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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문신 보백당(寶白堂) 김계행은 거유(巨儒)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으로 이어지는 조선조 유교사회의 씨앗을 뿌린 인물로 평가된다. 문장과 시에 자신만만했던 하도(下道)의 이모선비가 실력을 겨루고 싶어 상도(上道)의 문향 안동을 찾았다가 실력을 겨루기도 전에 흙투성이 일꾼이 시를 짓는 것을 보고 기가 죽어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는 안동에서 은거하며 청백한 자세를 고고하게 지키면서 일생을 살았다.
김계행(金係行)은 본관은 안동이며 자(字)는 취사(取斯) 호(號)는 보백당(寶白堂) 시호(諡號:임금이 내린 칭호)는 정헌(定憲)이다. 1431년(세종13년) 안동군 풍산에서 비안(의성)현감이었던 삼근(三近)의 아들로 태어났다. 5세 때 글을 배운 보백당은 11년 뒤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 김종직과 교유하며 학문을 성숙시킨다. 32세가 되던 1462년의 일이다. 보백당은 성주 향교의 교수로 부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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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국사(國師)로 있던 장질(長姪:맏 조카) 학조대사가 성주를 찾아와 보백당을 만나려 했다. 고을 원은 그 뜻을 알고 [국사께서 거동할 필요는 없다]명 [자신이 보백당을 불러 오겠다]며 사람을 보냈다. 이를 듣고도 가지 않은 보백당은 [公務로 오지 않은 이상 어찌 삼촌이 조카를 보러 가겠느냐]며 학조대사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때렸다. 당시 학조대사가 보백당에게 출세가 늦으니 자신이 힘써 보겠다고 말하자 [내가 어찌 조카의 천거로 출세를 바라겠느냐. 또한 너의 도움으로 출세를 한다한들 무슨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겠느냐]며 물리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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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0년(성종1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을 당시의 보백당의 나이 50이었다. 고령현감, 홍문관 응교를 거쳐 사간원 정언으로 있으며 직언을 서슴치 않다가 권신들의 미움을 사 파직됬다. 4년 뒤 육조의 관직을 거쳐 삼사(三司)의 여러직을 역임하며 충간(忠諫:바른 조언)으로 일관했다. 1497년 고향인 안동군 길안면 묵계리로 낙향(落鄕)했다.
이후 보백당은 황학산 기슭에 [말년에 쉬어지낸다]는 뜻으로 만휴정(晩休停) 짓고 은거했다. 만휴정 앞쪽에는 높이가 24m가 된느 송앙폭포가 있으며 널따란 바위에는 [寶白堂晩休停泉石]이라고 새겨져 있다. 76세때 보백당은 연산군의 폐위 소식을 전해듣고 [10년이나 섬겼던 신하로서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521년 보백당은 8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청백을 後孫에게 대대로 전하고 공근(恭謹)을 대대로 지켜가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끼리 우애를 지켜 화목하라(家傳淸白世守恭謹 孝友敦睦)] 또 [교만하거나 경박한 행동으로 가명을 훼손하거나 실추시키는 일은 하지말려 상제는 오직 정성과 경건을 다하고 낭비나 허례를 말라(勿以驕恣薄行 墜毁家聲 喪祭惟在誠敬 勿務爲豊侈)]고 했다. 보백당은 안동군 길안면 묵계리에 경북도 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는 묵계서원(墨溪書院)에 모tu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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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계서원은 1869년(고종 6년)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지고 현재는 입교당을 비롯한 읍청루(揖淸樓) 등이 복원 되 있을 뿐이다. 보백당은 조정으로부터 [불천위(不遷位: 영원히 신위에 제사를 모셔라)] 칙령교지를 받았을 정도로 그의 청백함과 대쪽같으 성품은 남달랐다. 보백당과 관련된 유물로는 교지(敎旨)506부등이 전할 뿐 자세한 유품, 자료등은 남아있지 않다. 묵계는 보백당이 송암폭포위에 만휴정을 짓고 정자앞에 흐르는 물을 보고 묵계(默溪)라고 한 것, 보백당의 19대 종손인 김주현(金胄懸 경북도 교육감)씨는 [공은 청렴결백함과 올곧은 기개로 일생을 살다가 간 청백리였다]며 [이 시대의 공직자들이 무엇을 본받아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고 말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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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소산리(素山里) 가 우리 안동김씨의 텃밭이다. 입향조는 세종때 비안(지금의성)현감을 지낸 김삼근(金三近 9世)으로 전한다. 삼근(三近)의 두 아들은 계권 (係權)과 보백당 계행(係行10世)이다. 학조(學祖)대사는 그의 조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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