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행
[金係行]
원본글 출처 | 김계행의 묘갈명(墓碣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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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광정(李光庭) |
대표관직 | 대사간(大司諫) |
이명 | 자 : 취사(取斯) 호 : 보백당(寶白堂) |
원전서지 | 국조인물고 속고3 경재(卿宰) |
명(明)나라 정덕(正德, 무종(武宗)의 연호) 12년(1517년 중종 12년) 12월 신해일(辛亥日)에 대사간(大司諫) 보백당(寶白堂) 김 선생(金先生)이 대질(大耋, 고령(高齡))로 일생을 마쳤는데, 그 이듬해인 무인년(戊寅年) 3월 임오일(壬午日)에 학가산(鶴駕山) 아래 직곡(稷谷)의 을좌(乙坐)의 터에 장사지냈다. 비석(碑石)은 있지만 비문(碑文)이 없는 지가 대체로 2백 15년이 되었는데, 어느 날 공의 8세손(世孫) 지항(至恒)과 9세손 이호(爾鎬)와 영(泳)이 평원(平原) 이광정(李光庭)에게 와서 말하기를, “처음에 선조(先祖)께서 세상을 떠나려할 때 후손에게 남긴 교훈에 ‘장례를 검소하게 하고, 또 묘소에 명문(銘文)을 쓰지 말라’고 하셨기에 우리들 자손이 지켜 온 지 8, 9대가 되었는데, 세월이 멀어질수록 점점 알지 못하게 될 것이므로 우리들의 생각에 선조의 심지(心志)와 사업이 후세에 드러나지 않는 것을 두렵게 여겨, 조심스럽게 묘소 앞에 세우는 돌을 갖추고 그 한두 가지 큰 것을 기록하려고 생각하니, 그대가 명(銘)을 지어서 내려 준다면 다행스럽겠오.” 하였는데, 광정이 두렵게 여기며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곧 말하기를, “공이 후손에게 남긴 교훈은 그 의미가 깊을진대, 또 공이 어찌 명문(銘文)에 관심을 두었겠는가? 공이 젊어서는 문학(文學)으로 추앙되고 중히 여김을 받았으며, 만년(晩年)에는 바른 도리로 드러나게 기용되어 위태롭고 어지러운 조정에서 주선(周旋)하며, 불가하다고 여겨 머뭇거렸고 늙어서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무오 사화(戊午史禍)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여러 번 위험스러운 함정에 떨어졌지만 후회하지 아니하여 지조를 완전하게 하였다고 일컬어졌다. 중종[中廟]이 반정[改紀]하자 만물이 모두 쳐다보았지만 공은 산골로 물러나 누워서 아름다운 명망을 지니고 일생을 마쳤으며, 세상을 떠난 지 수백여 년이 되었지만 사대부(士大夫)들이 기억하기를 쇠퇴하지 않고 사우(祠宇)를 세워 제향[俎豆]을 받드니, 남긴 기풍과 남은 공열이 더욱 오래 되어도 잊지를 않고 있는데, 공이 어찌 명문에 기대했겠는가?” 하였더니, 모두 근심스러워 답답한 기색으로 말하기를, “그대의 말은 그렇지만 우리들은 오직 산소가 꼴 베고 목축하는 데와 뒤섞여도 알지 못할까 두려워한다오.” 하므로, 이에 차례대로 서술한다.
공의 휘(諱)는 계행(係行)이고, 자(字)는 취사(取斯)이니 안동(安東) 사람이다. 시조 김선평(金宣平)은 신라(新羅) 말엽에 길창(吉昌)을 지키면서 고려(高麗)의 군사를 이끌고 견훤(甄萱)의 난리를 평정하여 벼슬이 시중(侍中)이었는데, 권행(權幸) 공, 장길(張吉) 공과 함께 삼태사(三太師)로 일컬어지며 백세(百世)토록 제향을 받든다. 그 뒤에 의(義)란 분이 있어 정의 대부(正議大夫) 예빈시사(禮賓寺事)로 전농 정(典農正) 득우(得雨)를 낳았고, 전농 정은 합문 봉례(閤門奉禮) 혁(革)을 낳았으며, 합문 봉례는 비안 현감(比安縣監) 삼근(三近)을 낳았는데, 이분이 공의 아버님이다. 어머니는 영인(令人) 김씨(金氏)로 삭령 현무(朔寧縣務) 전(腆)의 딸이다. (명나라) 선제(宣帝) 선덕(宣德) 6년인 신해년(辛亥年, 1431년 세종 13년)에 공을 낳으매 타고난 성품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어려서부터 글을 읽을 줄 알므로 부모(父母)가 특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 아들이 문호(門戶)를 유지 할 것이다.” 하였다. 17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자 명망이 더욱 성대하게 알려졌고, 문학(問學)과 문장이 당시 제류(儕流) 가운데서 제일이었다. 그러나 5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였다. 처음에 전중(殿中)에 보임(補任)되자 지위가 높은 근신(近臣)도 피하지 않고 바른말로 규핵(糾劾)하였으며, 외직으로 나가 고령 현감(高靈縣監)이 되었다. 몇 달 뒤의 인사에 청관(淸官)으로 뽑혀 홍문관[玉堂]에 들어갔다. 이로부터 해마다 옮겨 임명되어 홍문관에서는 부수찬(副修撰)ㆍ부교리(副校理)ㆍ교리ㆍ응교(應敎)ㆍ전한(典翰)ㆍ부제학(副提學)이 되었으며, 사간원[薇院]에서는 정언(正言)ㆍ헌납(獻納)ㆍ사간(司諫)ㆍ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장령(掌令)이 되었으며, 의정부[中書]에서는 검상(檢詳)이 되었고, 육조(六曹)에서는 이조 정랑[天官正郞]ㆍ예조 참의[春官參議]ㆍ병조 참지[夏官參知]와 병조 참의가 되었고, 성균관[國子]에서는 대사성(大司成)이 되었으며, 승정원[銀臺]에서는 동부승지(同副承旨)ㆍ우승지(右承旨)ㆍ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경악(經幄)에 있으면서 일을 논할 적이면 직분을 다하였고 언책(言責)에 있으면서 일을 만나면 반드시 간쟁(諫爭)하며 강직하게 아첨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릇 관직에 임명되면 반드시 헤아려 본 뒤에 나아가며, 비록 한 자계(資階)나 반 자급(資級)이라도 반드시 사양하다가 사양하여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뒤에야 받았으나 역시 직임에 오래 있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재이(災異)와 척리(戚里, 임금의 외척(外戚))와 내폐(內嬖, 임금의 총애를 받는 폐신(嬖臣)) 및 이교(異敎)를 물리치고 임금의 덕(德) 가운데 빠뜨려지거나 어긋나는 것을 말하고 당시 정치의 득실(得失)에 대하여 논한 것은 당시에 꺼려하는 것을 절실하게 맞췄으며, 그가 도승지를 사임하기에 미쳐서는 ‘진출하기는 어렵고 물러나가는 쉽다’는 뜻을 극력 진달하였는데, 대체로 공이 성종조[成廟朝]를 당하여 좌우(左右)로 출입하면서 옳지 못한 것은 폐기해 버리고 옳은 것은 취하도록 권하였으므로 부지런히 채용되었다. 그러다가 연산군(燕山君)이 즉위함에 이르러서는 여러 차례 위태로운 말을 진달하여 번번이 어긋나고 거스르게 되자 구제할 수 없음을 알고서 드디어 탄핵하는 글을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공의 연세가 이미 67세이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집안에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므로, 공이 찾아가 종유(從遊)하면서 강론(講論)하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매우 즐거워하였는데, 무오년(戊午年, 1498년 연산군 4년) 사화(史禍)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점필재와 종유한 자들이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공이 세 차례나 국옥(國獄)에 체포되어 고문과 형신(刑訊)이 갖추어 극도에 달하였지만 마침 극력으로 공을 구출(救出)하는 자가 있어 마침내 석방 되었는데, 공은 스스로 다행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항상 병들어 괴로워하는 애통함이 있었다. 그러다가 연산군이 폐위(廢位)됨에 이르러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이미 10년 동안 신하로써 섬겼다.” 하였다. 공의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을 때에 어버이 봉양을 위하여 지방 학교의 교수(敎授)로 체류하였는데, 어버이가 병이 들자 반년 동안 눈을 붙이지 못하였고, 상(喪)을 당해서는 죽(粥)을 마시고 여묘(廬墓) 살이를 하면서 3년을 마쳤으며, 뒤에 부인(夫人)의 상을 당해서는 공의 연세가 이미 슬픔으로 몸이 야위지 않도록 해야하는데도 오히려 예의(禮儀)를 유지하기를 처음과 같이하였다. 형(兄)의 아들 학조(學祖)가 속세를 떠나 부처를 배워 등명선사(燈明禪師)라고 불리웠으며, 임금의 총애가 있어 대단한 세력을 부렸는데, 공이 꾸짖고 책망하며 조금도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성주 교수(星州敎授)로 있을 적에 학조가 그곳을 지나가면서 공에게 문후(問候)하려 하자, 관찰사가 학조를 높이 예우하려고 학조에게 공을 가서 뵙지 못하도록 하고 공더러 와서 학조를 보도록 요청하므로 공이 응하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학조가 바로 공을 뵙자, 공이 노여워하여 말하기를, “네가 도리어 굴복시키려고 하는가, 내가 곤장을 치게 하겠다.” 하고, 거의 피가 나도록 쳤다. 학조가 뒤에 청하기를, “숙부(叔父)께서 오래도록 곤궁함이 심하신데, 다만 뜻이 있으시면 제가 지위를 얻게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공이 다시 노여워하며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너로 인하여 벼슬을 얻게 된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보겠는가?” 하자, 학조가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공은 내면으로는 강인하고 외면으로는 방정하여 벼슬살이하면서는 옥(玉)과 눈[雪]처럼 깨끗하였고, 스스로 벼슬길에 나아가 영달(榮達)한 지 수십 년 동안에 청렴 검소하기를 가난한 선비와 같이 하였다. 일찍이 시(詩)를 읊기를,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지만 보물로 여기는 것은 청렴과 결백이네[吾家無寶物寶物惟淸白]” 하였는데, 고향으로 돌아가기에 미쳐 조그마한 집을 짓고 보백당(寶白堂)이라는 편액(扁額)을 걸고서 날마다 후진(後進)을 인도하여 성리학(性理學)을 강론하고 설명하며, 재능에 따라 이끌어 도와서 성취시킨 자가 많았다. 성품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평소에 묵촌(默村)의 조용하고 외진 것을 좋아하였는데, 무오 사화가 일어난 뒤로 일찍이 왕래하다가 그 사이에 우거하였으며, 병이 듦에 이르러서는 외침(外寢)에 거처하면서 자질(子姪)과 여러 손자들에게 끼친 훈계, ‘청렴 결백과 효도와 우애도 집안을 유지하라. 교만하고 사치하면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게 된다’고 경계하였으며, 이어서 말하기를, “나는 경악(經幄)의 근신(近臣)이면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 한 시대를 구제할 수 없었으니, 내가 죽거던 장례를 갖추지 말고 명문(銘文)을 지어 비석을 세우지 말도록 하라. 착한 행실이 없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착하다는 칭찬을 얻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하였다. 향년(享年)이 87세였다.
처음 배위[初配]는 이천 서씨(利川徐氏)로 현감(縣監) 운(運)의 딸인데, 두 딸을 두어 맏이는 찰방(察訪) 박눌(朴訥)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진사(進士) 유자온(柳子溫)에게 출가하였다. 나중의 배위는 의령 남씨(宜寧南氏)로 지평(持平) 상치(尙治)의 딸인데, 아들 다섯을 두어 극인(克仁)은 영릉 참봉(英陵參奉)이고, 극의(克義)이며, 극례(克禮)는 생원(生員)이고, 극지(克智)이며, 극신(克信)은 군수(郡守)이다. 박눌의 다섯 아들은 거린(巨鱗)ㆍ형린(亨鱗)ㆍ붕린(鵬鱗)ㆍ홍린(洪鱗)ㆍ종린(從鱗)으로,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드러난 지위에 올랐다. 유자온의 네 아들에 공작(公綽)은 군수이고, 공권(公權)ㆍ공석(公奭)ㆍ공계(公季)인데, 공작의 손자가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이니, 세상에서 서애 선생(西崖先生)이라 일컫는다. 손자에 남(男)이 여섯이니, 숙보(淑寶)ㆍ덕보(德寶)ㆍ양보(良寶)ㆍ세주(世周)ㆍ세은(世殷)ㆍ세상(世商)이다. 세은의 아들 정헌(廷憲)은 진사이고, 정준(廷準)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정헌의 손자 중청(中淸)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였으며, 호(號)는 구전(苟全)으로 학자(學者)들이 높이 받들었다. 그의 아들 주우(柱宇)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평(持平)인데, 역시 명성이 있다. 주우의 현손(玄孫) 한운(翰運)은 바야흐로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지금 와서 비명(碑銘)을 청원하는 자인 영(泳)은 덕보의 후손이다. 지항(至恒)과 이호(爾鎬)는 승지의 증손(曾孫)과 현손인데, 지항은 광정의 대인(大人, 아버지)에게 내종제(內從弟)가 된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공자(孔子)의 말씀에 강직한 자를 못보았다 하였는데, 후세로 내려오면서 그렇게 알려진 이가 더욱 적었도다. 열열한 우리 공께서는 바탕이 태양처럼 밝았다. 혼연(渾然)히 강직하고 방정하여 마음은 물과 같이 맑았도다. 홍문관에서 여러 관직 거치며 나의 멈춤과 행할 것을 관찰하다가, 나아가서 간쟁(諫諍)할 때면 꺼림없이 말하였고 물러나 자취를 거둘 적엔 없는 듯하였다. 위태로운 조정에서는 형세를 보며 머뭇거리다가 내가 애당초 마음먹은 대로 돌아왔도다. 물여우 같은 소인배들이 교묘한 쇠뇌를 발사하자 뭇 현인들 머리를 나란히 하여 죽어갔도다. 먼저는 펼치다가 나중에 즐겼으므로 평소의 조행에 결점이 없었도다. 구십의 고령으로 임천(林泉)에 살면서 마음속으로 자신을 관찰하였도다. 오직 청렴하고 결백하라고 물려준 교훈 여유가 있는데, 자신의 의리는 부끄럽게 여겨 묘소를 꾸미지 못하게 하였도다. 비명(碑銘) 없는 작은 무덤은 대부(大夫)의 묘소가 아니도다. 세대가 오래되어 파묻혀 없어져서 풀과 나무가 깊숙한데, 많고 많은 자손들 그 사적을 기재하려고 생각하였도다. 명문(銘文)을 쓰는 것이 아니고 사치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며 공을 뜻을 바로 새기는 것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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