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安東)은 경상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에는 창녕국(昌寧國)인 소국이었다. 신라가 이곳에 진출하여 고타야국(古陀倻國)으로 불렀고, 757년(경덕왕 16)에 고창군으로 개칭하고, 직령현·일계현·고구현을 영현으로 관할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안동부로 승격되었다가 후에 영가군으로 강등되었고, 995년(성종 14) 행정구역 개편 때 길주로 승격되었다. 그 뒤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쳐 1030년(현종 21)에 안동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1197년(명종 27)에 도호부로 개칭되었고, 1204년(신종 7)에 대도호부로, 1308년(충선왕 즉위)에 복주목(福州牧)으로 계속 승격되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복주로 강등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승격되었으며, 1361년에 다시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383년(우왕 9)에는 안동도로 개편하였다가 1388년에 부사로 환원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안동대도호부로서 경주와 함께 경상좌도(慶尙左道)의 대읍으로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석릉(石陵)·고령(古寧)·화산(花山)·능라(綾羅)·지평(地平)·일계(一界)·고장(古藏) 등의 별호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안동부 안동군, 1896년에 경상북도 안동군이 되었다. 1931년 읍면제를 실시함에 따라 안동군 부내면이 안동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63년에 안동읍이 신안동시로 승격되었다가 곧 안동시로 개칭하였다.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에 통합되었다.
신안동김씨의 시조 김선평(金宣平)은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신라 말 고창군(高昌郡: 안동) 성주(城主)로서 930년(태조 13)에 왕건(王建)을 도와 후백제 견훤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워 왕건에 귀부하여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되었고,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아부(太師亞父)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 고창군이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되었다. 그 후 시조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알 수 없어 후손들은 공수부정(公須副正)을 김습돈(金習敦)을 일세조로 삼고 안동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흔히 안동김씨를 “금관자가 서말(金貫子三斗)”라고 하여 큰 벼슬을 많이 지낸 것을 비유하는데, 김선평의 원손 김극효(金克孝)에 이르면서 명문가의 기틀을 다졌다. 김극효는 광해군 때 당상관(堂上官) 도정(都正)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5형제 중 첫째 아들 김상용(金尙容)과 막내 아들 김상헌(金尙憲)이 뛰어났다.
안동김씨에는 본관이 같으면서 시조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신안동김씨계통과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는 구안동김씨계통으로 구분하고 있다.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크게는 판관공계권파(判官公係權派), 정헌공계행파(定獻公係行派), 계공랑공맹귀파(啓公郞公孟龜派), 등암공계귀파(藤菴公季龜派), 참봉공언적파(參奉公彦迪派), 호장공처상파(戶長公處商派), 선군공여중파(選軍公呂重派)로 나뉘어지고, 작게는 판관공계권파에 감찰공영전파(監察公永銓派), 진사공영윤파(進士公永勻派), 부사공영추파(府使公永錘派), 장령공영수파(掌令公永銖派)로, 정헌공계행파에 참봉공극인파(參奉公克仁派), 진사공극의파(進士公克義派), 생원공극례파(生員公克禮派), 학생공극지파(學生公克智派), 군수공극신파(郡守公克信派), 어담공삼익파(漁潭公三益派), 주부공삼우파(主簿公三友派)로, 계공랑공맹귀파에 참봉공시좌파(參奉公時佐派), 참봉공시량파(參奉公時亮派), 생원공시우파(生員公時佑派), 생원공이려파(生員公以礪派), 중파(仲派), 숙파(叔派)로, 등암공계귀파에 습독공엄파(習讀公淹派), 첨사공온파(僉使公溫派), 항재공낙파(恒齋公洛派), 목사공치림파(牧使公致林派)로, 참봉공언적파에 별장공홍파(別將公洪派), 국헌공준파(菊軒公浚派), 학생공수정파(學生公遂晶派)로, 호장공처상파에 현감공지철파(縣監公之哲派), 사헌공원수파(司憲公元水派), 사과공열파(司果公烈派)로, 선군공여중파에 판관공용파(判官公龍派), 시중공학파(侍中公鶴派)로 각각 나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