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贊成公(達行) 가문

황산 할아버지께서 쓰신 순조 대왕 묘지문[誌文]

추읍산 2009. 9. 4. 22:22

 

인릉 지문이라고도 합니다. 초고(草稿 사진)는 현재 대전 향토사료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순조 대왕 묘지문[誌文]


지문(誌文)은 다음과 같다.

 

“우리 연덕 현도 경인 순희 대왕(淵德顯道景仁純禧大王)께서는 34년 동안 재위(在位)하시면서 오래도록 도를 행하여 교회를 이루었으므로 백료(百寮)들이 직무를 봉행함에 있어 각각 자신의 직위(職位)를 지켰고 만백성은 각기 생업(生業)을 즐기면서 각각 자신의 삶을 편안히 누려왔습니다. 길짐승·날짐승·벌레 등 생기를 머금고 꿈틀거리는 종류에 이르기까지 편안한 곳을 얻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인성(仁聲)과 인문(仁聞)이 온 나라에 넘쳐 흘렀습니다. 그런데 신민(臣民)들이 복록이 없어 갑오년 11월 초6일 병이 있어 편안하지 못하시다가 13일에 경희궁(慶熙宮)의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시니, 춘추(春秋)가 45세였습니다. 가까이는 왕궁(王宮)과 국도(國都)로부터 멀리는 깊은 산속 외진 골짜기에 이르기까지 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발을 구르며 슬피 통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서울과 지방이 차이가 없었으니, 진실로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이 사람들에게 깊이 젖어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아! 성대합니다. 아! 슬픕니다. 대신(大臣)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삼가 존시(尊諡)를 올리기를, ‘문안 무정 헌경 성효(文安武靖憲敬成孝)’라고 하고, 묘호(廟號)를 ‘순종(純宗)’이라고 하였습니다. 을미년(乙未年) 4월 19일 무신(戊申)에 교하(交河)의 인릉(仁陵) 을좌(乙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예절(禮節)인 것입니다. 금상(今上) 전하께서 신에게 유궁(幽宮)의 지문(誌文)을 지으라고 명하시었으므로 신은 두려워 떨면서 사실에 걸맞게 못하면 어쩌나 하는 조심스런 마음으로 감히 아래와 같이 차례대로 찬술(撰述)합니다.

 

삼가 살피건대, 왕(王)의 성(姓)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공(玜)이며 자(字)는 공보(公寶)이니 정종 문성 무열 성인 장효 대왕(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의 아드님이다. 모비(母妃)는 예경 자수 효의 왕후(睿敬慈粹孝懿王后) 김씨(金氏)이니 청원 부원군(淸原府院君) 정익공(靖翼公) 김시묵(金時默)의 따님이다. 수빈(綏嬪) 박씨(朴氏)가 실제로 왕을 낳았는데, 효의 왕후가 정종(正宗)의 명에 의하여 데려와서 아들로 삼고 원자(元子)로 정호(定號)하였다. 수빈은 증 영의정(贈領議政) 충헌공(忠獻公) 박준원(朴準源)의 따님이다. 이보다 앞서 문효 세자(文孝世子)가 졸서(卒逝)하자 정종이 저사(儲嗣)에 대해 매우 근심을 하고 있던 중에 기유년6108) 봄에 이르러 궁인(宮人)이 용이 날으는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조금 뒤에 수빈이 임신하였는데 바라보는 눈길이 맑고도 밝았고 이상한 신채(神彩)가 발산되었으므로 궁중의 상하가 모두 큰 경사가 있을 조짐으로 여겼다. 경술년6109) 6월 18일 왕이 탄생하였는데 오색 무지개가 묘정(廟井)에서 하늘로 뻗혔고 신비로운 광채가 궁림(宮林)에 둘러 있었다. 정종(正宗)께서 나아가 보고 나서 이르기를, ‘이 아이의 복록은 내가 따를 수 없는 정도이다.’라고 하였다.

 

왕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 겨우 두 살 되던 해 동지(冬至)에 정종께서 새 역서(曆書)를 하사하였는데, 이는 왕이 장차 한 살 더먹게 되는 것을 기뻐해서였던 것이다. 왕은 그때 품에 안겨 있으면서 이를 받아서 펴보다가 이어 서병(書屛)의 글자 가운데 같은 글자를 가리키니 측근의 신하들이 매우 특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조금 자라자 부왕(父王)을 더욱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보통 놀이하는 일도 부왕이 하기를 바라지 않으면 즉시 감히 하지 않음으로써 뜻을 어긴 적이 없었다. 전궁(殿宮)을 섬김에 있어 전혀 흠잡을 데가 없었고 효의 왕후에 대해서는 경애(敬愛)가 더욱 환히 드러났으므로 정종께서 자주 칭찬하였다.

 

경신년6110) 봄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고 관례(冠禮)를 행하였다. 6월에 정종(正宗)께서 승하하시자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卽位)하였고 양암(諒闇)6111) 의 상제(喪制)를 성인(成人)처럼 하였다. 군신(群臣)들 가운데 진현(進見)하는 사람들의 말이 선왕(先王)에게 언급되면 반드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슬픔을 억제하느라 실성(失聲)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 지극한 효성에 감복하였다. 이때 정순 왕후(貞純王后)가 수렴(垂簾)하고서 같이 청정(聽政)하였으므로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왕은 한결같이 모두 여쭈어 결정하였고 감히 혹시라도 마음대로 한 적이 없었다.

 

처음 정종(正宗)께서 춘저(春邸)에 계실 적에, 척신(戚臣) 김귀주(金龜柱)의 종숙(從叔)인 김한록(金漢祿)이란 자가 김귀주를 위하여 은밀히 사당(死黨)을 모집하였다. 그러하여 장차 국본(國本)6112) 를 위태롭게 할 것을 모의한 끝에 호인(胡寅)6113) 이 당(唐)나라 중종(中宗) 때의 일6114) 을 논한 것을 인용하였는데 그 말이 그지없이 패려스러웠다. 정종께서는 그 역절(逆節)을 환히 알고 있었지만 일이 성궁(聖躬)6115) 에 관계된 것이어서 용서하고 묻지 않았다. 왕이 새로 대상(大喪)을 당하여 군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롭게 되자 군흉(群凶)의 여얼(餘孽)들이 때를 타고 더욱 기세를 확장하여 위협하면서 옹폐(壅蔽)하였다. 적신(賊臣) 권유(權裕)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그 계교가 또 선왕(先王)께서 이미 정해 놓은 대혼(大婚)을 저지시키기 위해 노신(老臣)의 충애(忠愛)라는 말을 전석(前席)에서 발론하였는가 하면 삼간(三揀)은 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온 세상에 유포되어 화가 장차 하늘에 닿게 될 상황이었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한심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정순 왕후의 성명(聖明)을 힘입어 기미를 살펴 간사한 싹을 자르고 힘써 큰 기강을 부지시켰으므로 드디어 임술년6116) 겨울에 가례(嘉禮)를 행하게 되었고 따라서 종사(宗社)가 다시 편안할 수 있었다.

 

왕이 직접 만기(萬機)를 총괄하면서부터 숙특(淑慝)을 엄중히 하여 충역(忠逆)을 분변하였다. 그리하여 갑자년6117) 에 제일 먼저 권유에게 역률(逆律)을 시행하였는데, 이는 흉적을 비호하고 군주와 모후(母后)를 무시한 것이니, 온 나라의 죄인이기 때문이었다. 심환지(沈煥之)의 관작(官爵)을 추삭(追削)했는데, 이는 공공연히 거짓말을 하여 양궁(兩宮)6118) 을 이간한 것이니, 자성(慈聖)의 죄인이기 때문이었다. 홍재민(洪在敏)을 해도(海島)로 찬배(竄配)시켰는데, 이는 선왕의 의리를 간범하고 더할 수 없이 엄중한 자리를 능핍(凌逼)한 것이니, 삼조(三朝)의 죄인이기 때문이었다. 김달순(金達淳)을 사사(賜死)하였는데, 이는 간흉(奸凶)의 와주(窩主)가 되어 상하 4, 50년 동안 김귀주·김한록의 흉도(凶圖)를 근본으로 삼고 심환지·권유의 역안(逆案)을 연접시켜 온 세상을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역으로 빠뜨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김종수(金鍾秀)가 괴수가 되었으니 김종수는 실로 만세(萬世)의 죄인인 것이다. 정묘년6119) 에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하여 김귀주·김한록을 정향(庭享)에서 축출하고 아울러 그 도당(徒黨)과 지속(支屬)들은 각기 자신들이 지은 죄에 걸맞는 죄를 주었다. 이제야 천토(天討)가 크게 행하여졌고 국시(國是)가 정하여졌다.

 

이른바 서양학(西洋學)이라는 것이 북쪽에서부터 내려와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정교(正敎)를 파괴시키면서 많은 사람들을 물들이고 전습(傳習)되었으므로 그릇된 방면으로 인도되는 이들이 많았다. 드디어 빨리 주벌(誅罰)을 시행하여 깨끗하고 시원스럽게 쓸어냈으니, 이는 바로 왕의 오도(吾道)를 호위하고 사교(邪敎)를 내치는 큰 정사였다. 그런데 김귀주·김한록의 도당들은 이 일을 빙자하여 혜경궁(惠慶宮)의 동생인 홍낙임(洪樂任)과 아울러 폐종(廢宗)된 인(裀), 인의 아내, 그 아들 담(湛)의 아내까지 죄에 얽어 넣어 죽게 하였으나 왕의 뜻이 아니었다. 뒤에 왕이 마침내 다시 홍낙임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고 인(裀)의 자녀들을 섬에서 나오게 하여 집을 지어주고 시집 장가보내었다.

 

왕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므로 지극한 슬픔이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어 정순 왕후(貞純王后)·효의 왕후(孝懿王后)·혜경궁(惠慶宮)·수빈(綏嬪)을 받들어 섬김에 있어 온화한 안색을 지니는 사랑을 극진히 하고 뜻과 물건을 봉양하는 정성을 다하면서도 공경하고 조심하여 미치지 못하는 듯이 애써서 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문안 올리는 것은 추위나 더위에도 거른 적이 없었으며 일이 있어 못할 경우에는 반드시 내수(內竪)를 시켜 기거(起居)6120) 를 묻게 하였고 내수가 돌아온 것을 본 후에야 마음을 놓았다.

 

기사년6121) 에 왕세자가 탄생하여 전궁(殿宮)에 진하(陳賀)하고 나서 상신(相臣)의 건백(建白)으로 인하여 수빈(綏嬪)에게 진호(進號)하였는데, 이는 저하(邸下)를 위하여 존봉(尊奉)한 것으로 혜경궁의 의절(儀節)과 대등하게 하였다. 을해년6122) 에 혜경궁이 훙서(薨逝)하니 정신(廷臣)들 가운데 복제(服制)에 대해 의심하는 이가 많자, 왕이 소생(所生)임을 추사(追思)하여 널리 고례(古禮)를 채집하여 대공(大功)6123) 의 복제(服制)로 하기로 정한 다음, 상복을 입었다. 신사년6124) 에 효의 왕후가 승하하자 왕은 슬퍼하고 사모하는 것을 경신년6125) 때와 같게 하였으며 영돈녕부사 김조순(金祖淳)의 말로 인하여 건릉(健陵)으로 이봉(移奉)하여 합부(合祔)하였다. 임오년(壬午年)6126) 에 수빈이 졸서(卒逝)하니, 왕이 대신(大臣)과 제신(諸臣)들의 의논을 수용하여 시마 삼월복(緦麻三月服)을 입었다. 제복(除服)하고 나서는 흰 의관[索衣冠]을 입고 3년 동안 지냈다.

 

왕은 하늘을 섬기고 선조를 받드는데 더욱 경근(敬謹)을 극진히 하였다. 그리하여 거처하는 침실(寢室)은 아무리 더워도 반드시 문을 닫게 함으로써 감히 하늘을 쳐다보고 드러눕지 않았으며, 말이 일월(日月)과 풍우(風雨)에 언급되면 반드시 존경을 극진히 하여 태만한 자세가 없었으며, 천둥이 심하게 칠 적에는 반드시 엄숙한 자세로 안색을 고치고 옷깃을 여미고 두 손을 마주잡고 앉아서 천둥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모든 크고 작은 재이(災異)에 대해 중앙과 지방에 신칙하여 아뢰지 않고 숨기는 일이 없게 하였으며, 재이가 발생할 때마다 도와 주어 재앙을 없애줄 것을 하늘에 빌었다.

 

종묘(宗廟)의 향사(享祀)는 반드시 몸소 행하였는데 자성(粢盛)은 정결하게 하고 제기(祭器)를 씻는 것을 살피는 등 두려워 조심하는 마음가짐을 지녔다. 봄·가을로 반드시 침원(寢園)을 지알(祗謁)하는 것을 해마다 상례(常禮)로 삼았다.

 

중국의 연경(燕京)에서 《황청통고(皇淸通考)》를 사가지고 왔는데, 거기에 기재된 본조(本朝)의 신축년6127) 사대신(四大臣)6128) 의 일에 대해 기재된 내용이 거짓된 것이어서 차마 말할 수 없는 정도였다. 왕은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여 속히 사신(使臣)을 보내어 변정(辨正)하여 무주(誣奏)한 구어(句語)를 삭제하게 하였으며, 사신이 일을 끝내고 돌아오자 종묘(宗廟)에 고하였다. 국제(國制)에 옛날 궁시(宮寺)에 있던 노복(奴僕)을 선두안(宣頭案)에 입적(入籍)시켜놓은 것이 있었는데, 때대로 신공(身貢)을 받기 때문에 이것이 백성들에게 뼈에 사무치는 억울함이 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선왕(先王)의 유의(遺意)라고 아뢰니, 왕은 즉시 그 문권(文券)을 불에 태우라고 명하였다. 장영(壯營)의 큰 경비(經費)를 철회(撤回)하여 대농(大農)으로 돌려주었고, 약원(藥院)의 별공(別供)을 감하여 제도(諸道)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였다.

 

계해년6129) 여름에 관서(關西)와 관북(關北)에 재해(災害)가 들었고 겨울에는 강화(江華)에 기근이 들었는데, 이때 내부(內府)에 저장되어 있는 것을 지출하여 본도(本道)의 세입(稅入)을 정지하게 하였다. 기사년6130) 에 양호(兩湖)에 큰 흉년이 들자,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포흠(逋欠)을 견감시키고 조부(租賦)를 감면하여 주었다. 신사년6131) 에 여역(癘疫)이 크게 치성하여 죽는 사람이 잇따랐는데 관서(關西)가 더욱 극심하였으므로 근신(近臣)을 보내어 경내(境內)에서 여제(癘祭)를 지내게 하였다. 임진년6132) 에 큰 홍수가 났는데 특별히 소결(疏決)6133) 을 행하여 용서하여 준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이로부터 큰 흉년이 들거나 홍수의 재해가 발생하면 번번이 주야로 우근(憂勤)하여 곡진한 우휼(優恤)을 가하였으며, 한더위와 한추위에는 반드시 오랫동안 판결이 나지 않은 죄수를 내어 보내고 춥고 굶주리는 것을 진념(軫念)하여, 말년(末年)에 이르도록 혹시라도 폐기한 적이 없었다.

 

신미년6134) 에는 관서(關西)에서 토구(土寇)6135) 가 일어나 장리(長吏)를 죽이고 일곱 군(郡)을 함락시켰으므로 왕이 군대를 보내어 이들을 주토(誅討)하였다. 관리 가운데 나라일 때문에 죽은 사람은 정포(旌褒)한 다음 그 아들을 녹용(錄用)하게 하고, 민인(民人) 가운데 협박에 의해 가담한 사람은 사면하여 주어 생업에 복귀시켰으며, 수령에게 신칙하여 위로하고 맞아와서 안집(安集)시키게 하니, 1년도 안 되어 백성들이 그 난리를 잊게 되었다. 왕은 명기(名器)6136) 를 신중히 하고 아껴서 일체의 관직(官職)을 혹시라도 함부로 제수한 것이 없었으며, 더욱 대신(大臣)을 공경하고 예우하여 매양 구복(甌卜)6137) 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의관(衣冠)을 단정히 하고 앉아서 그 성명(姓名)을 썼으며, 대신을 진접(進接)할 때는 아무리 병환이 심해도 설복(褻服)6138) 으로 대하지 않아서 예모(禮貌)를 반드시 근신하게 하였다.

 

정해년6139) 에 왕세자에게 군국 대사(軍國大事)를 대리(代理)하여 스스로 결단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따른 것이다. 이해 가을 왕세자가 왕에게 연덕 현도 경인 순희(淵德顯道景仁純禧)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왕비(王妃)에게는 명경(明敬)이란 존호를 올렸다. 경인년6140) 에 세자가 훙서(薨逝)하니 원손(元孫)을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하였다. 왕은 지극한 정을 애써 억누르면서 다시 기무(機務)를 직접 보살폈는데, 임진년6141) 에 두 공주(公主)가 또 서로 잇따라 요서(夭逝)하니, 왕은 아프고 슬픈 마음을 안색에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영위(榮衛)6142) 가 안에서 삭아져서 항상 실의(失意)한 모습으로 즐거움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뜻밖의 병으로 인하여 군신(群臣)들을 아주 버리고 떠나시니, 하늘이여! 슬픕니다. 왕의 대덕(大德)으로 반드시 그 보답을 받을 터인데도 수(壽)가 중년(中年)에 그쳤으니, 이치를 믿기 어려운 것이 이와 같다. 그러나 성교(聲敎)가 당시에 널리 미쳤고 광렬(光烈)이 후세에 영구히 전하여, 후왕(後王)은 그 친족에게 친근하고 현인을 존경하며, 백성들은 그 즐거움을 즐겁게 여기고 그 이익을 이롭게 여겨 살아서는 영광스럽고 죽어서는 슬퍼하니, 아아! 영원히 잊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장차 천지와 함께 영원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보다 성대한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정신(廷臣)들이 왕의 공덕을 의논하여 백세(百世)토록 제사지내는 것이 마땅하다 하여 드디어 높여 세실(世室)로 삼았다.

 

왕비(王妃) 김씨(金氏)는 본관(本貫)이 안동(安東)인데,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 충문공(忠文公) 김조순(金祖淳)의 따님이다. 2남(男) 3녀(女)를 낳았는데 장남(長男)은 효명 세자(孝明世子)이다. 금상(今上)이 즉위하여 익종 대왕(翼宗大王)으로 추존(追尊)하였다. 차남은 요서(夭逝)하였다. 장녀는 명온 공주(明溫公主)인데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에게 하가(下嫁)하였으며, 차녀는 복온 공주(福溫公主)인데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에게 하가하였으나, 모두 일찍 졸서(卒逝)하여 소생이 없다. 그 다음은 덕온 공주(德溫公主)인데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숙의 박씨(淑儀朴氏)가 영온 옹주(永溫翁主)를 낳았는데 또한 요서(夭逝)하였다. 익종의 비(妃) 조씨(趙氏)는 풍은 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따님인데 금상 전하를 탄생하시었다.

 

왕은 자표(姿表)가 특이하여 넓은 이마와 높은 콧마루에 네모난 입과 겹턱을 가졌는데 용안(龍顔)은 불그레하고 체상(體相)은 풍만하고도 장대하였다. 그리하여 바라보면 엄연(儼然)한 위엄이 있어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는데, 앞으로 나아가면 온화하게 덕이 있어 친근함을 느끼게 하였다. 천성이 효우(孝友)하고 공검(恭儉)하며 돈중(敦重)하고 인서(仁恕)하여 사물(事物)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평상시에도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 있었으며 사람을 접견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고대의 전적(典籍)을 즐겨 탐독하여 열람하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눈으로 보면 즉시 기억하였다. 전장(典章)과 의문(儀文)에 이르기까지 묵묵히 알고 널리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시문(詩文)을 짓는 것도 모두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나, 스스로 자부심을 지니지 않고 경전(經傳)에만 전심(專心)하여 마음속으로 궁구하고 체험해서 힘써 실용(實用)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왕의 학문은 일관되게 성신(誠信)을 근본으로 하고 화려한 명예와 우뚝한 행실을 좋아하지 않았다. 3기(紀) 동안의 치화(治化)가 태평 성대를 이루어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게 된 것은 실로 그 기반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중년(中年)에 수빈(綏嬪)이 살아계실 적에는 왕이 섬기기를 매우 근신히 하여 반드시 생각하기 전에 뜻을 받듦으로써 기뻐함을 곡진히 유도하였다. 수빈께서 매양 왕에게 찬선(饌膳)을 보낼 적마다 비록 구미(口味)에 맞지 않더라도 반드시 수저를 들어 맛보았으며 아무리 자주 보내와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수빈께서 늘 양심합(養心閤)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이는 왕의 처소와 가깝기 때문이었다. 졸서(卒逝)함에 이르러서는 왕이 매양 홀로 서서 그쪽을 바라보았는데 옥색(玉色)에 처연(凄然)함이 감돌아 마치 뵐 수 있는데도 못뵈는 것처럼 하였다. 그리하여 음식상을 대하면 번번이 수저를 내리고 드시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므로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숙선 공주(淑善公主)는 왕의 누이동생인데 다독거려 사랑하는 것이 더욱 돈독하였다. 공주가 하가(下嫁)할 적에 3일 동안 외저(外邸)에 있었는데도 왕은 매우 서글픈 빛을 띠었으며, 공주가 돌아올 적에는 마치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이 온 것처럼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출합(出閤)할 때가 되어서는 계속 서로 만나볼 수 없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고 문안과 선물을 빠뜨리는 날이 없었으며 말하는 것은 반드시 따라 주었고 요구하는 것은 반드시 들어주었다. 공주가 입궁(入宮)한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기일을 손꼽으면서 기다렸는데 기쁜 빛이 안색에 드러나 보였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감복하여 마지 않았다.

 

왕은 평소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스스로의 생활은 매우 담박(淡泊)하였으며 복어(服御)에는 비단으로 꾸민 것이 없고 반선(盤膳)에는 기이한 식품(食品)을 금하였는데, 포백(布帛)의 꾸밈새와 숙속(菽粟)의 음식으로도 거부감 없이 편안하게 여겼다. 신기하고 보기 좋은 물건은 모두 남김없이 물리쳐 버리고서 이르기를, ‘이것을 써서 무엇을 하겠는가? 사람의 심지(心志)만 손상시킬 뿐이다.’라고 하였다. 궁실(宮室)이 좁고 누추해도 이를 넓혀 새롭게 하지 않았으니 이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몸을 용납할 수 있으면 되지 사치스럽고 크게 만들어 어디다 쓰겠는가?’라고 하였다. 주금(裯衾)·유장(帷帳)의 등속에 이르러서도 모두 빨아서 기워 쓰게 하였다. 궁중에서 무늬 비단으로 된 반소매 옷을 하나 올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왕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이것이 과연 좋기는 하구나.’ 하고, 받아서 입고 하룻밤을 지내고는 즉시 벗고 다시는 입지 않았다.

 

조정에 임어하여서는 침착하여 말이 적었고 의용(儀容)은 엄숙하고도 온화하였으므로 군하(群下)들이 감히 우러러 보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사람을 대하고 사물(事物)을 접할 적에는 부드럽고 순수하며 겸손하고 온화하여 자만하거나 긍장(矜莊)하는 안색이 없었으며 조신(朝臣)이 진언(進言)하면 반드시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여 선한 말은 취하여 쓰고 선하지 않은 것은 버렸다. 그리하여 혹시라도 성색(聲色)과 위벌(威罰)을 갑자기 시행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충성(衷誠)을 바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더욱 백성의 일을 중히 여기고 농사짓는 어려움을 두루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매양 상선(常膳)을 진어할 적에도 반드시 예모를 갖추고 밥상을 대하였으며 떨어뜨린 밥알이 있으면 반드시 주우라고 명하면서 말하기를, ‘백성들이 하늘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인데 어떻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며, 항상 말하기를, ‘재부(財賦)는 백성에게서 나와 위에 바쳐진 것이기 때문에 사의(私意)로 부고(府庫)의 축적을 함부로 허비하지 않는 것은 장차 쓸 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또 당연히 지출하여야 하는데도 지출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그런 때문에 왕의 한평생 동안에는 영작(營作)을 하지 않고 사여(賜與)를 신중히 하였으며 농상(農桑)을 권과(勸課)하고 민력(民力)을 애양(愛養)하였는데, 홍수·가뭄·도적·기근·돌림병 등의 재해를 당하면 번번이 전세(田稅)를 견감시키거나 탕감하고 곡식을 진대(賑貸)하였으며 내탕(內帑)의 것을 다 내어 놓아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몸가짐을 단속하고 아랫사람 다스리는 것은 너그럽게 하였으며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고 같은 허물을 두 번 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편견을 버리고 남의 좋은 의견을 취하며 선한 말을 따르는 것을 물흐르는 듯이 하였다. 한 번도 일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고(敎告)가 간이(簡易)하여 알기가 쉬웠으며, 정령(政令)이 순일하여 잡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말년(末年)에 이르기까지 조야(朝野)가 평안하였다. 용심(用心)이 지극히 인자하여 하찮은 벌레라 할지라도 혹여 상해(傷害)될까 두려워하였으며, 나이 들어 늙은 사람을 보면 비록 신분이 비천하더라도 반드시 후하게 대우하였다. 또 형벽(刑辟)은 사람의 사생(死生)에 관계되는 것으로 여겨 흠휼(欽恤)하고 애긍(哀矜)하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므로 죄없이 부당한 처벌을 당하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

 

삼가 논하건대, 예로부터 훌륭하고 명철한 임금이 대대로 끊이지 않고 사서(史書)에 기록되고 있지만, 왕·패(王覇)에 뒤섞이지 않고 이의(利義)에 현혹 되지 않은 경우는 대체로 드물다. 그런데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하늘이 내신 자품으로 전성(前聖)의 통서를 이었으며 치법(治法)과 정모(政謨)가 순수하게 한결같이 올바른 데서 나왔으므로 요제(堯帝)와 순제(舜帝)가 큰 하늘을 본받고 무위(無爲)의 다스림을 베풀어 높고 넓어 이름하기 어렵다는 것과, 우왕(禹王)과 탕왕(湯王)이 나랏일에 부지런하고 〈성색(聲色)을〉 가까이 하지 않고 〈화리(貨利)를〉 증식시키지 않은 것과,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덕이 순일하여 선왕의 사업을 잘 계술(繼述)한 것을 왕이 실상 모두 다 겸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자부하지 않았으니, 아! 지극합니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군자의 도(道)는 자신의 덕에 근본하여 백성에게서 이를 증험하며 삼왕(三王)6143) 에 견주어 고찰하더라도 어긋남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왕을 두고 한 말이다.

 

신(臣)은 폐부(肺腑)의 친분으로 일월(日月)같이 빛나는 말광(末光)을 의탁하여 20여 년 동안 직접 훈도(薰陶)를 받았으므로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진실로 다 기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나 이제 덕을 글로 표현해 냄에 있어 화려하기만 하고 실상이 없으며 너무 지나쳐 진실하지 않게 한다면 후세에서 징신(徵信)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평소 겸손으로 빛나던 지극한 덕에 어긋남이 있게 된다. 그리하여 삼가 큰 줄거리만을 뽑아서 차라리 간략하게 할망정 지나침이 없게 하는 쪽을 택하였다.”【홍문관 제학 김유근(金逌根)이 지었다.】

 

출전: 조선왕조실록.                      출처: 아래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C%88%9C%EC%A1%B0+%EB%8C%80%EC%99%95+%EB%AC%98%EC%A7%80%EB%AC%B8&keyword=%EC%88%9C%EC%A1%B0+%EB%8C%80%EC%99%95+%EB%AC%98%EC%A7%80%EB%AC%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