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월 31일) 주유천하 답사하고 내려오면서 옥인동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선대께서 사셨던 곳 육청헌 자리가 가까운 곳 같아 김천일 인솔자에게 여쭈었는데 근처라고 하였고 들려보자고 하신다(일행이 있어 후일 별도로 찾을까 하였는데 안내하겠단다). 이곳에는 함께 있었던 여섯 분과 동행했는데 표석이 있느냐고 일행 어느 분 물어온다. 표석은 없고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에서 안내하였다고 대답했는데 왠지 겸연쩍었다.
인솔자는 앞장섰고 근처를 배회하다가 드디어 찾았다. 필자의 8대조 휘 달행[1706~1738로 문곡(김수항 1629~1689)의 증손자로 죽취(김제겸 1680~1722)의 넷째 아들]께서도 이곳에 사셨을 것으로 판단하는데 이는 양평군에서 기획한 2011년 11월 제3회 양평의 명가전 도록에서 『향곡 안동김씨 문정공파 전시회에 붙여』> 김달행 편>「어디서 어떻게 사셨을까?」 에서 글을 쓴 바 있다. 감회가 남달랐음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하신 조상님[11대조(김수항)~10대조(김창집)~9대조(김제겸)~ 8대조(김달행)]께서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이리라.
육청헌 터(六靑軒 址)
『청와대와 주변 역사 . 문화유산』pp242-245 에서
육청원은 김수항(金壽恒: 1629~1689년, 김상헌의 손자)의 옥류동(지금의 옥인동 일대)에 있었던 집의 사랑채 이름이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뜰 앞에 동청(冬靑: 사철나무) 여섯 그루가 있고 또 그 아들이 여섯 형제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육청헌의 후원에는 이 책의 뒤에서 소개하는 청휘각(淸暉閣)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육청원은 김수항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다가 고종 때 민규호(閔奎鎬: 1836~1878)와 민태호(閔台鎬: 1834~1884) 형제가 번갈아 살았는데 민태호는 이 별서 안의 건물에 사조정(四照亭)과 옥정실(玉艇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어 민태호의 둘째 아들 민영린(閔泳璘)이 살았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대표적 친일파 윤덕영(尹德榮: 1873~1940)이 이 일대를 사들~ (이어서 아래 사진으로 연결)
이어서 ~ 김수항은 그림에 뛰어난 넷째 아들 김창업에게 청휘각을 물려주었다. 청휘각 부근은 중인 출신의 여항(閭巷) 시인들이 아회하는 장소로 많이 이용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옥계시사(玉溪詩社) 또는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이다. 청휘각은 일제 강점기에 헐리고 그 터는 윤덕영 별장에 포함되었다.
위 사진에서 이어지는 글로 아래
제들은 부친의 일을 회상하고 시를 지어 이를 기념하였다. 이 때 김창협은 청휘각 옆으로 흐르는 개울의 이름을 '계적란○○瀾’이라 하였다. 그리고 계적란이 석벽 사이에서 흘러나오는데 그 석벽 위에는 '옥류동'이라는 세 글씨를 새겼다. 19세기 김수항의 7대손 김병기(金炳冀: 1818~1875, 고종 때 판서 등을 지낸 문신)가 청휘각을 다시 중수하며 지은 상량문에서 청휘각은"층층 벼랑에 파서 세웠는데 그 앞에 개울을 끌어들여 네모난 못을 만들었다"고 기록하였다.
큰 도로변에 찾을 입구로 인왕사 부동산 좌측이다.
선대께서 사셨던 곳 앞에서 일행과 함께
유익한 날로 여기까지가 사실상 답사코스이고 끝까지 함께하신 일행에게 감사함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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