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헌
[金尙憲]
원본글 출처 | 김상헌의 묘지명(墓誌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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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송시열(宋時烈) |
이명 | 자 : 숙도(叔度) 호 : 청음(淸陰), 석실(石室) 시호 : 문정(文正) |
원전서지 | 국조인물고 권62 노난시 입절 정토인(虜難時立節征討人) |
석실 선생(石室先生)의 휘(諱)는 상헌(尙憲)이고, 자(字)는 숙도(叔度)이다. 선생(先生)은 융경(隆慶) 경오년(庚午年, 1570년 선조 3년) 6월 초3일 자시(子時)에 태어났다. 만력(萬曆) 신해년(辛亥年, 1611년 광해군 3년) 정인홍(鄭仁弘)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 (退溪, 이황(李滉)) 두 선생(先生)을 무고(誣告)하고 헐뜯으니, 선생이 승지(承旨)로서 이것을 변명하고 배척하기를 매우 명석하게 하여, 사문(斯文)이 낭패를 당하지 아니할 수 있었다. 천계(天啓) 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년) 모문룡(毛文龍)이 우리나라를 (명(明)나라에) 참소(讒訴)하여 이간질하였으므로 우리나라가 장차 천하(天下)에 죄를 얻을 뻔하였으나, 선생이 명나라 서울[京師]에 입조(入朝)하여 정성을 다하여 그 참소를 해명하여, 우리나라가 오랑캐로 취급되는 것을 면할 수가 있었다. 숭정(崇禎)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에 (호란(胡亂)으로) 천지(天地)가 뒤바뀌고 이어서 우리나라를 침범하는 오랑캐 군사가 있어서 천리(天理)와 민이(民彝, 사람의 떳떳한 도리)가 패망하여 남은 바가 없었는데, 선생이 몸소 대의(大義)를 담당하여 질서를 바로잡고 천명(天命)으로써 오랑캐를 토벌하는 도리를 밝히었다. 성조(聖祖, 효종(孝宗)을 말함)가 즉위하여 장차 훌륭한 일을 하려고 하자 선생이 또한 사류(士流)를 수습(收拾)하여 성지(聖旨)에 보답하였으나, 임진년(壬辰年, 1652년 효종 3년) 6월 25일에 동교(東郊)의 석실(石室) 재사(齋舍)에서 돌아가셨다.
아! 선생의 뜻을 비록 당시에는 시행할 수가 없었지만, 그 공로(功勞)는 금세(今世)와 후세(後世)에까지 미치고 있어 옛날에 벼슬을 얻지 못하였던 성현(聖賢)들과 똑같으니, 어찌 하늘이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돌아보아 선생을 탄생시켜 세도(世道)의 책임을 맡긴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안동(安東) 사람이다. 시조(始祖) 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7백여 년인데, 대대로 훌륭한 관직을 이어받았다. 고조부(高祖父) 김영수(金永銖)는 장령(掌令)을 지냈고, 증조부(曾祖父) 김번(金璠)은 서윤(庶尹)을 지냈고, 조부(祖父) 김생해(金生海)는 군수(郡守)를 지냈고, 군수의 막내아들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김극효(金克孝)공이 상공(相公)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선생을 낳았다. 그러나 백씨(伯氏) 현감공(縣監公) 김대효(金大孝)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선생으로써 후사(後嗣)를 삼았다. (선비(先妣)) 정부인(鄭夫人)이 공을 임신한 것이 기사년(己巳年, 1569년 선조 2년) 7월이었으니, 선생의 탄생은 바로 대기(大期)의 수(數)1)를 받아 탄생한 것이므로 식자(識者)들이 기이하게 여기었었다.
나이 16세에 문경공(文敬公)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문하(門下)에서 학업을 닦았다. 경인년(庚寅年, 1590년 선조 23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승문원(承文院)에 나누어 예속되었는데, 당시 권간(權奸)이 정사(政事)를 어지럽혔으므로, 사류(士類)들이 위축되어 있었다. 마침내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가 되었다가, 곧 예조 좌랑(禮曹佐郞),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이조 좌랑(吏曹佐郞),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ㆍ교리(校理)ㆍ지제교(知製敎)가 되었는데, 일찍이 ≪춘추(春秋)≫ 4전(傳)을 교열(校閱)하여 바쳤으며, 제주(濟州)에서 작은 반란이 있었을 때 어사(御史)로서 이를 안무(按撫)하였다. 임인년(壬寅年, 1602년 선조 35년) 외방으로 나가서 고산 찰방(高山察訪)이 되었다가, 이어서 경성 판관(鏡城判官), 개성 경력(開城經歷)이 되었는데, 이것은 대개 정인홍(鄭仁弘) 등이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사류(士類)들을 다 쫓아냈기 때문에 선생이 조정에서 편안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년)에 체임(遞任)되어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에 제수되었고,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호당(湖堂)에서 사가 독서(賜暇讀書)하였다.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제수되었는데, 명(明)나라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행인(行人) 웅화(熊化)를 보내어 선조(宣祖)에게 사제(賜祭)하였을 때, 선생이 그 사신(使臣)을 접대하는 일을 하였다. 교리(校理)ㆍ응교(應敎)ㆍ전한(典翰)ㆍ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는데, 그 사이에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이 되어, 시강원(侍講院) 필선(弼善)ㆍ보덕(輔德)을 겸임하였다.
신해년(辛亥年, 1611년 광해군 3년)에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어 승정원(承政院)의 승지(承旨)가 되었는데, 정인홍(鄭仁弘)을 논죄하고 배척하는 계문(啓聞)에서 말하기를, “우리 동방(東方)에서 어질고 현명한 사람의 후예로 정몽주(鄭夢周)가 처음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창도(唱導)하였고, 정몽주의 뒤를 이어서 후학(後學)의 사범(師範)이 된 사람이 실지로는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등입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아니하게 금일(今日)에 이러한 모질(媢疾)의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승문원(承文院)의 부제조(副提調)를 겸하다가, 외방으로 나가서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는데, 임자년(壬子年, 1612년 광해군 4년)에 파직(罷職)되어 돌아왔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에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이 무고(誣告)로 일어난 옥사로 죽으니 선생이 그때에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있었는데, 그와 인척인 관계로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을묘년(乙卯年, 1615년 광해군 7년)에 광해군(光海君)이 생모(生母)를 높여 받들며 명(明)나라에 인준을 청하였는데, 선생의 사은(謝恩)하는 글 가운데 기휘하고 거슬리는 말이 있었다고 하여 죄에 연좌되어 관직을 삭탈(削奪)당하였다.
정사년(丁巳年, 1617년 광해군 9년) 모후(母后,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폐위(廢位)하려는 의논이 있었을 때,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대의(大義)를 진달(陳達)하다가 북방으로 유배되었는데, 선생은 글을 보내어서 천리(天理)의 정당함을 서술하였다. 무오년(戊午年, 1618년 광해군 10년)과 신유년(辛酉年, 1621년 광해군 13년)에 연달아 선생을 낳아준 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의 상(喪)을 당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 인조 반정(仁祖反正) 때 선생은 바야흐로 모부인(母夫人) 이씨(李氏)의 상복(喪服)을 입고 있다가, 훈신(勳臣) 재상(宰相)들과 글로써 시사(時事)를 극렬하게 논쟁하였는데, 그 하나는 곽광(霍光)이 창읍왕(昌邑王)을 심하게 대우하였다는 고사(故事)2)를 인용하여, 금일(今日)에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힐책(詰責)하였던 것이다.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에 이괄(李适)의 반란(反亂)이 일어나자, 임금이 선생에게 기복(起復)할 것을 명하였으나, 선생은 상소를 올려서 사양하였다. 3년 상복(喪服)을 끝마치자, 조정(朝廷)에서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비워두고 기다렸으나, 선생이 사양하여 교체되었다가 다시 임명되었다. 당시 조정의 의논은 오로지 현상 유지에만 급급해 시비는 돌보지 않아서 벼슬길이 자못 분잡하였으나, 선생은 홀로 고상한 품격으로 각별한 논의를 주장하였다.
벼슬을 옮겨서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이 되어서 여덟 가지 조짐을 논하였는데, 그 언사(言辭)가 심히 시의(時宜)에 알맞고 적절하였다. 이때부터 연달아 이조(吏曹)ㆍ예조(禮曹)ㆍ형조(刑曹)의 참의(參議)를 역임하였고, 중국의 조사(詔使)가 이르자, 특별히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일찍이 상소(上疏)하여, 대신(大臣)을 진심으로 대하여 성실과 거짓의 간격이 없게 하며, 언관(言官)을 중하게 대우하고 직언(直言)하는 선비를 좌절시키지 말며, 상규(常規)에 얽매이지 말며, 사기(事機)를 잃지 말며, 붕당(朋黨)을 미워하지 말며, 말만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말며, 숭고(崇高)함을 믿지 말며, 소외(疏外)되고 비천한 사람들을 가볍게 여기지 말기를 간청(懇請)하였으며, 또 재변(災變)을 만났을 때에 임금의 수성(修省)하는 방도를 진달(陳達)하니, 임금이 ‘붕당(朋黨)’이라는 글자 아래에다 엄한 교지(敎旨)를 내렸다. 이윽고 특별히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승진되었다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옮겼는데, 일을 논의한 것이 더욱 절실하였다.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옮겨져서는, 일을 말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렸기 때문에, 벼슬에서 물러나서 석실(石室)에 돌아왔다.
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년)에 성절사(聖節使) 겸 진주사(陳奏使)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서울에 갔는데, 선생이 명나라의 해당 부서(部署)에 무고(誣告)를 변명하여 말하기를, “황조(皇朝, 명나라)에서 소방(小邦)을 아들과 같이 보고 소방에서는 황조를 아버지와 같이 섬기는데, 아들로서 아버지를 저버린다는 이름을 얻는다면, 그 아들이 된 자가 마땅히 어떻게 스스로 처신하겠습니까? 소방이 충성된 마음으로서 중국에 사대(事大)함은 강물이 일만 번 꺾이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가는 것과 같은데, 이러한 무고의 말을 들으면서부터 통분(痛忿)함을 머금고 원통하여 ‘살아있는 것이 즐겁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대부(大部)에서 부주(敷奏)하고 밝게 변별(辨別)하여서 천하(天下)로 하여금 모두 소방이 오랑캐와 내통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한 다음에야,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금수(禽獸)에서 사람이 되고 이적(夷狄)에서 중국(中國)이 되고 반역(反逆)에서 충순(忠順)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북궐(北闕) 아래에서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하늘과 땅 사이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황제가 유지(諭旨)로써 말하기를, “배신(陪臣)의 변명(辨明)하고 설원(雪冤)하는 글을 읽어보니 매우 명석한데, 어찌 여러 대에 걸쳐서 중국을 공경(恭敬)하다가 하루아침에 중국을 배반하고 오랑캐를 따르겠는가? 짐(朕)은 길이 그대의 충정(忠貞)을 알겠고, 그대 나라에 회유(懷柔)하는 정책을 바꾸지 않겠다. 배신(陪臣) 김 아무개 등이 충성을 바치는 것을 자세히 보니, 가상하도다.”라고 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 3월에 본국(本國)에 후금(後金)의 군사가 침입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선생은 다시 명나라 해당 부서(部署)에 글을 올려 명나라에서 출병(出兵)하여 오랑캐의 소굴을 바로 소탕해서 그 후방을 교란시킬 것을 간청(懇請)하였다. 또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우리나라를 무고(誣告)하여 주달(奏達)한 것을 변명(辨明)한 것이 매우 지극하니, 명나라의 해당 부서에서 황제에게 주문(奏聞)하기를, “김 아무개 등이 신(臣)의 부서에 정문(呈文)을 보냈는데, 이것을 읽어보기를 채 끝내지도 아니하여 비분해서 가슴을 친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니, 황제가 위무(慰撫)하는 신하에게 명하여 오랑캐 소굴의 빈틈을 타서 정예병을 골라 곧바로 소탕하고 일을 지연(遲延)시키지 말도록 하였는데, 위무(慰撫)하는 군사가 수병(水兵)을 보내어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렀고, 태감(太監) 4인이 계속하여 이르렀으나, 얼마 있지 아니하여 군사를 혁파하고 돌아가버렸다. 선생이 귀국(歸國)하여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명나라 해당 부서의 제본(題本)과 황상(皇上)의 유지(諭旨)를 살펴보니, 우리나라에서 무고(誣告)당한 사실을 비단 통쾌하게 설원(雪冤)하였을 뿐만 아니라 황제가 보낸 십행(十行)의 윤음(綸音)은 글자마다 정녕(丁寧)하니, 사명(使命)을 받든 신하의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므로 일이 매우 훌륭하다.”고 하고, 이로 말미암아 선생을 대사간(大司諫)에 임명하여 가의 대부(嘉義大夫)의 품계(品階)에 승진시켰다.
임금이 인견(引見)하니, 선생이 계달(啓達)하기를, “오랑캐의 군마(軍馬)가 깊이 침입하여 종묘사직(宗廟社稷)이 몽진(蒙塵)하고, 성(城)이 함락되는 치욕(恥辱)은 차마 들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 호차(胡差, 오랑캐 사신) 2인이 장차 이르게 되었으므로, 선생이 차자(箚子)를 올려서 사양하고 보내기를 청하였고, 뒤에 또 중국의 물화(物貨)를 오랑캐에게 주지 말자고 청하였다.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임명되었다가 도승지(都承旨)에 개차(改差)되었다.
광해군(光海君) 때에 원수(元帥) 강홍립(姜弘立)이 오랑캐에게 항복하였는데, 이해 봄에 오랑캐가 침입한 것은 실로 강홍립이 이들을 향도(嚮導)한 것이었다. 화친(和親)이 성립되자 오랑캐가 그를 남겨두고 돌아갔는데, 강홍립이 죽자 조정에서 그 관직을 회복하려고 하니, 선생이 계달하기를, “강홍립의 죄는 반역(反逆)에 참여한 조문에 부합하는데도 국가에 법(法)이 없어 왕(王)의 주륙(誅戮)이 더해지지 않았는데, 지금 만약 강홍립을 복관(復官)하고 그 상(喪)에 부의(賻儀)한다면, 장차 무엇으로써 인신(人臣)의 충성을 권장하겠으며 천하(天下)의 악(惡)을 징계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때에 가족(家族)들이 적병(賊兵)을 피하여 안동(安東)에 있었는데, 선생이 휴가를 청하여 (안동에) 성묘(省廟)하였다. 나라에서 큰 의논이 있어서 부제학(副提學)으로서 명소(命召)를 받고 조정에 돌아왔다. 선생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부서(簿書, 관청의 장부와 문서)에 쓸데없는 수고를 하지 말고 원대(遠大)한 계획을 넓히기에 힘써야 하며, 장구(章句)에 쓸데없이 부지런하지 말고 고명(高明)한 경지를 깊이 탐구해야 합니다. 비록 여러 가지 계책을 받아들이더라도 반드시 좋은 계책을 선택하여 합당한 것을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사람을 살리기를 좋아하기에 힘쓴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악한 사람을 징벌하여 간사한 무리를 없애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세자(世子) 부빈객(副賓客)을 겸하였고, 옮겨서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무진년(戊辰年, 1628년 인조 6년)에 유효립(柳孝立)의 모반(謀反)이 일어나자, 선생이 대간(臺諫)의 우두머리로서 국문(鞫問)에 참여하였고, 자헌 대부(資憲大夫)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승진되었다. 대사헌(大司憲)ㆍ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을 역임하였고, 특별히 도승지 겸 홍문관 제학(都承旨兼弘文館提學)ㆍ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임명되었다. 병환이 나자 특별히 의원(醫員)과 내약(內藥)을 보내라는 왕명(王命)이 내렸다.
기사년(己巳年, 1629년 인조 7년)에 또 차자(箚子)를 올려서, (경연(經筵)에서) 나라의 중요한 일을 강(講)하고 폐정(弊政)을 혁파하며, 백성들의 힘을 덜어주고 군병(軍兵)을 양성할 것을 간청하였다. 오랑캐의 사신 중남(仲男)은 (오랑캐에) 사로잡힌 노복이다. 임금이 그를 불러서 만나볼 때 조정의 의논이 그가 의자(椅子)에 앉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선생은 통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차자(箚子)를 올려서 이것을 극언(極言)하였다.
대사헌(大司憲)으로서 목성선(睦性善) 등을 논죄하고 탄핵하니, 임금의 엄한 교지(敎旨)로써 체임(遞任)되었다. 이보다 앞서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이 여러 번 역적(逆賊)의 공초(供招)에 나왔으나, 조정에서 바야흐로 (그의 목숨을) 보전(保全)할 방책을 의논하였는데, 목성선과 유석(柳碩) 등이 상소(上疏)를 올리고 간사한 계책으로 모함할 방도를 시험하니, 선생이 일찍이 그 음흉하고 간악한 정상(情狀)을 통렬하게 배척하였다. 유효립(柳孝立)의 옥사(獄辭)에서 이공(李珙)을 성토하여 말함이 더욱 심하자, 목성선과 유석의 당파(黨派)도 또한 합사(合辭)하여 죄를 주도록 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목성선 등을 추후하여 논핵하니, 임금이 이것을 당론(黨論)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러므로 선생은 여러 번 벼슬을 제배(除拜)하는 것을 사양하였다.
이듬해 경오년(庚午年, 1630년 인조 8년) 겨울철에 비로소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제배(除拜)하는 왕명을 받았다.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 봄철에 영흥(永興)에 있는 진전(眞殿, 준원전(濬源殿))을 봉심(奉審)하였다. 도승지(都承旨)로서 임금의 사친(私親)을 높여 받드는 것이 예절이 아니라고 논하였는데, 뒤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어서 이것을 더욱 논하였다. 이어서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귀(李貴)를 탄핵하다가 거듭 견책당하여 사임하고, 벼슬에서 물러나서 석실(石室)에서 살았다. 인목 왕후(仁穆王后)가 승하하자 궁중에 들어가서 문상(問喪)하고 바로 돌아왔다.
계유년(癸酉年, 1633년 인조 11년)에 대신(大臣)의 추천으로 함경 감사(咸鏡監司)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였다. 이해부터 을해년(乙亥年, 1635년 인조 13년)에 이르기까지 3년 동안에 다섯 번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하였으며, 또 부제학(副提學)과 대사성(大司成)에 임명하는 왕명이 있었는데, 모두 힘써 사양하거나 혹은 잠시 출사(出仕)하였다가 곧 물러났다. 임금이 일찍이 어비(御批)를 내려서 말하기를, “경(卿)의 강직(剛直)을 내가 날마다 생각하고 있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경을 이와 같이 생각하는데, 경 또한 대궐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겠는가?”라고 하였으나, 선생도 또한 상언(上言)하기를, “몸은 쓰여지나 말이 폐해짐은 옛사람이 부끄러워하던 것입니다. 신이 나아가도 말이 쓰여지지 않으면 어찌 물러나 간언하는 것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신이 중년(中年)에 온갖 병에 걸려서 대개 여러 가지 의술을 베풀었지만 의술의 힘으로 깊은 고질병을 구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좋은 때는 쉽게 가고 늙음은 나는 듯하여 천금(千金)의 육신(肉身)도 홀연히 아침 이슬과 같이 될 것입니다. 당시에 신단(神丹)의 묘약(妙藥)을 제조하여 원기(元氣)를 보충하여 목숨을 연장하는 방술(方術)을 권유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신은 그 말을 듣지 않다가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으니, 대개 지극한 경계를 우언(寓言)으로 풍자한 것이다.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상(喪)을 당하자 선생이 그때에 이미 조정에 들어가 있었는데, 의금(衣衾, 옷과 이불)과 교모(絞冒, 새끼와 수의(壽衣))의 상구(喪具)를 상방(尙方)에서 취하여 지급하고 일체의 물건을 시민(市民)에게서 취하지 말도록 청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양관(兩館,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大提學)에 임명되었고,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개차(改差)되어 정헌 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그때에 오랑캐(청(淸)나라)가 이미 황제(皇帝)의 칭호(稱號)를 참칭(僭稱)하였으므로 우리 조정에서 의리에 의거하여 그 사신을 배척하였는데, 오랑캐의 군사가 아침저녁으로 장차 침입하려고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면서 아무런 군비(軍備)를 마련한 바도 없었다. 선생이 자기 죄를 뉘우치는 교서(敎書)를 편찬하여 바쳤고, 또 진(鎭)을 설치하고 군대를 나누어 배치하는 편부(便否)를 논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었고 청렴하고 근신(謹愼)하다고 하여 특별히 숭정 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또 일로써 임금의 뜻을 거슬려서 체임(遞任)되어 석실(石室)에 돌아왔는데, 이해 12월에 청(淸)나라 오랑캐가 본국에 입구(入寇)하였으므로, 임금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하였다. 선생이 행재소(行在所)에 따라가서 입대(入對)하여 말하기를, “금일의 계책은 마땅히 먼저 적과 싸우고 뒤에 화해(和解)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대신(大臣) 이하의 사람들은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보내어 오랑캐의 군사가 물러가도록 요구하려고 하였으므로, 선생이 간절히 꾸짖기를, “어찌 신하로서 저군(儲君, 세자(世子))을 적에게 보내는 의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 말하는 기색이 준엄(峻嚴)하였기 때문에 대신(大臣)들이 나갈 바를 알지 못하고 이에 궐문(闕門)에 나아가서 대죄(待罪)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가지 않을 수 있었다. 예조 판서 겸 비변사 당상(禮曹判書兼備邊司堂上)에 임명되어 입대(入對)할 적에 한결같이 굳게 지키려는 계책을 극력 진달(陳達)하였으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장차 무엇을 믿겠는가?”라고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천도(天道)를 믿을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오랑캐의 포위가 더욱 급박해지자, 임금이 성황사(城隍祠)와 백제(百濟) 시조묘(始祖廟)에 기도하도록 명하였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이 궁(窮)하면 근본으로 돌아가므로, 질병(疾病)의 고통이 참담(慘憺)하면 사람은 반드시 ‘아버지’ㆍ‘어머니’를 부릅니다. 주상(主上)께서는 친히 개원사(開元寺)에 나아가서 원종(元宗, 인조(仁祖)의 생부(生父))의 진좌(眞座)에 기도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 정월 16일에 묘당(廟堂, 의정부(議政府))에서 바야흐로 항복하는글[某文字]을 초안(草案)하였는데, 선생(先生)이 이것을 읽다가 끝마치지 못하고 격분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통곡(痛哭)하고 그 초안을 갈기갈기 찢으면서 말하기를, “여러 공(公)들은 어찌하여 차마 이러한 글을 짓는가?”라고 하고, 이어서 또 입대(入對)하기를 청하였는데, 분노한 기운이 가슴까지 가득차서 눈물과 콧물이 마구 턱으로 흘렀다. 한참 있다가 아뢰기를, “금일의 의논은 양립(兩立)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먼저 소신(小臣)을 죽여주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급히 저지하고 말하기를, “경(卿)은 어찌하여 이와 같이 하는가? 내 한 몸을 위한 계책이 아니며 위로는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위하고, 또 온 겨레를 차마 죽음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선생이 대답하기를, “신의 말은 곧 목숨을 구하고 종사를 보존하려는 것입니다. 옛날 정강(靖康, 송 흠종(宋欽宗)의 연호) 때 (휘종(徽宗)ㆍ흠종(欽宗)) 두 황제가 오랑캐에게 사로잡혀 가서 사막(沙漠)의 가운데에서 천신 만고(千辛萬苦)하였을 적에, 비록 종묘(宗廟)의 아래에서 죽지 않았던 것을 한스러워하였다고 하더라도 어찌 미칠 수가 있었겠습니까? 지금 만약 군신(君臣)이 위아래에서 마음으로 맹세(盟誓)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지킨다면 어찌 전하(殿下)를 위하여 죽을 사람들이 없겠습니까? 만약 천심(天心)이 끝내 그 화(禍)를 뉘우치지 않는다면 지하(地下)에 돌아가서 선왕을 뵙더라도 부끄러움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물러나서 마침내 스스로 자결[自靖]할 계획을 결심하고 6일 동안 밥을 먹지 아니하였고, 또 스스로 목을 매었으나 곁에 있는 사람들이 극력 이것을 구원하였다. 마침 오랑캐가 우리 조정으로 하여금 척화(斥和)를 주장하는 신하들을 잡아서 보내도록 하였다는 것을 듣고, 드디어 음식을 다시 먹고 잡혀가기를 청하였다. 대간(臺諫)의 계달(啓達)에서 다만 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 두 사람만을 보내기로 하였는데, 선생이 국서(國書)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때를 당하여, 사람들이 완성군(完城君) 최명길에게 말하기를,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니, 완성군이 말하기를, “몸을 부축해서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달(정월) 그믐날에 임금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을 나와서 서쪽으로 갔는데, 선생도 산성(山城)을 나와서 길 옆에 엎드려서 멀리서 임금을 바라보고 절하면서 통곡(痛哭)하였다. 2월에 남한산성에서부터 안동(安東)의 학가산(鶴駕山)으로 들어갔는데, 호종(扈從)한 공로로써 숭록 대부(崇祿大夫)에 올랐으나 상소하여 이것을 사양하였고, 또 말하기를, “추위와 더위가 그치지 않는다면 갖옷[裘]과 갈옷[葛]을 버릴 수가 없을 것이며, 적국(敵國)이 멸망하지 않는다면 전쟁과 수비를 잊어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와신 상담(臥薪嘗膽)할 뜻을 능히 가다듬어, 요새의 땅을 더욱 수축하고, 한때의 맹약(盟約)을 믿지 말며, 전일의 큰 덕망(德望)을 잊지 말고, 호랑(虎狼)과 같은 인(仁)을 지나치게 믿지 말며, 부모(父母)의 나라를 가볍게 단절(斷絶)하지 마소서. 신은 언제나 선왕(先王)이 ‘강물은 일만 번 꺾이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갈 것이다.’라고 (명나라에) 상주(上奏)한 것을 생각하면 일찍이 눈물이 흘러서 옷깃을 적시지 아니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에게 대답하는 글에서 말하기를, “금일(今日)에 나의 진퇴(進退)는 모두 그 뜻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후세(後世)의 숙도(叔度, 김상헌의 자(字) 곧 자신을 말함)같은 사람에게 알려지기를 바랄 뿐이다. 만약 복수(復讐)하거나 설욕(雪辱)한다는 의논이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면, 내가 비록 구천(九泉)에 있다고 하더라고 오히려 생기(生氣)가 날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대가(大駕)가 남한산성을 나가는 날에 만약 성(城) 밖의 1보(步)의 땅이라도 밟는다면, 이것은 순(順)을 버리고 역(逆)을 따르는 날이다. 임금이 사직(社稷)을 위하여 죽는다면 신자(臣子)들도 따라서 죽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임금에게 간쟁(諫爭)해야 하며, 간쟁해서 윤허(允許)를 얻지 못한다면 물러가서 자결[自靖]해야 한다. 이것이 신자(臣子)의 도리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오로지 조종(祖宗)의 남긴 은택(恩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하는데, 지금 2백 년 왕조(王朝)의 강상(綱常)을 부지(扶持)하려는 것은 선왕(先王)의 교육한 은택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가 오랑캐를 끼고 임금을 협박하여 나라를 팔아먹는 것을 자기 공로(功勞)로 삼는다. 언제나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가 우리나라를 구원해준 은혜를 생각하면, 골짜기 가운데를 방황하면서 흘린 피눈물이 말라버린다. 밤낮으로 마음에 맹세(盟誓)하는 것은 다만 한 자루의 칼로써 선우(單于, 흉노족의 우두머리)의 머리를 베어버리고, 간신(奸臣)의 심장을 쪼개버리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인년(戊寅年, 1638년 인조 16년) 가을에 장령(掌令) 유석(柳碩) 등이 장차 일망 타진(一網打盡)할 계획을 세우고, 겸하여 때를 틈타서 원한을 갚으려고 하여 아뢰기를, “군신(君臣)의 의리는 천지(天地) 사이에서 도망할 수 없으며, 생사(生死)와 영욕(榮辱)은 이치상 홀로 우뚝설 수가 없습니다. 김 아무개[金某]는 몸을 빼내어 멀리 도망하여 스스로 ‘몸을 깨끗하게 하여 절개를 온전하게 지키고, 더러운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니, 명예를 구해 임금을 팔고 파당을 세워 나라를 그르침은 다만 적은 일일 뿐입니다. 그가 임금을 무시하는 부도(不道)한 죄를 바로잡지 아니할 수가 없으니, 청컨대 극변(極邊)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그때에 남이공(南以恭)이 인사권을 잡고 불령(不逞)한 무리들을 끌어들여 대각(臺閣)에 포진(布陳)시켰는데, 이계(李烓)ㆍ이도장(李道長)ㆍ박계영(朴啓榮)ㆍ정지호(鄭之虎)ㆍ최계훈(崔繼勳)ㆍ이여익(李汝翊)ㆍ권도(權濤)ㆍ박수문(朴守文)ㆍ박돈복(朴敦復)ㆍ홍진(洪瑱)ㆍ이운재(李雲栽)ㆍ이경상(李慶相)ㆍ임효달(任孝達)ㆍ신유(申濡)ㆍ이주(李)ㆍ김수현(金壽賢) 등이 서로 잇달아 논청(論請)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그해 겨울철에 이도장(李道長) 등이 다시 이것을 논청하였으나, 임금이 다만 파직(罷職)하라고 명하였을 뿐이다. 이계(李烓) 등이 다시 힘써 논청하니, 마침내 임금이 삭탈 관직(削奪官職)하도록 명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639년 인조 17년)에 도로 직첩(職牒)을 주고, 이어서 서용(敍用)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선생은 조정에서 장차 군사를 징발하여 오랑캐(청(淸)나라)를 돕는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피눈물을 흘리며 상소문을 썼는데, 그 대략에, “옛날부터 죽지 아니한 사람은 없었고 또한 망하지 않은 나라도 없었는데, 죽거나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난역(亂逆)을 따르는 일은 차마 할 수 없는 짓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저들 (오랑캐의) 세력이 바야흐로 강성하므로, 그들을 어긴다면 반드시 화(禍)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데, 신은 명예와 의리가 지극히 중요하므로, 이것을 범(犯)한다면 또한 재앙(災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의리를 저버리고도 끝내 화를 피하지 못하는 것보다, 정도(正道)를 지키고 천명(天命)을 기다리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대저 순리(順理)를 섬긴다면 백성들이 마음으로 즐거워할 것이며, 백성들이 마음으로 즐거워한다면 나라의 근본이 튼튼해질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나라를 지킨다면 그 도움을 얻지 못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의리를 저버리고 은혜를 잊어버리면 천하(天下) 후세(後世)의 의논은 생각하지 않더라도 장차 어떻게 지하(地下)에서 선왕(先王)을 뵙겠습니까?” 하였다. 상소문이 완성되자 받들어 사당(祠堂)에 고(告)하였는데, 임금은 이것을 듣고서 회보(回報)하지 아니하였다.
경진년(庚辰年, 1640년 인조 18년)에 오랑캐의 사신이 용만(龍灣, 의주(義州)) 위에 이르러 협박 공갈하기를 온갖 방법으로 지독하게 하면서 선생을 잡아 보내도록 하였는데, 승지(承旨) 신득연(申得淵)이 또한 구속(拘束)되어 심문 중에 있다가 선생을 핑계대고 자기는 죄에서 벗어나기를 구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에서 선생을 재촉하여 한밤중에 길을 나서게 하였다. 임금이 중사(中使, 내관(內官))를 보내어 어찰(御札)과 초구(貂裘)를 하사(下賜)하였는데, 선생도 상소하여 사례(謝禮)하였다. 선생이 이미 용만(龍灣)에 도착하자, 오랑캐의 사신이 묻기를, “국왕(國王)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내려올 때에, 당신은 홀로 청나라를 섬길 수가 없다고 말하고 하성(下城)을 따르지 아니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의도인가?”라고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내가 늙고 병들어서 따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오랑캐의 사신이 또 묻기를, “근년에 나라에서 주는 관직과 작위(爵位)를 어찌하여 받지 아니하였는가? 군사를 도와달라고 하였을 때에 어찌하여 저지하고 만류하였는가?”라고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의 지조(志操)를 지켰고, 나는 나의 군주(君主)에게 고(告)한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이것을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하니, 오랑캐의 사신이 말하기를, “두 나라가 이미 한집안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다른 나라라고 말하는가?”라고 하므로, 선생이 대답하기를, “두 나라는 각기 나누어진 땅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이것을 다른 나라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때에 오랑캐를 따라와서 이 광경을 구경한 사람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칭찬하고 찬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랑캐의 사신은) 마침내 선생을 북쪽으로 끌고 갔다.
신사년(辛巳年, 1641년 인조 19년) 초원(初元)에 심양(瀋陽)에 이르렀다. 청나라의 한(汗, 임금)이 또 심문하므로 선생이 전과 같이 대답하자, 드디어 구속(拘束)하여 옥(獄)에 가두었다. 겨울철에 선생의 질병이 심해지자, 청나라 한이 의주(義州)로 내보내게 하였다. 부인(夫人) 이씨(李氏)가 안동(安東)에서 세상을 떠나 임오년(壬午年, 1642년 인조 20년) 정월에 부음(訃音)이 이르자, 신위(神位)를 마련하고 통곡(痛哭)하였고 상복을 입기를 상례(喪禮)대로 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643년 인조 21년)에 오랑캐가 어떤 사건 때문에 이계(李烓)를 잡아갔는데, 이계가 오랑캐에게 우리 조정의 기밀(機密)을 고(告)하였다. 그 말이 선생에게까지 미쳤고, 스스로는 죄를 면하기를 구하였으므로, 오랑캐가 선생을 소환(召還)하여 심양(瀋陽)에 들어가 완성군(完成君) 최명길(崔鳴吉)과 같이 북관(北館)에 가두어 두었다. 여름에 풀어서 질관(質館, 인질인 세자가 머물던 관소(館所))으로 보내어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수종(隨從)하게 하고 (청나라 한(汗)에게) 배사(拜謝)하게 하니, 최명길이 선생을 팔꿈치로 건드려 함께 배사하려고 하였으나, 선생은 기꺼이 따르지 않자 오랑캐가 억지로 시켰는데, 끝내 땅에 드러누워버렸고 무릎을 꿇지 아니하였다.
갑신년(甲申年, 1644년 인조 22년) 3월에 명(明)나라가 멸망하자, 선생은 시(詩)로써 이것을 애통하게 여겼다. 을유년(乙酉年, 1645년 인조 23년)에 오랑캐가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우리나라로 돌려보내니 선생도 이를 수행(隨行)하여 돌아왔다. 일행이 서교(西郊)에 이르자 선생이 임금에게 상소(上疏)하였으나, 임금이 회보(回報)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석실(石室)로 나왔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김 아무개가 나라의 환난(患難)을 당하여 한 가지 절개를 꼿꼿이 지킨 것은 천고(千古)에 비교할 사람이 드무니, 어찌 천하(天下) 후세(後世)에 큰 빛이 되지 아니하겠습니까? 진실로 주상(主上)께서 면대(面對)하고 위로하여 가상히 여기고 포장(褒獎)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임금이 대답하기를, “이 경(卿)이 살아서 고국(故國)으로 돌아왔으나 공문(公門)에 이르지 아니하는데, 이것은 또한 그가 벼슬에 나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바야흐로 부끄러워하는데, 무슨 위로하고 유시(諭示)할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선생이 황공(惶恐)하여 상소를 올렸다.
4월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졸(卒)하자, 선생이 궁중에 들어가서 문상하고 바로 물러났다. 병술년(丙戌年, 1646년 인조 24년)에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임명되어 세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윤허(允許)하지 아니하고 또 승지(承旨)를 보내어 돈독하게 유시(諭示)하였다. 이때에 마침 또 반역(反逆)의 변고(變故)가 있자 마침내 궁중에 들어가서 사례하고 동궁(東宮)을 보필할 방도를 진술(陳述)하였고, 또 이응시(李應蓍)의 직언(直言)으로써 얻은 죄를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기를 논청(論請)하였다. 이어서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간청하여 상소장을 32번이나 올리니, 비로소 체임(遞任)되어 바로 돌아왔다. 동궁(東宮)의 관료로서 찬선(贊善)과 진선(進善)을 처음으로 설치한 것은 실로 선생의 건의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수년 동안 연달아 은혜로운 왕명이 있었으나 번번이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기축년(己丑年, 1649년 인조 27년)에 효종 대왕(孝宗大王)이 즉위(卽位)하자, 선생이 들어가서 대행왕(大行王, 죽은 임금 즉 인조(仁祖))의 빈궁(殯宮)에 문상하고 물러나서 돌아왔다. 임금이 거듭 승지(承旨)를 보내어 돈독하게 유시(諭示)하였기 때문에, 드디어 도성(都城)에 들어가서 숙배(肅拜)하고 사례하니, 임금이 명하여 견여(肩輿)를 타고 대궐(大闕) 안을 출입하게 하였다. 재이(災異)로 인하여 임금의 수성(修省)할 방도를 차자(箚子)로써 진달(陳達)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고, 귀양 가 있던 신하 이경여(李敬輿) 등 4인을 가까운 곳으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니, 글을 올려 고하고 교체되었다. 국장(國葬) 이후에 북사(北使, 청(淸)나라 사신)가 도성(都城)에 들어오자, 선생은 도성을 나와서 동교(東郊)에 거주하였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임금이 특별히 선생을 소환(召還)하고 이어서 사대(賜對, 입대(入對)를 허락하는 것)하니, 선생이 진언(進言)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모든 일은 때가 있는데, 때가 지나면 일을 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성상(聖上)께서 이때에 미치기를 생각하십니까?”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다스리려고 원하는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다만 과인은 재주가 없고 덕(德)이 적을 뿐이다.”라고 하므로, 선생이 대답하기를, “제갈량(諸葛亮)이 말하기를, ‘망령되게 스스로 비박(菲薄)하다고 인유(引喩)하다가 의리를 잃어버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였으니, 원컨대 더욱 이러한 마음을 다하여 날마다 그 덕(德)을 새롭게 하소서. 요(堯)ㆍ순(舜) 같은 성왕(聖王)도 또한 사람을 알아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습니다. 진실로 능히 인재를 알아보고 직임을 맡긴다면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또 세상에 인재(人才)가 없다는 말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옛날부터 흥기(興起)하는 세상에서 쓰인 인재는 쇠망(衰亡)하는 세상에서 버려졌습니다. 또 민생(民生)의 곤궁(困窮)은 장리(贓吏)에서 비롯되는 것이 많으니, 청원하건대 그 법(法)을 엄하게 하소서.”라고 하였고, 또 장수(將帥)가 될 만한 재목을 미리 양성하여 나라의 위급(危急)한 때에 대비할 것을 청하였고, 또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등용(登用)하는 잘못을 논(論)하였다. 그때에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선생이 조정에 있다가 장차 물러나려고 하자, 선생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엎드려 생각해 보건대, 김 아무개는 유림(儒林)의 숙덕(宿德)으로서 노성(老成)하고 단정하므로, 사림(士林)에서 추앙(推仰)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가 물러나는 것을 좇아서 새로운 덕화(德化)를 돕는다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드디어 김집(金集)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았다. 이윽고 또 사대(賜對)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성상(聖上)께서 마음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항상 상제(上帝)를 마주 대하는 것같이 한다면, 천재(天災)와 민원(民怨)은 모두 없어질 것입니다. 또 인군(人君)은 마땅히 양기(陽氣)를 부양하고 음기(陰氣)를 억제하려는 뜻을 가져야 하는데, 음양(陰陽)의 성쇠(盛衰)는 오로지 군자(君子)를 조정에 나오게 하고 소인(小人)을 물러가게 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경인년(庚寅年, 1650년 효종 원년)에 선생이 또 상소하여 임금에게 경계하는 말을 진달(陳達)하였는데, 그 대략에, “바야흐로 지금 정사(政事)의 호령(號令)이 공의(公議)를 거듭 저버리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편안하기 어려운 상황과 두려워할 만한 형세는 비유하자면 살얼음 위를 밟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큰 뜻을 분발(奮發)하여 조종(祖宗)의 부탁한 중책을 저버리지 마소서.”라고 하고, 인하여 은퇴하기를 애원하여 마지아니하니, 임금이 마침내 이것을 윤허(允許)하였다. 조정(朝廷)의 관료(官僚)와 성균관(成均館)의 학생(學生)들이 모두 힘써 머물기를 청하였지만 선생의 뜻은 이미 결정되어 돌이킬 수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사대(賜對)하고 예우(禮遇)를 우대하여 보냈다. 선생이 경계(警戒)의 말을 진달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그 대요(大要)는 군신(群臣)과 백성(百姓)에게 죄를 얻는 일이 없도록 할 것과 나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남의 착한 일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대행왕(大行王)의 연제(練祭)와 상제(祥祭)에는 모두 궁중에 들어가서 문상하였고, 상소를 올려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구휼(救恤)하는 방도를 진술(陳述)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652년 효종 3년)에 임금이 선생의 질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의원(醫員)을 보내어 검진(檢診)하게 하였다. 선생의 유소(遺疏)가 올라오자,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하교(下敎)하기를, “하늘이 힘써 세상에 남겨두지 아니하고 나의 원로(元老)를 잃게 하니 애통함이 극심하도다. 이 유소(遺疏)를 보니 나라를 위한 충성이 죽으면서도 더욱 독실(篤實)하므로 깊이 경탄하노라.” 하였다. 그 상소문에 대략 이르기를, “신이 높은 반열(班列)에 올랐으나 다만 죄려(罪戾)를 많이 지었습니다. 병자년(丙子年)ㆍ정축년(丁丑年) 이후에 벼슬할 생각을 버렸으나, 성명(聖明)을 만나서 지나치게 우악한 은혜를 입었으니, 구구(區區)한 마음은 다만 사류(士類)를 밝게 선양(宣揚)하고 나라의 기강(紀綱)을 진작(振作)하여서 성상의 뜻을 만분의 일이라도 보필(輔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이 마음과 어긋나서 낭패(狼狽)하여 돌아왔습니다. 지금은 천명(天命)이 다하였음을 알려 이 인생이 끝났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초복(初服, 처음 즉위하여 교화 정치를 베푸는 것) 때의 뜻을 더욱 권려(勸勵)하여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정성을 변하지 말 것이며, 훌륭한 사류(士類)를 등용해서 정치하는 방도를 낼 것이며, 실덕(實德)을 잘 닦아서 대업(大業)을 넓히도록 하소서. 신은 죽음에 임하여 숨이 짧아지니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해 8월 18일에 선생을 석실(石室)의 선영(先塋)에 예장(禮葬)하였다. 선생이 심양(瀋陽)의 지관(質館)에 있을 때에 일찍이 스스로 비명(碑銘)을 짓기를,
“지극한 충성을 금석(金石)에 맹세하고 (至誠矢諸金石)
대의(大義)를 일월(日月)에 매달도다 (大義懸于日月).
천지(天地)가 내려다보고 있어 (天地鑑臨)
귀신(鬼神)이 질정한 것이로다 (鬼神可質).
고도(古道)에 부합하기를 바랐는데 (蘄以合乎古)
도리어 현세(現世)에는 어긋나네 (而反盭於今).
아! 백대(百代)의 후세(後世)에 (嗟百世之後)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人知我心)”
라고 하였는데, 선생이 남긴 경계(警戒)의 말씀에 따라 다만 묘석(墓石)에다 이 글만을 새긴다.
계사년(癸巳年, 1653년 효종 4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고 시호(諡號)를 문정(文正)이라고 하였다. 9년 뒤에 신축년(辛丑年, 1661년 현종 2년)에 효종(孝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였으니, 대개 조정에서 은덕(隱德)을 높이는 예전(禮典)을 극진하게 하지 아니한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생을 따라서 공부하던 선비들과 그저 풍문(風聞)을 듣고 의리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선생의 죽음을 듣고서 달려와서 통곡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으며, 먼 지방에서는 모두 서로 모여서 신위(神位)를 만들고 통곡하였고, 그 유적(遺跡)이 있는 곳에서는 모두 서원(書院)을 세워서 향사(享祀)하였다.
선생은 천성[天分]이 매우 고매(高邁)하여 어릴 때부터 ≪소학(小學)≫의 글을 읽기를 좋아하였고 평생(平生) 동안 수용(受用)한 것은 이것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였다. 그 대요(大要)는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 힘써 행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것인데, 집에 있을 때에는 그 도(道)를 곡진(曲盡)하게 하여 윤리(倫理)를 반드시 바로잡고 은혜와 의리를 반드시 돈독히 하였으며, 조정(朝廷)에 근무할 때에는 임금을 섬기는 데에 예절(禮節)을 다하여 털끝만큼도 방심(放心)하거나 정도에 지나치지 아니하였다.
인조(仁祖)가 일찍이 말하기를, “김 아무개가 후사(喉司, 승정원(承政院))에 있을 때에는 대궐(大闕) 안이 숙연(肅然)하였는데,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 나아가고 물러감과 어렵고 쉬운 절차는 한결같이 회옹(晦翁, 주희(朱熹)의 호)선생이 남긴 법도(法度)를 따랐는데, 대개 그 도(道)는 스스로 학업을 닦고 몸을 가지런히 하여, 이것을 미루어서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본말(本末)이 아울러 해박하고 안팎이 남김없이 밝아, 말로는 대개 능히 궁구(窮究)하지 못하는 바가 있었다. 그 큰 절개를 세운 것에 이르러 비록 해와 달과 같이 빛나서 천지에 헌거(軒擧, 높이 올라감)하더라도 또한 지조를 지킨 것은 견고(堅固)하고 함양(涵養)한 지식은 깊고 넓어서, 자연히 사생(死生)을 한서(寒暑)의 변화와 같이 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답습하거나 취할 수 있는 것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 공로(功勞)를 논한다면 하늘의 질서는 사람을 살리는 대체이므로 하루라도 여기에서 타락(墮落)하여 폐한다면 사람은 짐승이 될 것이고 중국은 오랑캐가 될 것이다. 명(明)나라 말기를 당하여, 선생은 속국(屬國)의 배신(陪臣)으로서 한 손으로 나라의 기둥을 떠받들어 삼강(三綱)이 없어지지 않게 하고, 구법(九法, 주(周)나라 시대에 천하를 다스리던 법)이 해이하지 않게 하였다. 대저 세상이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과 도(道)가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것은 비록 기수(氣數)의 승제(乘除)에 쫓겨서 항상 능히 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하지만, 하늘은 반드시 그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리고 그 어두운 도를 밝혀주는 대인(大人)을 탄생시켜서 그 후세를 구원하는데, 선생이야 말로 어찌 그 사람이 아니겠는가?
효종(孝宗) 초기에 서로 더불어 만나보기를 좋아하고 일의 공로(功勞)를 이룩하려고 기약하니, 하늘의 뜻도 마치 장차 제(齊)나라 환공(桓公)과 진(晋)나라 문공(文公)의 일을 맡기는 것과 같았으나, 선생은 이미 자신이 쇠약(衰弱)하다고 한탄을 하였는데, 태산(泰山)이 이윽고 무너져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은 공언(空言)이 되고 시행되지 않았으나, 한유(韓愈)가 맹자(孟子)를 우왕(禹王)의 공적(功績)보다 높다고 하였으니, 어찌 반드시 규합(糾合)하여 한번 세상을 바로잡은 다음이라야 피발(被髮)과 좌임(左袵)3)의 오랑캐 풍속을 면한다 하겠는가? 아! 거룩하도다.
부인(夫人)은 판서(判書)에 추증된 이의로(李義老)의 따님인데, 후손이 없다. 선생은 중씨(仲氏) 김상관(金尙寬)의 아들 김광찬(金光燦)을 취하여 아들로 삼았는데, (김광찬의) 관직은 동지사(同知事)에 이르렀다. 손자 김수증(金壽增)은 지금 부사(府使)가 되었고, 김수흥(金壽興)은 원임 영상(原任領相)이며, 김수항(金壽恒)은 좌상(左相)이다. 그 손서들은 목사(牧使) 이정악(李挺岳), 현감(縣監) 홍주천(洪柱天), 군수(郡守) 이중휘(李重輝), 교리(校理) 송규렴(宋奎濂), 지평(持平) 이광직(李光稷)이다. 서출(庶出)로서 손자 김수징(金壽徵)ㆍ김수응(金壽應)은 모두 진사(進士)이고, 김수칭(金壽稱)과 김수능(金壽能)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자(正字)이다. 증손자(曾孫子) 김창국(金昌國)ㆍ김창숙(金昌肅)ㆍ김창직(金昌直)은 부사(府使, 김수증)의 소생이고, 김창열(金昌說)은 영상(領相, 김수흥)의 소생이며, 김창집(金昌集)ㆍ김창협(金昌協)ㆍ김창흡(金昌翕)ㆍ김창업(金昌業)은 좌상(左相, 김수항)의 소생이다.
문집(文集)은 몇 권이 세상에 간행(刊行)되었고, 또 ≪남사록(南槎錄)≫ㆍ≪독례수초(讀禮隨鈔)≫ 등의 책이 있다. 선생은 젊어서 스스로 호(號)를 청음(淸陰)이라고 하였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에는 스스로 석실(石室)이라고 많이 일컬었다.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들이 일컫기를, 석실 선생(石室先生)이라 하였다.
나는 몽매(蒙昧)하고 고루한 사람으로서 선생(先生)의 지우(知遇)와 장려(獎勵)를 심히 외람되게 받으면서 문하생으로 학습(學習)하였다. 지금 부사(府使, 김수증)와 여러 공들이 유당(幽堂, 무덤)의 명문(銘文)을 나에게 부탁하는데, 식견(識見)이 천박(淺薄)하고 문사(文辭)가 치졸(稚拙)한 것을 돌아보면 (선생의 업적을) 만분의 일이라도 형용(形容)하기에는 부족(不足)하다. 그러나 평상시 옛날 선생의 기상(氣象)과 가르침을 추억하여 생각하니, 비창(悲愴)한 마음으로 목이 메어 흐느끼면서 차마 글을 쓸 수가 없고, 또한 차마 잊어버릴 수가 없다. 그 평상시에 선생의 언행(言行)은 부사(府使) 형제가 기록하여 한 권의 책(冊)으로 만들었고, 또 나도 일찍이 외람되게 연보(年譜)를 자못 상세하게 편찬하였기 때문에, 지금 다만 그 대강을 위와 같이 기록하였고, 이어서 그 비명을 짓는 바이다. 그 명(銘)은 다음과 같다.
태일(太一)이 처음으로 갈라져서 음양(陰陽)이 있게 되었네. 비록 양(陽)일지라도 소멸(消滅)되는 것은 이것이 천리(天理)의 상도(常道)이니, 소멸되어 그치지 않으면 인류(人類)는 곧 망하게 되리라. 그러므로 하늘이 대덕(大德)을 탄생시켜 돕게 할 권한을 주었네. 이에 그 쇠망(衰亡)을 부지(扶持)하여 유약함을 끊고 길을 이끌어 주므로, 양(陽)이 와서 회복되기에 미쳐 붉은 빛이 빛났도다. 선생의 세상은 구주(九州)가 살벌하고 무서웠는데, 저 깊은 연못에 떨어져서 살아남는 자가 거의 드물었네. 천리(天理)는 다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큰 과일[碩果]이 있게 되었는데, 이미 위에서 피곤하였지만 그 회복이 아래에 있었네. 저들은 그 여막(廬幕)을 잃었는데 우리는 곧 견여(肩輿)를 얻었네. 때는 바야흐로 관문(關門)을 닫았으나 그 펼쳐질 조짐이 나타나서, 한번 펼쳐지고 두번 펼쳐지자 세번에는 태평(泰平)이 되었네. 남들은 비록 아직 생겨나지 않았지만 나는 스스로 크게 되었네. 천지의 기함(機緘)을 헤아려보면 아득하게 이어지는 데에 근본이 있고, 여기에서 싹이 자라나니 기선(機先)이라 하네. 아무리 어두운 겨울철에도 조화(造化) 없다고 말할 수 없으니, 아! 선생은 그 기틀을 바꾸어 놓음이 위대하네. 누가 그것을 알아주리오? 그 도(道)를 아는 사람이라네.
각주
- 1) 대기(大期)의 수(數) : 12개월 즉 여자가 임신한 지 12개월 만에 낳는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여불위전(呂不韋伝)에 “희(姬)가 임신한 것을 숨기다가 대기(大期) 때에 이르러 아들 정(政)을 낳았다.” 하였다.
- 2) 한 소제(漢昭帝)가 여덟 살에 즉위하자 곽광(霍光)이 광무제(光武帝)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정사를 도왔고, 소제가 죽자 창읍왕(昌邑王)을 맞이하여 세웠으나 음행(淫行)이 있어 폐위하고 선제(宣帝)를 세웠음.
- 3) 피발(被髮)과 좌임(左袵) : 피발(被髮)은 머리를 풀어헤치는 것을 말하며, 좌임(左袵)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것을 말함. ≪논어(論語)≫의 헌문(憲問)편에 보면, “관중(管仲)이 없었다면 우리는 피발(被髮) 좌임(左袵)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중국과 다른 오랑캐의 풍속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