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향리(香里)의 지명 유래는 향곡리(香谷里)에서 비롯하였다.
- 상골: 향리의 우리말 이름이다. 향기나는 골짜기! 이곳은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을까? 먼 옛날은? 깊이 추적할 수 없어 이는 숙제이다. 굵직한 역사로는 조선 중기 교하노씨 노직(盧稙 1536-1587), 노직(盧稷 1545-1618) 형제의 선영이 자리를 잡았고 이후 영안부원군 김조순은 조부인 김달행(金達行 1706-1738)의 묘비명에 이르기를 추읍산 아래 향곡리(香谷里)이라고 하였다.
미호(渼湖)께서는 또한, 지석에 이르기를 「여주 강물 북쪽이여 우산(牛山)의 양지쪽」이라고 읊었는데 이는 초장지인 여주 대신면 초현리의 몽와, 죽취 묘역 언저리라고 한다. 추읍산과 그 산자락에 둘러싸인 남촌, 넓은 호수 펼쳐지고 머물고 싶은 곳! 무릉도원 만들어 길이길이 물려주리라. ---------------------------------------------
마을 속칭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조치에 따라 향리로 고정된 지명이고, 1963년 여주군에서 양평군에 편입된 이후 2개 반으로 관할 되어 있다. - 상골: 향리의 우리말 이름이다. - 아랫상골: 상골의 아래쪽 마을 - 웃상골: 상골의 위쪽 마을 - 개군 저수지(상골 저수지, 향리 저수지): 향리 소재의 저수지로 일제 강점기 말인1942년에 개설되었다. - 주막거리: 향리 저수지 여수터에서 안산 쪽으로 다리 건너 좌우에는 술 파는 주막이 있었다. - 만포장 고개: 위 주막거리에서 웃상골 쪽으로 가는 안산 옆 고개이름 - 지경고개: 웃상골에서 수곡리로 넘어가는 고개 - 솔모쟁이; 웃상골앞 대로에서 감사골가는 모퉁이 길? - 상골고개: 일명 오리나무 고개. 웃상골에서 계전리로 넘어가는 고갯길 - 상골개울: 웃상골에서 주읍리 경계까지의 개울 - 행쟁이: 웃상골에서 주읍리로 진입하는 곳 - 능안: 추리하여 교하노씨 문중 묘역이 자리한 곳이라 생김 이름 같다. - 웃밖께: 향리 저수지 안 개울이 있었던 곳으로 웃상골쪽 물속이다. _ 아랫밖게: 향리 저수지 안 개울이 있었던 곳으로 아랫상골쪽 물속이다. - 안산: 아랫상골 김달행의 묘역 앞산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형성(최초 생성)
개군면 앙덕리에 신석기 시대(빗살무늬 토기),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5기)이 발견되었다. 또한, 상자포리에서도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18기가 발견되는 등 그때에는 한강유역을 따라 농경문화가 펼쳐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위 두 곳 지근거리의 향리에는 언제부터 우리 조상님들이 살고 계셨을까? 위의 글을 통하여 추리할 수밖에 없는데 원시시대에는 인구가 극히 적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후 삼국 시대를 거쳐오면서 한강변에 먼저 자리 잡은 백제의 영역, 고구려의 남진정책(장수왕 때)에 의하여 고구려, 이후 신라 진흥왕 때 한강유역 확보로 신라의 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을 형성 동기와 생성 계기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마을이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삶의 터전이 된 것은 고려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
2. 자연 생태자원 현황표(p47)
환경자원 추읍산(趨揖山): 향리(주읍리, 내리 포함)를 바쳐주는 산으로 높이는 583m이고 양평읍, 용문면, 개군면에 걸쳐 있다. 일명 칠읍산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산 정상에서 양근, 지평, 여주, 장호원, 이천, 광주, 양주가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시야가 넓은 명산이다.
하천: 향리천(상골 개울)이 있으며 웃상골에서 주읍리 경계까지이다.
저수지>향리 저수지: 일제 강점기 말인 1942에 개설되었고 면적은 46,000평이다. 개군 뜰을 수리안전답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경관자원
자연경관: 추읍산과 그 산자락에 둘러싸여 있고 넓은 호수를 끼고 있어 철 따라 아름다운 풍광이다.
저수지 둘레길: 저수지 가장자리에는 길을 부분 조성하였는데 1반 쪽에는 목책로가 조성되어 보행 코스로 주목받고 있다. |
3, 역사 문화자원 현황표(p48) 전설
1) http://blog.daum.net/0113508344/4719231 2) 향리의 웃상골에서 수곡리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데 지경고개라고 불린다. 웃상골에는 한상하라고 큰 부잣집이 있었는데 이와 얽힌 이야기로 어느 날 그분은 말을 타고 그 고개를 넘고 있었는데 말이 움직이지않았다. 하도 이상하여 말에서 내린 주인은 말밥굽 아래를 파보니 큰 엽전 꾸러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후로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
역사적 인물자원
향리에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을까? 멀리 원시시대에는?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영역으로 교차했을 것이다. 고려 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어떤 역사적 사건은 없었을까? 내가 이 작은 시골 마을을 두고 왜 이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정치, 사회, 문화
1) 교하노씨
조선 중기 교하노씨 노직 형제의 선영인 이곳은 그때 모습이 어떠했을까? 저는 어릴 때부터 노직, 노직 형제가문에 대한 궁금증이 컸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출사했던 유명가문이 아니었을까? 그렇게도 생각했다. 이끼 끼고 마모된 비석, 그리고 묘석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게 했다. 1980년대 필자가 향리 이장으로 근무할 때였다. 당시는 마을 유래를, 즉 지명사를 연구하는 시기였다. 하루는 양평문화원장 양혜석씨가 방문하였다. 나는 함께 저의 8대조 달행, 그리고 능안에 있는 노씨 묘역을 안내하였다. 이끼 끼고 마모된 비석과 석물, 노직 형제의 묘역에서 감탄과 함께 역사의 현장을 발견하였다. 고려 시대의 인물이 아닌 조선조, 선조 대왕 때 임진왜란의 국난에서 우국충정하신 훌륭한 분이심을 알게되었다. 여주군 개군산면 향곡리(현 양평군 개군면 향리)는 조선 선조 때 교하노씨 노직, 노직 형제의 선영이었다. 노직 형제의 조상님과 후손분의 묘역이 능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노직 형제의 기록은 선조 실록 등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의 기록을 옮긴다.
노직[盧稙]
1536(중종 31)∼1587(선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사치(士稚), 호는 별유(別宥)·호폐헌(好閉軒)·망포(望浦). 철강(鐵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통례 언방(彦邦)이고, 아버지는 현감 홍우(弘祐)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김희수(金希壽)의 딸이다.
1569년(선조 2) 알성문과에 장원, 형조좌랑이 되었는데 형옥(刑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녀 오랫동안 재임하면서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1573년 정언이 되고 이듬해 군정보충(軍丁補充)의 임무를 맡아 전라도경차관으로 파견되었다. 예문관제학을 거쳐 1576년 수찬이 되고, 동부승지를 거쳐 1582년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585년 부제학에 이어 호조·예조판서, 이듬해 시약청제조(侍藥廳提調)가 되었으며, 그 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간리(奸吏)를 적발하는 등 기강확립에 노력하였으며, 정사(政事)에 밝아 승정원 재직중에는 선조가 해당 관리를 부르지 않고 매사를 그에게 물을 정도였다. 이원익(李元翼)·유성룡(柳成龍)·강서(姜緖)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노직[盧稷]
1545(인종 1)∼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사형(士馨). 철강(鐵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통례(左通0xBC82) 언방(彦邦)이고, 아버지는 현감 홍우(弘祐)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김희수(金希壽)의 딸이다. 1570년(선조 3) 생원이 되고 158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써 주서로 옮겼으며, 그뒤 감찰·좌랑·지평을 거쳐 병으로 체직하였다. 그 뒤 부제학·황해감사·병조판서·경기감사를 거쳤다. 임해군옥사(臨海君獄事) 때 파직되었으나 판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감사로 있을 때 민폐를 덜어 칭송을 받았다. 서화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는데, 예서(隷書)와 전서(篆書)에 뛰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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