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원군의 중매
순원왕후의 아버지인 영안부원군 김조순이 한창 세도가 있을 때에 홍기섭이 그 집을 출입했었는데, 부원 군은 항상 홍기섭을 출중한 인물로 보고 있었으며, 그러는 한편 자기 집의 일을 돌보는 침모와 인연을 맺어 주고 싶어 넌지시 침 모에게 물었다.
“내가 뛰어난 사람 하나를 알고 있어 꼭 중신을 서고 싶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떤고?”
이 말을 들은 침모는 출가를 하겠다는 대답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부끄러움을 나타냈는데, 싫지는 않은 눈치였으며, 침모는 서른 전에 남편을 여의고 일점 혈육도 없는 처지여서 소일로 김조순의 집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집은 상당히 부유했으며, 김조순은 침모를 그의 집으로 돌아가 있게 하고 똑똑한 상노 아 이를 불러서 무엇인가 세세히 일러 놓았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홍기섭은 여느 때와 같이 김조순의 집 대문을 들어섰으며, 이때 항상 보던 상노 아이 가 나서면서 홍기섭에게 말을 붙였다.
“대감께서 문 밖의 정자로 나가시면서 나으리를 모시고 오라고 하셨는데, 그러하오니 이 나귀를 타고 가시지요. 소인이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전에도 가끔 김조순이 홍기섭을 문 밖 정자로 청한 적이 있었으므로 그는 별로 의심치 않고 나귀를 탓으 며, 홍기섭이 나귀를 타자 상노는 나귀의 고삐를 몰아 동소문을 지나 성북동 골짜기로 접어들어 얼마 동안 을 가더니 어느 집 앞에 당도하여 나귀를 멈추고 말했다.
“나으리, 이 댁으로 들어가 보세요.”
이 말에 홍기섭의 생각에는 영안부원군이 이 집에서 기다리나 보다고 생각하고 서습지 않고 집안으로 들 어섰으며, 집안을 보니 기화요초에 모든 것이 깨끗이 마련되었고, 그 아름다운 모양이 놀라웠으나, 사람의 기척은 없었고 깨끗이 치워 놓은 대청에는 눈이 부실 정도의 꽃방석만이 깔려 있었다.
홍기섭은 앉아 있으면 영안부원군이 나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방석에 앉아 있 었다.
그런데 사뿐사뿐 나는 듯한 발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은 한 여인의 모습이었으며, 그녀의 얼굴에 가득히 미소를 띠고 접근해 오더니 홍기섭의 앞에 이르러서는 깊이 허리를 숙여 배례를 올렸다.
홍기섭은 당황하여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곧은 그의 성질로서 생면부지의 여인의 영접을 받고보니, 남 녀 칠세면 부동석이거늘 어찌 감히 여인을 대할 수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 거동을 본 여인이 기 섭을 만류했다.
“존객이 행차하심에 여자의 몸으로 영접하는 무례를 용서하시고 잠깐만 참아 주십시오. 부질없는 소회 나마 아뢰옵고자 합니다.”
여인의 애원에 홍기섭은 그만 다시 주저앉고 말았으며, 여인의 요염한 자태에 그의 곧은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고, 홍기섭이 앉는 것을 보자 여인은 심부름하는 아이를 불러 음식상을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상다리가 휘도록 차려 온 걸교자는 놀랄 만한 진수성찬이었으며, 여인은 섬섬 옥수로 도화주를 따라 홍 기섭에게 올리려 했고, 이를 본 홍기섭은 대경실색하고 말았으며, 낯선 남녀가 자리를 같이하는 것도 잘못 인데, 하물며 술까지 권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홍기섭이 이윽고 입을 열어,
“대체 주인댁은 누구시기에 나를 이렇게 환대하는 거요?”
그러나 여인은 대답하려 하지 않고 잔 든 손을 내밀 뿐이었으며, 그러자 홍기섭이 마지못하여 술을 받아 먹기 시작하니 술잔이 자꾸만 홍기섭에게로 갔고, 술을 거듭하니 자연 흥취가 나서 무거웠던 입이 가벼워 졌다.
“문 밖에 나귀를 몰고 온 아이에게도 음식을 좀 주었으면 좋겠소이다.”
이 말에 여인이 다시 꽃잎같이 웃으며 말했다.
“모시고 온 상노 아이 말씀이군요. 그 아이는 벌써 부원군 댁으로 돌아갔습 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는 자기가 부원군 댁의 침모였으며, 그 부원군의 분부로 오늘 일이 벌어진 것을 낱낱이 말했다.
이 말을 듣자 마음이 외곬인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했으며, 가세가 심히 구차 할 뿐 아니라 처자에 외손 녀까지 둔 터에 첩을 맞이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형편을 숨김없이 말했다.
“나라는 사람은 평생을 두고 소실이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오.”
“저의 사람됨이 못나서 취하지 않으시겠다면 저로서도 하는 수 없다옵니다 만, 가산이 간구하여 감당치 못한다 하심은 무슨 말씀이오니까? 첩에게는 몇 식 구의 살림을 감당할 만한 재물이 있사오니 그러한 염려 만은 마시옵소서.”
이렇게 분명히 말하며 아름다운 눈웃음을 지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홍기섭도 남자인 바에야 끝내 미인을 거절할 용기가 없었으며, 그럭저럭하는 중 에 황혼이 되었고 포근한 달밤이 그들을 찾으니 급기야 홍기섭은 마음을 허락하고 방에 화촉을 밝혔으며, 그 이튿날이 되었다.
“나으리,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문안 드립니다.”
하고 들어서는 상노의 인사를 받고 홍기섭은 겸연쩍게 웃었다.
급기야 홍기섭이 상노의 인도로 다시 영안부원군 댁을 가니 부원군이 웃으면서 말했다.
“홍남양은 장가를 잘 드시었소? 일후에는 신부를 너그러이 대접하여 중매든 이 사람이 과히 불안치 않 게 하여 주시오.”
이 말에 홍기섭은 화끈하는 얼굴을 어색히 여기면서 말했다.
“대감의 계략이 참 능란하십니다. 제가 꼼짝없이 대감의 계략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면서 감사해 했으며, 그 후에 홍기섭은 그 소실의 재물로 구차함을 모면하고 점차 벼슬길에 나섰으며, 소실과의 사이에는 자손이 창성하여 부귀를 누리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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