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문화유산

퇴계 이황(1501~1570)선생님 유적지

추읍산 2012. 7. 2. 10:02

7월 1일 안동지역 남흥재사와 주하동 경류정 종택 그리고 오천 문화재 단지를 찾은 일행은 몽실식당에서 점심을 들었고 이어 퇴계 선생님 유적지를 찾았다.

 

노송정 고택(퇴계 선생 태실)

 

퇴계 선생님께서 태어나시고 성장한 곳

 

담배밭

 

 

 

 

 

퇴계 태실은 도산서원과 고개 하나 사이에 두고 3km 거리이다. 태실은 퇴계가 태어난 특이한 방이 있다 해서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퇴계 할아버지 노송정 이계양이 1454에 지은 집으로 노송정 고택으로도 부른다. 이계양이 봉화 훈도로 있을 때 이 근처에서 굶주림으로 쓰러진 스님을 구해주었는데, 그 스님이 이 집터를 잡아주면서 “이곳에 집을 지으면 자손이 귀히 된다” 라고 해서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 두 아들의 맏이인 이식의 일곱째 아들이 이황(1501~1570)이다.

 

퇴계는 이 집에서 나서 어릴 때 사랑채인 노송정에서 할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열두 살 때에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는데, 숙부인 송재 이우는 엄격하여 자식을 칭찬하는 일이 없었으나 퇴계에 대해서만은 집안을 빛낼 아이라고 늘 말했다고 한다. 스무 살 무렵에는 주역에 심취하여 위장병을 얻을 만큼 공부에 열중하였다. 스물셋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세 번이나 떨어졌다가 스물일곱에야 진사시에 합격하고 서른셋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다. 외교문서를 다루는 승문원 관리를 시작으로 43세에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외직에 나아가서는 풍기군수 때 백운동 서원이 공식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는데 큰 역활을 하였다. 이는 서원을 통한 향촌사회 운동이자 사림세력 기반 확립의 시발점이 되었다. 50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57세에 도산 서당을 짓고 61세에 완성하였다. 이에 학문을 연마하려는 제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월천 조목,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 등 제자를 360 여명이나 길러 냈다.

 

 

 

 

 

온천정사(溫泉精舍)는 온계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지점인 이곳에 퇴계의 조부(이계양)께서 노송정 고택(퇴계 태실)을 짓고 명명한듯하다. 온천으로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으로 따듯한 고장인 것 같다. 

 

 

 

 

 

 

 

퇴계께서 태어 나신 곳

 

 

 

 

 

 

 

 

 

 

 

----------------------------

 

도산서원          

 

도산서원 입구 광장

 

 

 

 

 

낙동강

 

 

 

 

 

산록에 둘러싸인 도산서원

 

 

 

서원 앞 광장에는 도산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열정(冽井)이 있다. 그 물이 신설한 수도꼭지에서 나온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0, 12, 8일 성역화 사업 준공하며 청와대에서 옮겨온 금송을 심었으나 1972년에 고사함에 따라 1973년에 4월 같은 위치에 같은 수종으로 재식재하였다.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곳곳을 살피고 설명을 들었다.

 

 

 

 

 

 

 

몽매한 제자를 바른길로 이끌어 간다는 의미로 「역경(易經) 몽괘(蒙卦)에서 그 의미를 찾았다.

 

도산서당으로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정우당(淨友塘)으로 퇴계 선생님은 꽃 중에 군자라는 연꽃을 심고 이름 지었다. 연꽃은 진흙탕에 살면서도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속은 비고 줄기는 곧아 남을 의지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맑다.

 

이광웅씨

 

 

 

퇴계 선생님께서 직접 만지셨을 기둥을 만져 보았다.

 

 

해설에 열심이다.

 

책을 보관하는 서고(書庫)로 퇴계 선생님의 친필이 걸려있다. 동 서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으로 지었다. 光明은 " 많은 책이 서광(瑞光)을 비추어 준다."라는 뜻이다.

 

도산서원은 한호의 글씨라고 한다.

 

 

 

 

 

 

 

 

 

 

 

 

 

옥진각은 퇴계 선생님의 유품들을 전시하는 산 교육장이다.

 

도산서원 전경을 그림으로 담았다.

 

퇴계 선생님 친필로 "관풍루(觀風樓)" 라는 글씨이다. 觀자는 보이지 않는다.

 

 

 

 

 

 

 

 

 

 

 

 

 

 

 

 

 

 

 

 

 

 

 

 

 

 

침을 뱉으실 때 사용했던 그릇으로 받침 접시 밑에는 山자가 묵서되어 있다.

 

 

투호(投壺)는 병을 놓고 일정한 거리에서 청. 홍의 죽시(竹矢)를 병 가운데 구멍이나 귀구멍에 던져 넣는 기구이다.

 

매화 무늬가 놓인 청자기로 만든 걸상으로 선생님께서 사용하시던 유품이다.

 

숙부 송재공(松?公)이우의 시문집

 

 

 

 

 

 

 

 

 

 

 

 

 

 

 

 

 

역락서재는 퇴계 선생님께서 도산서당에서 학문을 강론할 때 정사성(鄭士誠)을 비롯한 제자들의 힘을 모아 세웠다. 현판의 글씨는 선생님 친필이다.

 

서원 앞 광장의 구불구불한 저 나무는 수령이 몇 년이나 되었을까?

 

퇴계 선생님께서 자연의 이치를 체득하고 심신 수양을 위해 산책하시던 곳으로 강 건너에는 정조 대왕 때 과거 시험장으로 쓰였을 누각이 보인다. 산천은 다름없는데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자 올바른 길을 설파하신 선생님은 하늘과 펼쳐진 자연을 바라보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천연대에서 담소하는 일행으로 가운데가 인솔자 김천일 종인 이시다. 서원을 나와 다음 일정인 퇴계종택으로 향했다.

------------------------

 

퇴계종택

 

종택

 

 

 

 

안으로 들어갔는데 마루에 누워 신문을 보고 계시는 할아버지께서 모르시는지 반응이 없으셨다.

 

 

 

틈새로 장 항아리가 보인다.

 

 

 

 

 

 

 

 

 

한 그루의 산수유나무가 운치를 더해준다.

 

종택을 나온 주유천하 답사 일행은 퇴계 선생님 묘소로 향하였고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

 

묘소

 

가파른 계단 길을 오르는 일행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묘소 주인공은?

 

 

 

 

 

 

묘역이 시야에 들어왔다.

 

탐구에 열중인 일행으로 곧 합동으로 묵념을 올렸는데 담지를 못한다.

 

비석으로 이곳에 모실 때는 아니고 그 후 상당한 세월이 흘러 세웠다고 한다.

 

김시한 씨

 

기념 촬영을 하였다. 좌로부터 김시한, 설영숙, 필자. 인솔자 김천일, 그리고 처음 함께한 안동권씨 후예이시다.

 

여기까지만 찍었다. 하산하면서 왜 이렇게 높은 곳에 모셨는지 궁금하였다. 우리나라 유학계의 거두이시며 그 가르침은 최고의 본보기로 되셨다. 귀경길에 오르면서 오늘 하루도 유익한 여정으로 기억될 것이다.

'남기고 싶은 글 > 문화유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종대왕 [장릉] 제향 봉행  (0) 2012.11.21
장릉 풍광  (0) 2012.11.15
안동지역 답사  (0) 2012.07.02
천명(天命), 다산(茶山)의 하늘  (0) 2012.06.28
한국 목판특별전  (0) 2012.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