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증유물 도록/서적

문곡년보(文谷年譜)

추읍산 2009. 12. 13. 17:35

 

양평 친환경농업박물관 <역사관> 소장.     도록, p149

 

 

 문곡년보(文谷年譜)


문곡(文谷) 김수항(김수항, 1629~ 1869)의 연보(年譜). 활자본. 김수항의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효종, 현종 때 여러 관직을 지내고, 제2차 예송이 일어나 남인이 주장한 기년설(朞年設)이 채택되자 벼슬을 내놓았다. 그 후 숙종 때 영의정이 되었으나,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재집권하게 되자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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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추읍산)가 쓰는 글


왕조국가인 조선에서 가장 큰 폐단은 대의 민주주의를 통한 삼권분립이 이루어 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통신, 교통, 언론을 통한 민의(民意)가 수렴되지 못할 때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가 개방되고 문명의 혜택을 받는 오늘날에도 각종 비리가 터져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게 하는데 가려지고 막힌 사회에서는 오죽하였을까!


숙종, 경종 대왕 때는 붕당정치(朋黨政治)로 말미암은 당쟁(黨爭)이 서로의 생사를 가르는 극한 상황에 이른 시기였다. 현종 때 일어난 두 차례의 예송 논쟁은 서인과 남인 간의 상호불신을 증폭시켰고 이는「1680년(숙종 6) 경신대출적과」「1689년(숙종 15)의 기사환국」그리고 1694년(숙종 20)의 갑술환국」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경종 때에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어 일어난 신임사화가 있었다.

이는 대의 민주주의가 없는 왕조국가인 조선에서 붕당정치가 낳은 폐해라고 생각한다.


김수항은 필자의 11대조이다. 그는 서인과 남인의 당쟁으로 1689년도에 일어난 기사환국으로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는데 그 후 33년 만에 일어난 신임사화(1721~1722년에 걸쳐 있었다. 경종 1~2년)로 김수항의 아들 김창집, 손자 김제겸, 증손자, 김성행의 3대가 죽음에 이르는 화를 입었다. 이는 후에 모두 복권되고 조선조(朝鮮朝) 유일의 일묘사충(一廟四忠, 4대에 걸친 죽음으로 충성을 다함)이 되었다.그러면 예송논쟁은 무엇이며 경신대출척, 기사환국, 갑술환국과 그리고 1721~1722년(경종 1~2년)에 일어난 신임사화는 무슨 사건인가? 이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로 안내한다.


보기

1) 예송(禮訟) :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B&i=172035 

2) 경신대출적 :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35857&v=44 

3) 기사환국 :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36709&v=42    

4) 갑술환국 :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36663&v=42 

5) 신임사화 :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45048&v=43


필자의 불로그에도 썼다. [문정공파] 직계조상 편의 일묘사충, 기사환국, 신임사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