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직계조상님

김광찬의 묘갈명(墓碣銘)

추읍산 2018. 6. 25. 13:33

           

국역 국조인물고

김광찬

[]

원본글 출처김광찬의 묘갈명()
저자송시열()
이명 : 사회()
: 운수거사()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37 음사()


고() 도정() 증 영의정() 김공() 휘() 극효()는 종파()의 계서()가 중함을 생각하여 여러 아들 가운데에서 가리어 문정공() 석실 선생(, 김상헌())을 백형() 증 영의정() 휘 대효()의 후사()로 삼고, 또 여러 손자 가운데에서 둘째 아들 부사(使) 휘 상관()의 둘째 아들 휘 광찬()을 문정공의 후사로 삼으니 자()는 사회()이다. 김씨는 씨족이 번창하고 현귀한데다 문정공 아래에서는 아들 노릇하기가 어려웠다. 공은 천성이 효성스럽고 온순하였으며 행실이 깨끗하고 근신()하였다. 마음 가짐이 온화하고 단정하며 실속 없는 겉치레를 씻어버렸고 가정에서 가르침을 받을 때에는 어버이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이때문에 사람들은 도정공()의 선택에 실수가 없음을 알았다. 하루는 큰 집이 쓰러져 내려앉았는데, 다행히 빈틈이 있어 공이 화를 면할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공은 시문()에 뛰어났으므로 문정공이 기뻐하며 더불어 수창()하였다. 배()는 연안 김씨( )로서 선조()의 국구()인 의민공() 김제남()의 손녀요, 목사(使) 김내()의 딸이다.

광해주()가 인목 대비()를 폐하고 의민공의 집안을 완전히 멸추시키려하면서 연좌()가 인척()에게까지 미쳤다. 공은 두렵고 막힌 채 10여 년 만에 인()가 반정()하면서 비로소 과장()에 나아가 정묘년(, 1627년 인조 5년)의 생원시()에서 2등의 영예를 차지하니 물론()이 기뻐하였으되, 시문에 뛰어났는데도 진사시()에서 으뜸을 차지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하였다. 곧 익위사 세마()에 임명되어 여닐곱 곳의 벼슬을 지냈고 숭정() 정축년(, 1637년 인조 15년)에는 남한산성()으로부터 문정공을 따라 영남()으로 내려갔다. 공은 전날 형조()의 낭청()이 되어 소송()을 맡았을 때에 사사로운 부탁을 차단하였고 외방()의 임명이 있을 경우 곧 어버이의 늙음을 들어 사임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정()에서도 자유를 속박해 거론하지 않았다.

기묘년(, 1639년 인조 17년)에 청인()이 서쪽으로 명()나라를 침범하면서 (출병을 요구해오자) 문정공()이 상소()하여 조병()치 말라고 청하였다. 청인이 이를 듣고 노()하여 경진년(, 1640년 인조 18년)에 마침내 문정공이 청나라로 가게 되었다. 이에 문정공이 종사()를 공에게 부탁하기를 늙어서 물려주는 것처럼 하였으나 굳이 듣지 아니하고 따라갔다. 공은 경상()에 머물러 있다가 일의 고비가 좀 늦추어 졌다는 사실을 알고 비로소 돌아와 모부인()의 병을 돌보았다. 신사년(, 1641년 인조 19년)에 모부인이 몰(歿)하였는데, 오랑캐들이 문정공을 잠시 경상()으로 돌려보냈다. 공은 상중()임에도 달려갔으나 명()으로 곧 돌아와 영남으로부터 양주()의 선영()에 모부인을 모셔다 장사지냈다. 문정공이 다시 오랑캐에게 구치()되자 공은 또 달려갔으나 문정공은 또 돌아가 제전()을 받들게 하였다. 그 후 공은 조정()에 청하여 들어가 문안을 드리고 돌아왔으며 예제()를 마치고 다시 들어갈 적에는 조정에서 익위사 사어()로 제수()하여 드디어 문정공을 받들고 세자()를 모시고 우리나라로 돌아오니 을유년(, 1645년 인조 23년) 2월이었다.

또 네 직임()을 지내고 통진 현감()이 되었는데 어버이 계신 집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웠다. 부임하여 다스림을 잘한 공로로 통정 대부()로 승진, 교체되어 돌아와 중추부()에 임명되었다가 곧 교하 현감()에 제수되었는데, 하직 인사를 드리던 날 효종()이 앞으로 나오게 하여 문정공의 침식()과 기거()를 물은 바 있었으므로, 사림()들이 듣고 기뻐하며 용동()하였다. 그 후 현종()이 좌랑() 송광식()의 윤대()에서도 이러한 남다른 예우()를 준용()하니 그 아버지 송준길()이, “대현()의 남다른 예우를 분에 넘치게 받았으니 복()이 지나쳐 재앙이 있을까 두렵다.”하였다. 고을에 이르른 지 두어달 만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어버이 병을 돌보았는데, 다음 해인 임진년(, 1652년 효종 3년)에 문정공이 세상을 떠났다. 공은 앞서의 상사() 때부터 몹시 애통해 하여 보는 이들을 감동시켰는데, 이 해에 와서는 더욱 쇠약해졌으나 오히려 슬픔을 다하였으며, 3년상을 치르고도 계속 여사()에서 슬퍼하였다. 다음 해 첨중추부사()에 임명되어 들어가 사은 숙배()하였고, 조금 뒤에 전임()되어 공조 참의()에 이르렀는데, 중간에 청풍 군수()와 파주 목사(使)로 나아가기도 하였으나 모두 얼마 안되어 교체되어 돌아왔다. 무신년(, 1668년 현종 9년)에 임금이 밤낮으로 애쓴 경재()의 노고를 생각하여 그 부모를 특별히 우대하였는데, 이때 공의 둘째 아들 김수흥()과 막내 김수항()이 모두 팔좌(, 육조의 판서 및 좌ㆍ우 찬성을 이르는말) 지위에 있었으므로 특별히 공에게 가선 대부()를 가자()하고 동지중추부사()에 임명하였다. 두 공()이 동경인()들을 거느리고 입궐()하여 전문()을 올려 사은()하니, 한때 모두 영예롭게 여겼다. 그러나 공은 병으로 사은할 수 없었고 그해 2월 24일 몰(歿)하니 춘추 72세였다. 4월에 양주() 석실산() 문정공 묘의 오른쪽에 장사지냈다. 세계()는 대비갈()에 자세히 드러나 있다.

처음에 공이 어린 나이에 조부()의 눈에 들어 문정공에게 효()를 옮겨 섬겼다. 문정공이 병난()을 좇아 남한산성에서 장차 크게 방비하여 (척화()의) 뜻을 펴려고 단식()하기 6일이었는데, 문정공이 묶이어 북으로 들어가게 되자 공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울부짖으며 살 뜻이 없는 것처럼 하였다. 전후로 노중()을 넘나들었고 상화()가 계속되면서 밖으로는 풍설()을 무릅써야 했고 안으로는 슬픔을 삼켜야 했다. 공은 또 가냘프고 파리해서 자주 앓았으나 마침내는 별 탈이 없었는데, 사람들은 모두 그 효성()에 감응한 때문이라 하였다. 문정공이 한결같이 ≪소학()≫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단속하게 하였으므로 공이 삼가 이를 지켜서 어긋남이 없었고 성품 또한 찬찬하고 자상하였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나 관직에서나 제사를 받듦에 있어서나 인척() 사이의 화목함에 있어서나 모두 의로운 뜻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아들들의 지위가 현달하게 된 뒤에는 늘 몸을 삼가고 직책을 다하라고 권하였으며, 병이 위독하게 되어서도 오히려 시()를 지어 보이기까지 하였다. 청풍 군수로 있을 때에 관장()이 짐짓 공을 괴롭힌 바 있었는데, 뒤에 그 사람을 만나자 삼가 아랫 자리[]의 예()를 다하니, 이 역시 선배()의 유풍()이었다. 공이 죽은 뒤에 추은1)()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인()이 먼저 죽었으므로 부장() 하였다. 계곡(谿) 장유() 공()이 지은 명()이 있는데 사적()과 지행()을 갖추어 서술하였다. 후사()는 대략 문정공 묘표()에 실려 있는데, 김수증()은 문장과 행의()가 있어 문정공이 늘 곁에 두고 자주 기특하게 여겼으나 침체되어 낮은 관료()에 머물렀고 둘째 김수흥()과 막내 김수항()은 모두 영의정()으로서 세덕()을 이어받아 사람()의 종주()가 되었다. 김수징()은 지금 주부(簿)로 있고 김수능()은 과거에 합격하여 현감()으로 있다. 내외의 손자ㆍ증손자가 많아 모두 기록할 수 없으며 둘째 집에 새로이 얻은 아들 김창열()이 있다. 공의 만년()에 문호()는 더욱 창대하고 비길 데 없이 존귀해졌으나 본래 맑고 소탈한 것을 좋아하여 일찍이 운수거사()라 자호()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아버지가 누구이며 또 누가 아들인가? 공은 근심이 없을 것이니 백세()에 누가 이러하겠는가?

각주

  • 1) 추은(推恩) : 실직(實職) 2품 이상인 종친(宗親) 및 문무관(文武官)의 부ㆍ조ㆍ증조에게 사후(死後)에 관직을 주는 일. 추영(追榮).

관련이미지 3

[네이버 지식백과] 김광찬 [金光燦]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출처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45778&cid=49618&categoryId=49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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