등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통해서 알 수 있고 어쩌면 황산(김유근)께서 세자의 취향을 살리도록 적극 협력하신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황산(김유근) 또한, 시서화에 뛰어났고 풍류를 즐겼다는 기록에 유의합니다. 솔직하고 때론 친구로서 사랑은 깊어가고 찾아오신 삼청동의 옥호산방 그리고 창덕궁 애련지 연못가를 걸으셨을 두 분을 그립니다.




(봉투) 伯舅前上書

雨霽雲收 氣候若何 祖母主未寧之候 今則如何 伏萬萬 烟間竹各三介

舌盒一介 別唐扇妙者五介 東扇油者二介 不油者二介 香好者五介 覓送伏望耳

餘不備

 

(봉투) 큰 외숙 전 상서(上書)

비가 개고 구름이 걷힌 이때 어떻게 지내십니까? 할머님의 편찮으신 안부는 지금은 어떻습니까? 매우 걱정입니다. 담배설대[烟間竹] 각 3개, 서랍 한 개, 별 당선(別唐扇: 중국 부채) 좋은 것 5개, 동선(東扇: 우리나라 부채) 기름 먹인 것 2개, 기름 먹이지 않은 것 2개, 좋은 향 5개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


짧지만 굵게 살다가신 효명세자님! 오늘에 현시(顯示) 하셔서 점점 더 천 길 만 길로 다가가려는 아둔함을 치소서! 자유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을 모아 최선을 도출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장치입니다. 마주 잡은 손 따듯해 펑펑 쏟으며 이성(理性)이 있어 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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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병철, 남병길 형제와 효명세자


남병철이 지은 김조순 신도비(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해제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  - -  맏아들은 유근이니 문과출신으로 판돈녕부사를 지냈는데 좌찬성에 증직된 용순의 후사로서 출계하였고, 다음은 원근이니 문과출신으로 참판을 지냈으며, 다음은 좌근이니 원임 영의정이다. 맏딸은 순원왕후요, 다음은 판관 남구순에게 출가하였으며, - -


 - -  순원왕후는 익종대왕(효명세자)을 탄생하시었고 딸은 세 분을 두었는데 명온공주는 동령위 김현근에게 하가하였으며, 복온공주는 창녕위 김병주에게 하가하였고, 덕온공주는 남녕위 윤의선에게 하가하였다. 익종대왕은 헌종대왕을 낳으시고 헌종이 후사가 없어 소자(철종을 가리킴)가 들어와 대통을 물려받았다. 남구순의 아들 병철은 현재 판서로 재임중이요, 병길은 현재 참판이다.  - -  』


또한, 알려지기를 남병철 형제의 어머니 안동김씨(김조순의 2녀)는 자세가 바르고 어진 성품을 가졌다고 합니다



남병철(南秉哲, 1817∼1863), 남병길(南秉吉, 1820∼1869) 형제와 효명세자(1809- 1830)는 외가가 같은 이종 간입니다. 세자는 널리 알려졌고 부분적이긴 하지만  전기(前記) 하였습니다. 그러면 효명세자와 남병철, 남병길 형제는 어떤 사이였을까? 남병철, 남병길 형제는 효명세자와 8 살 11살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효명 세자가 22세로 운명하셨고 그때 남병철, 남병길 형제는 14세 이하이고 궁중 법도를 생각할 때 만났을 기회가 적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였습니다.


헌종 때 급제하고 출사하신 남병철과 달리 동생 남병길은 1850년(철종 1)에 급제하였습니다. 형제가 주로 이름을 빛낸 시기는 철종 때입니다. 남병철과 남병길 형제의 효성과 우애는 우의정 박규수(朴珪壽, 1807∼1876)의 시문(謚文)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수학과 천문학의 선구자 남병철, 남병길 형제

형제는 우애와 효성이 깊었으며 행적 또한, 타의 모범이 되었음은 흔적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수학과 천문학의 천재로 업적 또한, 커 닮은꼴 치고는 부럽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두 분에 대하여는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남병철은 박규수와 절친했다고 합니다. 


남병철  http://cafe.daum.net/amos5095/6elc/175?q=%EB%82%A8%EB%B3%91%EC%B2%A0

남병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ms_edu&logNo=221233809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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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암의 손자이신 박규수[1807(순조 7)∼1877(고종 14)]


일찍이 효명세자는 잠행 중에 글 읽는 소리에 이끌려 두 분의 인연이 시작되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20세(1827년 효명세자 대리청정 1년) 무렵에는 세자와의 사랑을 통한 교감 속에 문명(文名)이 높았습니다.




효명세자의 명으로 박규수가 쓴 왕정의 시(환재선생집 1911년)

「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환재 박규수의 문집이다. 세자는 대리청정기인 1829년 연암집을 정리하여 올릴 것을 명하기도 했고 박규수는 자신의 저술을 바치기도 했다. 이 책에 실린 봉소여향절구(鳳韶餘響絶句) 또한, 1829년 세자의 명으로 지은 것으로 100여수에 달하는 장편시이다. 군신간에 화합, 임금의 효행, 인애와 검덕, 백성에 대한 시혜  조치 등 왕정과 관련한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 효명세자 특별전. 2019년 국립고궁박물관 - 」

그러나 1830년 효명세자의 흉서와 연이은 부모와의 사별로 인한 상심으로 20년간 칩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였습니다. 할아버지『연암집(燕巖集)』을 통해 실학적 학풍에 눈을 떴고 윤종의(尹宗儀)·남병철(南秉哲)·김영작(金永爵) 등 당대 일류 학자와의 학문적 교유를 통해 실학적 학문 경향을 한층 심화시켰습니다.


시대를 앞서가신 선각자입니다. 1848년(헌종 14)에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출사하였는데 철종대를 거쳐 1866년(고종 3) 2월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습니다.  같은 해 천주교 박해를 응징하려는 프랑스군에 의한 병인양요가 있어 경계를 늦추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 號 事件)이 발생하였습니다. 8월 미국 상선이 대동강을 거슬려 평양까지 올라왔는데 군민(軍民)의 화공(火攻)으로 불태우고 전멸시켰는데 이때 평안도 관찰사가 박규수입니다. 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서세동점의 물결 속에서 두 번에 걸친 양요는 흥선대원군으로 하여금 쇄국정책과 서학(천주교) 탄압을 계속하게 하는 빌미가 되었는데 박규수의 관내에서는 백성의 희생자(순교자)가 한 명도 나지 않았음을 유의합니다.


1872년 진하사(進賀使)의 정사(正使)로서 2차 중국 사행을 통해 서양의 충격에 대응하는 청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 개국(開國)·개화(開化)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1873년 5월 다시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그 해 12월 우의정에 승진되었습니다.


이 무렵 흥선대원군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역설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자 1874년 9월에 사직하였고 1875년 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으나 곧 물러나 한거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박규수의 사랑방에 출입하는 젊은 양반 자제들에게 『연암집(燕巖集)』을 강의하고, 중국을 왕래한 사신이나 역관들이 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펼쳐 개화운동의 선구자적 인물들(김옥균,·박영효, 김윤식,·유길준 등)이 나타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문호 개방을 위해 진력하던 중, 1875년 9월 일본이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을 일으켜 수교를 강요해 오자 오경석 등과 함께 정부 당국자들을 설득해 1876년 2월, 드디어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하였습니다. 그 해 1월 고희(古稀)를 넘겨 기로사(耆老所. 70세가 넘는 정 2품 이상의 문관들이 모여 놀던 곳)에 들어갔고 말년에는 한직(閑職)인 수원유수(水原留守)로 임무를 수행하던 중 운명했습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참고하였고 이어지는 글(참고)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55597&cid=46623&categoryId=46623  끝.





                     ------ 빈공간 커 수정이 안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