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는 조선 후기 문신인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이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했던 조영 활동의 일부를 글로 읊은 것이다.
김조순은 조선왕조 제23대 왕인 순조의 장인으로 조선시대 사대부 민가의 높은 격조를 보여주는 구성과 기법으로 별서(別墅)인 옥호정(玉壺亭)을 조영했다. 김조순은 당대의 문호로서 그림을 그리는 데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와 더불어 여유롭게 별서를 조영할 수 있는 정치적 세력이 기반이 되었기에 사대부 민가의 높은 조경실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옥호정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앞서 말한 김조순이 남긴 『풍고집』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인 김유근과 김좌근의 문집, 규장각에서 함께 활동한 이들의 문집 속에 언급된 모습과 옥호정의 모습을 그린 옥호정도(玉壺亭圖)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옥호정도를 토대로 옥호정의 공간구성을 살펴보면 바깥마당, 사랑마당, 안채 마당, 옥호동천의 별원 등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바깥마당
바깥마당은 하인들이 생활하는 대문 밖의 공간으로, 진입부는 명당수인 개울을 따라 버드나무가 식재되어 있고 판석교가 있으며, 바깥마당 낮은 곳에 채소밭과 약초밭, 높은 곳에는 과실수와 포도시렁이 있다. 또한, 그림 속 ㄱ자형 초가집에는 「下人廳(하인청)」이란 글자가 쓰여 있어 하인들이 사는 집임을 알 수 있다. 이 공간에는 따로 조경을 한 것은 없고 아름다운 계류와 초가가 함께 어우러져 자연스럽고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사랑마당
사랑마당은 보통 손님이 드는 공간으로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를 담론하고 문화적 교류를 하는 중요한 공간의 역할을 하였다. 이곳에는 거의 나무를 심지 않았으며, 꽃이나 괴석을 배치하거나 정심수라 하여 한 그루의 나무를 담벼락에 붙여 식재하였다. 옥호정에는 정심수로 느티나무를 심은 것으로 나타나며 여기에는 「槐木(괴목)」이라 쓰여있다. 이곳의 입구에는 계단 위쪽에 양쪽으로 취병을 설치하였다. 이것은 생 울타리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출입구와 같은 기능을 했다. 역시 이곳에서도 사랑마당을 넓게 비우고, 화계에는 주로 모란, 석류, 진달래 같은 화관목류나 파초 등을 심었고, 푸른색의 사각 수반과 바로 앞 화분에 수생 식물류를 보아 때로는 수조에 수련을 키우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화단 남쪽 기다란 마당 동쪽 가에는 노송하나가 서 있고 마당 남쪽에는 등가대를 설치, 여기에는 「葡萄加(포도가)」라고 쓰여 있다. 사랑마당 서쪽으로는 산자락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이곳에는 자연석으로 3단 화계를 만들고 모란이나 작약으로 보이는 식물을 심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 후원에는 봄, 여름에 꽃을 감상하도록 꽃나무를 배치하고 후원 초입부 누각 주변에는 단풍나무를 군식 하여 가을에는 단풍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사랑마당은 전체적으로 그 공간의 특성상 주인을 찾아온 손님들이 사랑에 앉아 바라보며 감상하는 완상적 공간으로서의 조경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 안채마당
사랑마당에서 작은 중문을 거치면 들어서게 되는 곳이 안채이다. 안채마당은 안주인과 부녀자들의 휴식을 위한 곳으로 사적인 공간에 해당한다. 그림에서 안채마당에는 화목이나 기물이 거의 보이지 않으며 비어 있다.
경사진 산자락에는 6개의 단을 석단을 조성했는데 단 끝에는 석대를 세우고 「竹亭(죽정)」이란 글씨가 쓰인 초정을 마련했다. 여기에는 「山半樓(산반루)」라는 편액이 붙어 있으며 4분합문(分閤門)을 사방에 설치한 것으로 보아, 여름에는 이 문을 열어 시원한 주변 경관을 감상하고 겨울에는 닫아 두어 아늑한 방이 되도록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초정에서 남쪽에 설치된 토담에는 작은 협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남쪽 옥호동천의 별원과 내왕이 가능하게 한 것이다.
안채 마당은 전체적으로 아녀자들을 위해 높은 토담으로 막아 아늑하게 조성하여 대표적인 조선시대 여인들을 위한 민가 조원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옥호동천의 별원
서쪽 사랑마당에서 산자락을 따라 올라가면 암벽에 「玉壺洞天(옥호동천)」이라 새긴 바위와 지당이 보인다. 이 지당은 나무 홈대로 석간수를 받아 만든 것으로 지당 안에는 장방형의 판석을 섬처럼 놓아두었다. 암벽 앞에는 초정이 있고 이 초정에서 남쪽으로 돌아내려 오는 곳에는 단풍나무를 심어 원림을 조성하였으며 여기에는 「丹楓臺(단풍대)」라고 썼다.
단풍 대 아래 보이는 지당에는 연꽃을 심지 않았는데 이는 고요한 수면을 통해 옥호동천의 경관과 하늘이 그대로 비치게 하여 이를 감상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지당 동북쪽 모퉁이에는 단을 조성, 오미자나무들을 심고 받치는 가구(架構)를 설치하고 여기에는 「五味子架(오미자가)」라고 써넣었다. 지당의 서쪽 산자락에는 노송들이 가득 있어 운치 있는 원림을 조성하고 있다.
옥호동천(玉壺洞天)이라는 이름은 ‘옥으로 만든 작은 병’과 같은 신선이 사는 세계를 뜻한다. 그 이름처럼 옥호동천의 별원은 신선이 사는 선경의 공간처럼 느껴지도록 하였다.
김조순이 조영한 옥호정의 별서조경은 주변의 순수한 자연과 어울려 조원 공간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더욱더 극대화될 수 있었다. 현재 옥호산방이 있었던 곳은 민가들이 난립하여 옛 자취를 알아볼 수 없게 됐지만, 다행히 옥호정도 그림을 통해 당시 민가조원의 높은 격조를 세밀하게 확인할 수 있어 지금까지도 사대부 조경을 연구하는 연구 자료로 유용하게 쓰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