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香洞의 교하노씨

盧稷의 墓表

추읍산 2021. 2. 24. 10:39
노직의 묘표()
정경세()
: 사형()
국조인물고 권13 경재()

 

공의 성은 노씨()요 휘()는 직()이며 자()는 사형()이요 교하() 사람이다. 고려() 태조조() 때 노강필()이 태조를 도와 통일의 공을 세워 벼슬이 태자 태사()에 이르니, 공은 곧 그 후손이다. 고조 휘 이산()은 판군기시사()요, 증조 휘 철강()은 통정 대부() 안동 부사(使)에 증() 이조 참판()이며, 조부 휘 언방()은 통례원 좌통례()에 증 이조 판서()인데, 대대로 예법()을 이어오니 이웃에서 본을 떴다. 고() 휘 홍우()는 바른 몸가짐과 문예()가 있었으나 벼슬길에는 크게 마음쓰지 않아 남평 현감()에 그치었으며, 여러 번의 증직()으로 영의정()에 이르렀다. 비() 안동 김씨()는 대사헌() 김희수()의 딸로서, 천성이 침중()하여 어머니와 지어미의 도를 얻었고 또 학식이 있었는데, 정경 부인()의 봉작을 추증하였다.

공이 가정(, 명 세종()의 연호) 을사년(, 1545년 인종 원년)에 태어나니 용모가 단정하고 총명이 뛰어났다. 나이 8세에 의정공()이 졸()하자 울부짖으며 곡을 함은 성인과 다름이 없었으며, 장사를 치르게 되매 정경 부인이 어리고 허약함을 민망하게 여겨 양분()이 있는 음식을 권하니, 곧 통곡을 하며 듣지 않고 정경 부인의 곁으로 가 그 남긴 음식을 먹으며 3년을 마치었다. 좀 자라자 정경 부인 및 형 판서공() 노직()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외부의 스승에게는 나아가지 않았으나 학업은 날로 발전하였다. 경오년(, 1570년 선조 3년)에 성균관 생원()에 올라 동료들의 추중하는 바가 되었다. 정축년(, 1577년 선조 10년)에 정경 부인이 정산 현감() 제3자()의 관사()에서 세상을 뜨니, 공은 그 형 노직()ㆍ노욱()ㆍ노색()과 더불어 도보로 상구()를 모셔다 선영()에 장사지내고 묘 아래에 여막()을 치고 몸소 불을 지펴 전()을 올렸고, 죽을 마시고 곡을 하기 예제()에 벗어나게 하니, 파리한 몸은 거의 상()을 마치지 못할 것 같았다.

 

외직()에 제수되매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는데, 판서공()이 권하여 과장()에 나아가 갑신년(, 1584년 선조 17년) 가을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선발되어 보임되었고, 이어 예문관()에 들어갔다. 이때 선조()가 승정원()에 명하여 글씨 잘 쓰는 사람을 가려서 주서()로 삼으라 하니, 검열()에서 옮겨 주서에 임명되었다. 정해년(, 1587년 선조 20년)에 차례로 승진하여 감찰()에 임명되었고 공조ㆍ형조ㆍ예조ㆍ병조의 좌랑(), 부수찬()ㆍ정언()ㆍ지평()을 거쳐, 다음 해 무자년(, 1588년 선조 21년) 겨울에는 수찬()으로서 이조 좌랑()이 되었다가 경인년(, 1590년 선조 23년)에 병으로 체직()이 되었다. 이로부터 현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좌우 사인()과 사헌부()ㆍ사간원()의 차관[], 홍문관()의 응교() 등을 지냈으며, 신묘년(, 1591년 선조 24년)에는 승정원에 들어갔다.

 

임진년(, 1592년 선조 25년)에 거가()를 호종()하여 서쪽으로 옮기다가 벽제역()에 이르러 승지()에게 한 품계씩을 올리라 명하니, 공도 이에 참여하였다. 평양()에 이르러 말에서 떨어져 병이 심하므로 산골에 처졌다가 병이 좀 우선하자 사잇길로 해서 성천()에 들어가 행재소()로 나아가니,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에 개성 유수()가 되었고, 을미년(, 1595년 선조 28년)에 들어가 호조 참판()이 되었는데, 능히 일을 잘 수행하였다. 다음 해 병신년(, 1596년 선조 29년)에 중국에 나아갔고 돌아와 또 병조에 임명되었다.

 

정유년(, 1597년 선조 30년)에 서애(西) 유 상국(, 유성룡())이 영상()으로서 체찰사(使)를 겸하자 공을 불러들여 부체찰사(使)로 삼아 더불어 군국()의 일을 꾀하니, 이때의 논의들은 숙달()하다고 칭하였다. 곧 동지경연사()와 우부빈객()이 되었다가 훈련도감 당상()으로서 경강 주사 대장()을 겸하였다. 이때 (명()나라) 천자()는 동정장()의 전승()에 관한 보고가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여 형부 상서() 형개()에게 명하여 동국()의 군문()으로 임명하여 감독하게 하라 하였다. 형개가 도착하여 접반사(使)의 봉직()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 하니, 조정에서 김명원()으로 대신하게 하고 공을 부사(使)로 삼았다. 군문이 당()에 앉을 때마다 반드시 자리로 두 공()을 불러들여 더불어 병사()를 논의하였는데 늘 이르기를, “노모()는 병사를 잘 논한다.” 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 부제학()을 거쳐 경상 관찰사(使)로 나가게 되어 있었는데, 군문이 보내지 않으려 하므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기해년(, 1599년 선조 32년)에 형공(, 형개)이 일을 마치고 돌아가게 되매 공은 의주()까지 나아가 전송하였는데, 복명()하기도 전에 부제학으로 임명하여 불렀고, 또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ㆍ사간원의 장관(), 예조ㆍ병조의 참판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인 경자년(, 1600년 선조 33년) 여름에 이조로 옮겨져 좌부빈객()을 겸하였고, 신축년(, 1601년 선좌 34년)에 집정()의 비위를 거슬려 황해 감사()로 나갔다. 명()나라 조사(使)가 왔을 때에 재화()를 탐내어 한이 없는 욕심을 부리므로, 도()마다 이를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들여 그 욕심을 채워 주게 되어 백성들이 매우 괴롭게 여겼는데, 공은 홀로 계청()하여 시노비()의 공포()를 내어 그 비용으로 쓰게 하여 백성들로부터 한 푼도 거두지 않으니, 온 지역이 평온하게 되어 백성들은 서로 더불어 빗돌을 세우는가 하면 그 덕을 노래하고 사모하였다. 계묘년(, 1603년 선조 36년) 봄에 군문()의 노고로 품계가 자헌 대부()로 올랐고, 2월에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되었다가 곧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4월에 병조로 옮겨 지의금부사()를 겸하였고 다음 해 갑진년(, 1604년 선조 37년)에 지중추부사()에서 형조에 임명되었다.

 

정미년(, 1607년 선조 40년)에 경기 관찰사(使)에 제수되어 겨우 경계에 이르렀다가 곧 병조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 무신년(, 1608년 선조 41년) 2월에 선조가 승하()하자 전서()로 명정()을 썼다고 하여 정헌 대부()로 승진하니, 이는 구례()에 의한 것이었다. 이때 도감()의 병사를 동원하여 궁성()을 호위케 하였는데, 이때 봄추위가 심하고 우설()이 내려 굶주리고 추워 원성이 높았다. 공이 대신에게 말하기를, “경계할 일이 없음에도 왕궁()을 경비함은 보기에 놀랍고 사졸()이 또 몹시 괴롭게 여기니 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여, 드디어 아뢰어 병사를 거두게 하였다. 얼마 아니 있어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언자()가 궁성의 호위를 거두게 한 것을 죄로 하여 논하므로 파직이 되었다. 뒤에 중추부()에 있으면서 선조() 때에 궁궐()을 영선()한 공로로 숭정 대부()에 승진되었다. 갑인년(, 1614년 광해군 6년)에 다시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다음 해 을묘년(, 1615년 광해군 7년)에 판중추부사()로서 두 번째 경기 감사가 되었는데, 한결같이 폐단 제거에 힘써 백성들이 힘입은 바 많았다. 병진년(, 1616년 광해군 8년)에 체직되어 중추부로 돌아왔고, 다음 해 정사년(, 1617년 광해군 9년) 겨울에 병환으로 자리에 누워 해를 넘기도록 낫지 않으매, 아들과 여러 조카가 복인()의 말에 따라 집에서 피접()나가 빌기를 청하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 나이 이미 많다. 무어 죽기 아까우랴? 또 죽고 삶은 명이 있으니, 복인의 말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예()에 정침()에서 죽는다 하지 않았는가?” 하고 끝내 듣지 않았다. 무오년(, 1618년 광해군 10년) 12월 20일 정침에서 고종(, 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음)하니, 향년은 74세였다. 다음 해 2월에 여주()의 개군산() 향동() 유향()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선영()의 역내()이다.

공은 사람됨이 침착하고 남과의 거스름이 없었으며, 별다르고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키는 바는 분명하였고 또 남의 과실이나 악한 점을 말하지 않았다. 평생 벼슬을 하였으나 다가오는 대로 버려 두었을 뿐, 마음써 구하는 일이 없었다. 백씨()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 하여 병을 간호하는 데에도 그러하였고, 상사()에 곡을 함도 그러하였다. 세 형이 모두 졸하게 되매 그 외로운 조카들을 모아 무양()하였고 백씨의 사자()가 또 죽어 그 아들이 미약하여 살림을 할 수 없게 되자, 이어 선조()의 제사를 집에서 받들되 제사에는 반드시 종손()을 주사자()로 하였다. 내외친()의 경우 먼 친척임을 가림이 없어 찾아오기 마치 집에 돌아가듯 하였고, 늘 의식()을 같이하는 자 두어 사람이었으며, 상사()가 있을 때면 옷이나 관()을 주어 장사지내게 하는 일이 많았다. 본래 예능이 있어 글씨를 더욱 잘 썼고 전서()와 예서()에 특히 뛰어났다. 아들 노병준()도 전서와 예서를 잘 썼다. 경인년(, 1590년 선조 23년)의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나이 31세에 동궁()의 관원으로 홍주()에서 사망하였는데, 딸은 있으나 아들이 없어 공은 마침내 무후()하였다.

부인 청송 심씨()는 영의정 청천 부원군() 심온()의 5대손이요, 증 영의정 청송 부원군() 심의검()의 막내딸이며 낙봉() 문간공() 신광한()의 외손이다. 부인은 내외 명가()의 현부모()ㆍ현고()로부터 교훈을 익히 들었고 이미 부덕()을 완비하였으며, 또 의리에 밝아 사군자()의 풍모가 있었다. 아들 1인은 곧 노병준으로서 종실() 풍산군() 이종린()의 딸과 혼인하여 1녀를 낳았는데, 종성 부사(使) 한인급()에게 출가하여 1녀 2남을 낳아 딸은 진사 이호징()에게 출가하였고, 아들 한복원()은 전라 병사(使) 구인후()의 딸과 혼인하여 3남을 낳았으며, 다음 한명원()은 사인() 남두일()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이가 실은 공을 봉사()하고 있다. 지금의 사근도 찰방() 심대부()는 곧 부인의 조카이다. 부인의 명으로 공의 행장()을 지어 나에게 보이며 그 묘도()에 표()할 것을 청하였다. 나는 그가 좋아하는 이에게 지나치게 찬미()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므로, 드디어 그 행장에 의하여 위와 같이 서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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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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