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길
[鄭惟吉]
원본글 출처 | 정유길의 비명(碑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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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상헌(金尙憲) |
이명 | 자 : 길원(吉元) 호 : 임당(林塘) |
원전서지 | 국조인물고 권49 우계ㆍ율곡 종유 친자인[牛栗從游親炙人] |
예로부터 나라가 태평한 세상에서는 하늘이 반드시 유명한 신하와 어진 보필을 내려 보내 주선하도록 하여 그 융성함을 구가하게 하였고, 또 그의 자손들이 반드시 그 덕선(德善)과 공렬(功烈)을 문장으로 저술하고 이정1)(彛鼎)에다 새기어 후세에 보임으로써 나라의 빛이 되었는데, 경전(經傳)에 기록된 바를 통해 이러한 것을 대략 볼 수 있다.
우리 외할아버지 고(故) 좌의정(左議政) 임당 부군(林塘府君, 정유길(鄭惟吉))이 네 조정을 두루 섬겨 세대마다 아름다운 덕을 쌓아 그 공이 지금까지 베풀어지고 있으므로 마땅히 큰 비에다 새기어 영구토록 전해가며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신도비가 거의 50년 동안 세워지지 않았으니, 이는 대체로 신중을 기하기 위한 것이다. 어느 날 내제(內弟) 정광성(鄭廣成)이 나 김상헌(金尙憲)에게 부탁하기를, “우리 할아버지 묘지명(墓誌銘)은 형이 이미 저술하였지만 신도(神道)에 아직 미진한 공역(工役)이 있습니다. 일도 달리 기록할 것이 없고 명(銘)도 달리 말할 것이 없지만 다만 하나는 땅속에 있고 하나는 땅 위에 있으므로 둘 다 비치해 두어 아울러 전하려고 하니, 형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묘지명에 서술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거듭 서술한다.
부군(府君)의 성(姓)은 정씨(鄭氏)이고, 휘(諱)는 유길(惟吉)이며, 자(字)는 길원(吉元)인데, 동래현(東萊縣) 사람이다. 정씨의 선대는 먼 윗대부터 순서가 있다. 계통을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은 좌복야(左僕射) 정목(鄭穆)으로부터 고려 때 드러나 마침내 대가(大家)가 되어 후하게 배양한 끝에 찬란하게 열려 멀리 갈수록 더욱더 창성해졌다. 증조(曾祖) 익혜공(翼惠公)은 우리 조선 문명(文明)의 시대에 안팎으로 공적을 수립하여 지위가 참찬(參贊)에 이르렀고 동래군(東萊君)에 봉해졌는데, 이분이 정난종(鄭蘭宗)이다. 할아버지 문익공(文翼公)은 중종(中宗) 때 상국(相國)으로 사류(士類)를 두둔하다가 누차 간신들의 미움을 사는 등 대신(大臣)의 절개가 있었고 졸(卒)한 뒤에 중종의 사당에 배향되었는데, 이분이 정광필(鄭光弼)이다. 아버지 정복겸(鄭福謙)은 강화 도호부사(江華都護府使)를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는데, 삶을 오래 누리지 못하고 후손에게 남겨주었다. 어머니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종실(宗室) 장풍령(長豐令)의 손자인 참봉(參奉) 이수영(李壽永)의 딸인데, 정덕(正德) 을해년(乙亥年, 1515년 중종 10년) 11월 30일(임자)에 부군이 태어났다.
부군은 어려서부터 특이한 기질이 있었다. 겨우 이를 갈 무렵에 문익공이 슬하에 놓고 가르치면서 항상 부인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뒤에 반드시 나의 지위에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금 장성하자 문장의 구상이 넘쳐흘러 날마다 새로워지고 풍부해져 재능이 몇 사람을 아우를 수 있었으므로 동료 중에 앞선 사람이 없었다. 17세에 사마시(司馬試)를 보아 제6등으로 합격하였는데, 여러 고관(考官)들이 그 글을 기특하게 여겨 앞을 다투어 1등을 시키려고 하니, 평소에 사람을 알아본다고 이름이 난 김극성(金克成)공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후일 나라의 그릇이 될 것이니, 일찍부터 이름이 누설되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김안로(金安老)가 권력을 훔쳐 쥐고 문익공을 시기하다가 죄를 덮어씌워 유배를 보내고 그의 자손도 아울러 금고(禁錮)시켰는데, 김안로가 패배하자 비로소 조정으로 돌아왔고 금고도 풀렸다. 그 이듬해 무술년(戊戌年, 1538년 중종 33년)에 부군이 과거에 급제하니, 중종(中宗)이 내관(內官)을 보내어 유시하기를, “내가 태학에 가서 인재를 선발하다가 경(卿)의 손자를 얻어 장원을 시켰는데, 내가 사람을 얻은 것을 기쁘게 여긴다.”고 하였으니, 이처럼 은총을 내린 바는 근세에 있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매우 부러워하였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다가 공조 좌랑(工曹佐郞)ㆍ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ㆍ이조 좌랑(吏曹左郞)으로 전직되었다. 그때 외척들 사이에 틈이 생겨 조정이 의구하였는데, 부군이 격동하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으니, 사론(士論)이 귀의하였다. 중추부 도사(中樞府都事)로 전직되었는데, 동료 중에 서로 피혐(避嫌)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 공조 정랑(工曹正郞)ㆍ예조 정랑(禮曹正郞)ㆍ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인종(仁宗)이 동궁으로 있으면서 궁료(宮僚)를 선발할 적에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으로 전직되어 정성을 다 쏟아 보도(輔導)하여 총애를 많이 받았다. 어버이 문안을 위해 휴가를 요청하니, 궁중의 반찬을 나누어준 다음에 간곡하고 측은한 말씀을 집안사람처럼 해주었다. 동호 서당(東湖書堂)에서 사가 독서2)(賜暇讀書)할 적에 퇴계(退溪) 이황(李滉)ㆍ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같이 추천되었으므로 한때 으뜸으로 추대되었다. 다시 이조 정랑이 되었다.
갑진년(甲辰年, 1544년 중종 39년)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으며 상복(喪服)을 벗자 내자시 첨정(內資寺僉正)에 임명되었다. 의정부(議政府)로 들어가 사인(舍人)이 되었다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전직되었다. 누차 전직되어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ㆍ응교(應敎)ㆍ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하였다. 고사(故事)에 휴가를 받아 동호에서 글을 읽는 것은 당상관(堂上官)이 되면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그대로 유지하여 문형(文衡)의 후보감으로 두도록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세상에 드문 특별한 은총이었다. 임자년(壬子年, 1552년 명종 7년)에 증(贈) 의정공(議政公)이 세상을 떠났는데, 상복을 벗자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 정시(庭試)에 장원하여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는데, 이황을 불러 임금의 학문에 도움받을 것을 청원하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예조 참판(禮曹參判)ㆍ이조 참판(吏曹參判)ㆍ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경신년(庚申年, 1560년 명종 15년)에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발탁되어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ㆍ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의금부(義禁府)ㆍ성균관(成均館)ㆍ경연(經筵) 등의 일을 겸임하였는데, 여러 문학의 중대한 일을 어느 하나도 위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에 밖으로는 조정의 모범이 되고 안으로는 경연(經筵)에서 일을 논하고 구상하였는데, 아뢴 바가 있을 경우에는 임금이 반드시 귀를 기울여 들었으므로 은총과 예우가 날로 융숭해졌다. 이조 판서에 임명되어 정릉(靖陵, 중종의 능)의 자리를 다시 잡을 적에 묘광(墓壙)의 일을 감독하였고 그 일이 끝나자 서반(西班)의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기용되었다. 교서(郊墅, 시골에 있는 별장)에서 한가롭게 수년간 살면서 도서(圖書)를 늘어놓고 꽃과 대나무를 심고는 문을 닫고 조용히 함양하기도 하고 소요하며 마음대로 즐기기도 하는 등 조정에 나가거나 재야로 물러나거나간에 두 가지 안색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융경(隆慶) 원년(元年, 1567년 명종 22년)에 부사(副使)의 임무를 띠고 연경(燕京)에 하례를 드리려고 갔다. 요동(遼東)에 도착하였을 때 수레가 진흙탕에 빠졌는데, 역관(譯官)과 역부(役夫)들은 모두 뒤에 있었다. 갑자기 달로(虜) 기병 수십 명이 어느새 이르러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쌌다. 이보다 앞서 나그네들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왕왕 겁탈을 당하였으므로 좌우의 노복들이 너나없이 놀라 안색이 변하였다. 오랑캐들은 부군(府君)이 수레 속에 단정하게 앉아 동요하지 않은 것을 보고 끼리끼리 서로 쳐다보고 말하기를, “대인(大人)이다.” 하고, 수레를 큰길로 끌어내주고 떠났다.
선조(宣祖)가 왕위를 계승하여 황제가 사절을 보냈을 때 부군이 국경에서 맞이하여 위로하였고 그들이 돌아갈 적에 송별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갔다. 그때 지나치게 처리된 옥사(獄事)가 있었는데, 부군이 억울한 것을 살펴서 처리해 내보냈다. 그런데 이름이 있는 처사(處士)가 은밀히 뒤에서 사건을 주도하고 언로(言路)에서 그를 도와 도리어 부군을 비방하였으나 부군이 스스로 변명하지 않은 채 병환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그 뒤에 그 일이 밝혀지자 사람들이 비로소 알았다. 그 이듬해에 또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가 되었다가 임기가 차자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번갈아 임명되었다.
임신년(壬申年, 1572년 선조 5년)에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제위(帝位)에 올랐을 때 한림(翰林) 한세능(韓世能), 급사(給事) 진삼모(陳三謨)가 와서 조서를 반포하였다. 처음에 부군을 명하여 접대를 주관하고 노수신(盧守愼)공을 명하여 영접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명(明)나라 사신을 접대하면서 예전에 글을 지을 적에 혹은 경각간에 여러 편을 짓기도 하고 혹은 어렵고 까다로운 운자를 내놓고 많은 양을 지으려고 경쟁하는 등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았는데, 이를 일러 나라를 빛내는 솜씨라고 하였다. 그런데 명나라 두 사신은 중국에서 문학의 명망이 매우 높았으므로 노수신공이 굳이 사양하고 나가지 않으려 하자 이에 다시 명하여 서로 바꾸어서 하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노공의 진부한 문장에다 담담한 생각과 부군의 바리때를 치는 듯한 청신(淸新)함이 둘 다 제격을 얻었다.”고 하였다. 두 사신이 한번 부군을 보고 곧바로 존경하여 매양 시 한 편을 지을 때마다 먼저 초고를 가지고 와서 보인 다음에 내놓았으며, 비록 갑자기 연회에 초청해도 반드시 예를 지키면서 역관(譯官)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군(使君)의 기풍을 좋아하여 항상 보고 싶기 때문에 사양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고, 이별에 임해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그 뒤에 그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보면 반드시 부군의 안부를 물어보았고 사절이 왔을 때 서신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시종 이처럼 그들의 사모를 받았다.
다시 특별히 한 품계를 더 승진하여 우찬성(右贊成)에 임명되어 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하였는데, 언로(言路)에서 저지하여 다시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이윽고 다시 찬성(贊成)이 되었을 때 홍문관에서 차자를 올려 지적해 배척하니, 임금의 하교에 “내가 정 아무개를 보건대, 그 마음이 순실(純實)하여 정말로 경박한 선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근래에 조정의 관료들이 마음을 합쳐 나라를 도울 것은 생각지 않은 채 오직 자신들에게 빌붙지 않은 사람은 번번이 배척하고 있으니,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그때 선배와 후배가 서로 불신하여 당파로 나뉘는 조짐이 있었으므로 부군이 피차의 간격을 두지 않고 한결같이 화평하도록 조절하였는데, 소년(少年)들이 일을 좋아하여 함부로 비평하며 공격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누차 예조 판서ㆍ병조 판서ㆍ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ㆍ우찬성(右贊成)으로 전직되었다.
신사년(辛巳年, 1581년 선조 14년)에 이조 판서에서 우의정(右議政)으로 승진되자, 사간원에서 탄핵하여 저지하였다. 임금이 유시하기를, “우상(右相)이 굉후(宏厚)한 기국과 화의(和毅)한 풍도와 능운(凌雲)의 재주3)로 매양 서생(書生)의 말에 시달리고 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성인(聖人)도 세상에 용납되지 않았으니, 우상에게 무슨 한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군신(君臣)간의 계합을 참소와 비방으로 떨어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더 믿게 되었다. 임금이 비록 내심으로 부군을 중히 여겼으나 외부로 언로의 기를 펴주기 위해 이윽고 체차를 윤허하였다가 그 이듬해에 다시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명(明)나라에 황태자(皇太子)가 탄생하여 한림(翰林) 황홍헌(黃洪憲), 급사(給事) 왕경민(王敬民)이 우리나라에 와서 조서를 반포하니, 또 부군을 명하여 접대하도록 하였다. 명나라 사신이 부군의 명성을 오랫동안 들어보고 대할 때 더욱더 예우하였다. 이윽고 이조 판서를 사양하고 다시 판돈녕부사가 되어 그전처럼 총관(摠管)을 겸임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에 다시 병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다가 이윽고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되었다. 고사(故事)를 행하기에 힘쓰고 개혁하는 것에 신중을 기하였다. 항상 명예와 세도를 멀리하고자 문호(門戶)를 세워 사사로이 후진과 결탁하지 않았으므로 이로 인해 누차 분분한 탄핵을 초래하였다. 부군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오래 된 가문의 세신(世臣)으로 나라의 은혜를 후하게 받았다고 여겨 차마 결연히 떠나지 못하였으나 의중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부군이 꿈속에 어느 정자에 이르러 마음에 매우 들었었는데, 그 뒤에 사들인 정자가 한결같이 꿈속의 경관과 같았으므로 그냥 ‘몽뢰(夢賚)’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집은 ‘퇴우(退憂)’로 편액을 걸어 만년에 휴식하는 뜻을 의탁하였다.
그 이듬해 갑신년(甲申年, 1584년 선조 17년)에 부군의 나이 70이 되어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 곧바로 사직의 상소를 올려 치사(致仕)할 것을 청원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궤장(几杖,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였다. 그에 대해 사례하는 전문(箋文)에 “당파를 세우는 뜻을 끊었지만 그 누가 대방(大防, 송 광종(宋光宗) 때 누약(樓鑰)의 자(字))의 외로운 충성을 알겠습니까? 전야로 돌아갈 계획이 무르익어 가니, 구양수(歐陽修)처럼 만년을 보전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사림(士林)들이 이를 전해가며 외우면서 ‘여기에서 공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부군이 평소에 건강하여 질병이 없었는데, 무자년(戊子年, 1588년 선조 21년) 가을에 우연히 피곤한 기색을 보이며 자주 위급함을 청원하였으나 임금이 따뜻한 비답만 내리고 윤허하지 않은 채 어의(御醫)를 명하여 항상 보살피게 하고 내의원(內醫院)의 귀중한 약제를 나누어주어 사환이 도로에 줄을 이었으며, 근신(近臣)을 보내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는데, 얼마 안되어 병환이 점차로 위독해져 성남(城南)의 집 정침(正寢)에서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때는 만력(萬曆) 16년(1588년 선조 21년) 9월 28일이었다.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이 조회를 3일간 중지하고 재차 근신을 보내어 의절에 따라 조문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빈렴(殯殮)으로부터 묘소를 만들기까지 관청에서 물품을 공급하였으며 두 명의 관리가 감독하고 호위하였다. 삼공(三公)으로부터 여러 관사의 하급 관리에 이르기까지 너나없이 달려가 슬프게 곡하였는가 하면 아래 잡부(雜夫) 및 거리의 부녀자와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서로 슬퍼하며 탄식하고 사모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그 이듬해 3월 아무 날에 과천현(果川縣) 북쪽 관악산(冠岳山) 외가 장풍령(長豐令) 묘역(墓域) 안 묘향(卯向)의 자리에다 장례를 치렀는데,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었다.
부군은 타고난 자품이 너그럽고도 묵중하며 화평하면서도 꿋꿋하였으며, 풍채가 옥과 같았고 풍도는 장중하고 심원하였다. 법도 있는 가문에서 생장하여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엄연히 숙성하여 저절로 법도가 성취되었으므로 사람들이 성색(聲色)을 통해 엿볼 수 없었고 보는 사람들은 모두 공보(公輔, 삼공(三公)과 사보(四輔))로 기대하였다. 젊어서부터 공부할 때 몇 줄을 한꺼번에 내리읽었고 한번 보면 외워 종신토록 잊어버리지 않았다. 마음을 세우고 일을 행할 때 충후(忠厚)와 근신(謹愼)을 근본으로 삼았는데, 이미 충후와 근신으로 큰 지위에 올라갔으나 그 충후와 근신이 쇠퇴하지 않았다. 여덟 번 이조 판서를 하고 아홉 번 예조 판서를 맡았는데, 성심(誠心)으로 준칙을 삼아 비방이나 칭찬으로 인해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나라에 대례(大禮)가 있으면 진퇴하고 좌우할 때 그 거동이 볼만하였으므로 조정의 뜰에서 바라볼 적에 신인(神人)처럼 찬란하였다.
부군은 평생 동안 거짓으로 꾸미는 것이 아주 없었다. 거처, 음식, 의복이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았다. 사람을 접할 때에는 화기가 넘쳐흘러 사람들이 마치 봄볕을 향하듯이 하였다. 그러나 감히 설만하게 다가가지 않았다. 도량이 넓어 규각을 드러내지 않았고 비록 뜻하지 않는 재앙을 당해도 태연히 이해하였으며 큰일에 있어서는 의리에 따라 제재하였다.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잡고 동조(東朝, 문정 왕후(文定王后)임)를 의지해 심하게 전횡하여 위엄과 복이 그를 통해 나왔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못하였는데, 그가 자기의 아들을 위해 혼인을 하자고 요구하였으나 준엄하게 거절하였다. 정여립(鄭汝立)은 음험하고 사나우며 난폭하고 드세었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입을 두려워하여 흘겨보았다. 그가 일찍이 연석에서 자신과 의견이 다른 대신(大臣)을 극구 비난하여 흔들어대려고 하였으나 주위에서 그를 힐난하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의심하여 물으면 부군이 바른말로 배척하여 그의 말이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동종(同宗)의 모임을 가졌을 때 종인(宗人) 중에 정여립을 영입하려는 자가 있었으나 부군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 뒤 정여립이 반역을 꾀하여 일족이 처형되자 사람들이 비로소 부군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사암(思菴) 박순(朴淳)공과 율곡(栗谷) 이이(李珥)공은 모두 후진의 낭속(郎屬)이었으나 차별없이 권장하며 대우하였고, 같이 승진한 권징(權徵)공, 윤국형(尹國馨)공은 모두 다 이끌어 주어 선후로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르렀고 명망이 있었다. 서출의 아우가 가정을 꾸리지 못하자 가업을 만들어 주어 자급 자족하게 하였고 집으로 서모(庶母)를 맞이하여다 예우를 극진히 하였다. 외롭고 곤궁하여 돌아갈 데가 없는 일가붙이들을 가르치고 길러서 시집을 보내고 장가를 들이는 등 은정이 지극하였다.
문장이 풍부하고 화려하였으며 특히 시(詩)에 능하였는데, 다듬고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아도 저절로 풍미(風味)가 있어 다른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었으므로 모두 다 종장(宗匠)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시인(詩人), 묵객(墨客), 석류(釋流), 방외(方外)의 무리들을 막론하고 정자의 문미(門楣)나 객관의 벽에 시를 써주면 영광으로 여기었다. 궁궐의 안이나 평소에 거처하는 장소에 걸린 그림과 병풍에 반드시 부군의 시가 쓰여져 있어야만 중하게 여겼다. 부군이 저술한 글이 매우 많았으나 난리를 만나 산실되고 유고(遺稿) 두 권만 세상에 간행되었는데, 또한 한 점의 고기를 맛보고 온 솥 안의 맛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서법(書法)이 기특하고 강경하여 저절로 일가(一家)를 이룩하였는데, 세상에서 그 필체를 많이 사모하여 본받았고 임당체(林塘體)로 일컬었다. 군자(君子)들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더불어 견줄 수 없는데도 문예(文藝)를 가지고 스스로 고상한 체하지 않았고, 지위가 날로 융성해져도 다른 사람에게 위세를 부리지 않았으며, 계책을 세우고 경영하여 국정을 보필한 공로가 많은데도 사람에게 지혜를 보이지 않았으니, 이것으로 거의 공에 대한 이름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부군을 모시고 사랑을 받으며 직접 가르침을 받았을 당시에는 어리고 사리에 어두워 위대한 군자의 기상과 언행에 대해 보고서 명언(名言)한 것이 있지 않았으며, 이제 와서는 정신이 혼미해져 국사(國史)와 가승(家乘)에서 또 근거로 삼아 뽑을 수 없게 되어 부군의 50년간 조정에 나가 벼슬한 사적이 이처럼 허망하게 되어버렸으므로, 내가 자신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감히 추측해 앎을 다 바친다. 부군의 후덕과 음공은 산 사람만 그 은택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하찮은 곤충이라도 해친 적이 없었다. 지난날 한때 찬란하게 빛난 강대한 큰 씨족들이 1백 년이 채 안 되어 쇠락하여 떨치지 못하였지만 부군의 후손은 여러 대를 걸쳐 공경(公卿)이 나오는 등 세상이 백 번 변하고 전란을 여러 번 겪었지만 교목(喬木)처럼 꺾이지 않고 동량(棟梁)처럼 바뀌지 않아 사당에 배향된 것이 새로운 것 같으니, 어찌 비롯된 근본이 없이 그러하였겠는가?
또 어른들에게 들어보니, 부군이 의정(議政)으로 있을 때 나라 안에 경보가 없어 사민(四民)이 자신의 업에 편안히 일하고, 조정이 존중되어 상하가 순서가 있었으므로 비록 고대의 융성한 시대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태평의 세상은 되었다. 그런데 부군이 세상을 떠난 뒤로 변고가 갈수록 많아 기상이 삭막해져 다시금 전일의 일을 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대부들이 ‘더욱더 부군이 천인(天人)의 도움을 받고 백성들도 그 은혜를 받았다’고 일컫고 있는데, 이 말이 그렇지 않은가?
부인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관찰사(觀察使) 원계채(元繼蔡)의 딸인데, 순수한 덕행과 아름다운 규범으로 내치(內治)를 잘 도왔으며, 머리를 묶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서로 공경하여 변하지 않았다. 매시절 축수할 때마다 높은 관직에 있는 자손들이 죽 에워싸고 좌우로 나열하여 화기 애애한 속에서 즐거움을 누렸으므로 그 성대한 복록이 세상에 둘도 없었다. 부군보다 6년 뒤인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 10월 17일에 병란을 피해 해서(海西)에 있다가 병환으로 송화현(松禾縣)의 시골집에서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나, 그 이듬해 아무 달에 부군의 묘소 오른쪽에다 부장(祔葬)하였다.
1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 정창연(鄭昌衍)은 좌의정(左議政)이고, 큰딸은 군수(郡守) 윤선원(尹善元)에게 시집가 1녀를 낳았고, 둘째 딸은 판윤(判尹) 유자신(柳自新)에게 시집가 5남 4녀를 낳았다. 셋째 딸은 도정(都正) 김극효(金克孝)에게 시집가 5남을 낳았는데, 이분이 바로 나 김상헌의 선친이고 그의 큰아들 김상용(金尙容)도 우의정(右議政)으로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 호란(胡亂) 때 강도(江都, 강화(江華))에서 순절하였다. 넷째 딸은 도사(都事) 한완(韓浣)에게 시집가 3남 4녀를 낳았고, 다섯째 딸은 사인(士人) 이성린(李成麟)에게 시집가 1녀를 낳았다. 의정은 2남 5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정광성(鄭廣成)은 병조 참판이고, 둘째 아들 정광경(鄭廣敬)은 대사헌이며, 큰딸은 사인(士人) 이효증(李孝曾)에게, 둘째 딸은 군수(郡守) 민여찬(閔汝纘)에게, 셋째 딸은 승지(承旨) 신득연(申得淵)에게, 넷째 딸은 정랑(正郞) 최노첨(崔魯詹)에게, 다섯째 딸은 현감(縣監) 이호원(李浩源)에게 각각 시집갔다. 참판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정태화(鄭太和)는 호조 판서이고, 둘째 아들 정치화(鄭致和)는 관찰사이고, 셋째 아들 정만화(鄭萬和)는 생원(生員)이고, 딸은 대사간 윤강(尹絳)에게 시집갔다. 대사헌은 4남 3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정지화(鄭至和)는 참봉(參奉)이고, 둘째 아들은 정채화(鄭采和)이고, 셋째 아들 정지화(鄭知和)는 응교(應敎)이고, 넷째 아들은 정이화(鄭以和)이며, 딸은 모두 사인(士人)에게 시집갔다. 안팎의 증손과 현손은 2백여 명이므로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문익공(文翼公)의 손자이신 이분은 바로 나의 외조부이시다. 외조부께서도 훌륭한 아들을 두시어 발자취를 이어받았도다. 3대에 삼공(三公)이 나왔으니 그 누가 견줄 수 있겠는가? 어떤 이유로 그렇게 될 수 있었는가? 오직 충성과 후덕이었도다. 덕을 쌓아 터전을 만들었는데 높아질수록 더욱더 공고해졌도다. 옛날의 역사를 상고해 본다면 한(漢)나라에 위현(韋賢)ㆍ평당(平當) 집안이 있었으며, 원안(遠安)ㆍ양진(楊震)의 집안은 동경(東京, 후한의 서울 낙양(洛陽))에서 나란히 아름다웠도다. 천여 년을 거쳐 오도록 겨우 몇 가문뿐이었도다. 외가에서 그들과 짝할 수 있으니, 전혀 과장되지 않도다. 옛날에 위(衛)나라에서는 종정(鐘鼎)에다 새기며 나라의 영광으로 중점을 돌리었고, 주(周)나라에서는 군아(君牙, 주 목왕(周穆王) 때의 대사도(大司徒))를 명할 때도 기상(旂常)에다 기록했도다. 여기에서 남은 공렬(功烈)을 선양하여 소상하게 비석에다 기록했도다. 후손이 여기에 오거든 경건히 이 글을 볼지어다. 그 누가 글을 지었는가? 외손(外孫)의 말이도다.
각주
- 1) 이정(彛鼎) : 종묘에 갖추어 둔 제기(祭器)와 솥으로, 옛날에 공훈이 많은 사람의 사적을 새겨 놓았음.
- 2) 사가독서(賜暇讀書) : 덕과 재주가 있는 젊은 문신(文臣)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하게 하던 일.
- 3) 능운(凌雲)의 재주 : 글을 잘 짓는 재주라는 뜻. 능운은 능운부(凌雲賦)인데,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은 글임. 능운이라는 것은 높이 구름 위로 올라간다는 뜻인데, 지기(志氣)가 초월하거나 필력(筆力)이 굳센 것에 비유함.
[네이버 지식백과] 정유길 [鄭惟吉]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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