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군면 향리에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을까? 멀리 원시시대에는?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영역으로 교차했을 것이다. 고려 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어떤 역사적 사건은 없었을까? 내가 이 작은 시골 마을을 두고 왜 이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이 모든 것은 저의 8대조 이하 조상님들이 뭍혀 있는 곳 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저의 8대조 김달행의 묏자리가 이곳으로 오기 전 향리의 모습을 단편적이나마 추적하였다.
여주군 개군산면 향곡리(현 양평군 개군면 향리)는 조선 선조 때 교하노씨 노직, 노직 형제의 선영이었다. 노직 형제의 조상님과 후손분의 묘역이 능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노직 형제의 기록은 선조 실록 등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의 기록을 옮긴다.
노직[ 盧稙 ]
1536(중종 31)∼1587(선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사치(士稚), 호는 별유(別宥)·호폐헌(好閉軒)·망포(望浦). 철강(鐵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통례 언방(彦邦)이고, 아버지는 현감 홍우(弘祐)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김희수(金希壽)의 딸이다.
1569년(선조 2) 알성문과에 장원, 형조좌랑이 되었는데 형옥(刑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녀 오랫동안 재임하면서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1573년 정언이 되고 이듬해 군정보충(軍丁補充)의 임무를 맡아 전라도경차관으로 파견되었다.
예문관제학을 거쳐 1576년 수찬이 되고, 동부승지를 거쳐 1582년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585년 부제학에 이어 호조·예조판서, 이듬해 시약청제조(侍藥廳提調)가 되었으며, 그 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간리(奸吏)를 적발하는 등 기강확립에 노력하였으며, 정사(政事)에 밝아 승정원 재직중에는 선조가 해당 관리를 부르지 않고 매사를 그에게 물을 정도였다. 이원익(李元翼)·유성룡(柳成龍)·강서(姜緖)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노직[ 盧稷 ]
1545(인종 1)∼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사형(士馨). 철강(鐵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통례(左通0xBC82) 언방(彦邦)이고, 아버지는 현감 홍우(弘祐)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김희수(金希壽)의 딸이다.
1570년(선조 3) 생원이 되고 158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써 주서로 옮겼으며, 그뒤 감찰·좌랑·지평을 거쳐 병으로 체직하였다.
그 뒤 부제학·황해감사·병조판서·경기감사를 거쳤다. 임해군옥사(臨海君獄事) 때 파직되었으나 판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감사로 있을 때 민폐를 덜어 칭송을 받았다. 서화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는데, 예서(隷書)와 전서(篆書)에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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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하노씨 노직 형제의 선영인 이곳은 그때 모습이 어떠했을까? 저는 어릴 때부터 노직 형제가문에 대한 궁금증이 컸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출사했던 유명가문이 아니었을까? 그렇게도 생각했다. 이끼 끼고 마모된 비석, 그리고 묘석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게 했다. 1980년대 필자가 향리 이장으로 근무할 때였다. 당시는 마을 유래를, 즉 지명사를 연구하는 시기였다. 하루는 양평문화원장 양혜석씨가 방문하였다. 나는 함께 저의 8대조 달행, 그리고 능안에 있는 노씨 묘역을 안내하였다. 이끼 끼고 마모된 비석과 석물, 노직 형제의 묘역에서 감탄과 함께 역사의 현장을 발견하였다. 고려시대의 인물이 아닌 조선조, 선조대왕 때 임진왜란의 국난에서 우국충정하신 훌륭한 분이심을 알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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