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후기 천문학자 남병철의 생애와 학문 ▒▒▒
П. 남병철의 생애 남병철(南秉哲, 1817∼1863)의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자는 자명(子明) 또는 원명(元明), 호는 규재(圭齋)·강설(絳雪)·구당(鷗堂)·계당(桂堂)이다. 뛰어난 천문학자이며 수학자인 남병길(후에 '相吉'로 개명)은 친동생이며, 자는 자상(子裳), 호는 육일재(六一齋) 또는 혜천(惠泉)이다. 이들 형제는 학문연구의 동지였음은 물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고, 형제의 우애가 남달리 깊었다. 양조부 종헌(宗獻)은 3대째 독자였다가 후손이 없어 좌승지를 지낸 주헌(周獻)의 아들 구순(久淳, 1794-1853)을 양자로 맞이하였고, 구순의 아들로 병철과 병길이 태어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안동김씨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딸로, 자세가 바르고 어진 성품을 가졌다고 한다. 외조부 김조순은 안동김씨 세도정치(勢道政治)의 기틀을 다져 놓은 사람으로서, 그들은 순조(純祖), 헌종(憲宗), 철종(哲宗)의 외척이 되었으며, 남병철도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의 딸과 혼인하였다. 남병철은 박학다식하고 문장에 능하였을 뿐 만 아니라 수학에 뛰어났다. 1837년(헌종 3)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에 합격하였고 규장각 대교를 거쳐 1851년(철종 2)에 승지가 되고, 이어서 규장각 제학, 예조, 공조, 형조, 이조판서를 거쳐 대제학에 올랐으며, 관상감제조도 겸하였다. 만년에는 한성부판윤, 광주유수 등의 외직을 거친 경화사족출신의 관료였다.『의기집설』은 아마도 관상감 제조를 맡았던 시기에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혼천의와 기계시계인 험시의(驗時儀)를 직접 제작하는 등 높은 천문학 지식과 의기 제작 기술을 지녔다. 또한 규장각에서 오래 근무하면서 한역 서양 과학서들을 자유롭게 접할 수 있어 서양과학에 대한 남다른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그의 동생인 남병길, 당대의 저명한 수학자인 이상혁(李尙爀), 친구이며 과학자인 박규수(朴珪壽, 1807-1877) 등과 천문의기 제작과 관측에 있어서 서로 교류가 있었다. 저작으로는『규재유고』를 비롯하여『해경세초해(解鏡細草解)』,『추보속해(推步續解)』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1리 선영에 있다.
П. 서양과학에 대한 인식 남병철은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졸기에서 보듯이 그의 학문규모는 매우 방대하여 천문학과 아울러 경학(經學)과 문학, 나아가서는 '백가구류(百家九流)'를 모두 포괄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조선의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 수학자로 손꼽히는 위치에 있으며 당시의 성리학의 학풍을 비판하면서 그는 각각의 개별분야에서 전문을 중시하는 속에서 단연코 실사구시의 정신을 발현해야한다는 학문방법을 견지하였다. 그가 관료학자로서 천문·수학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도 사실은 "산수도 역시 경학 가운데 하나(算數亦經中一事)"라는 관점에서 유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당시 중국인들이 중국의 전통학문과 서양학문을 애매하게 절충한 '서기 중국원류설(西器中國源流說)'의 논리를 과감히 뛰어 넘어 서양의 학문(소위 '西學')을 개방적으로 수용할 것을 주장한 '서기 수용론'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서추보속해후(書推步續解後)』에서는 완원(阮元, 1764-1849)의 '서기중국원류설'의 오류를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지만 청대의 유명한 수학자로 서법의 독자성을 인정한 강영(江永, 1681-1762)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서법을 이용하여 실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강영의 주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도 성현의 학문을 중심에 놓는다면 아무리 효용성이 있는 서양의 기술은 받아드려도 좋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남병철은 개화사상의 선구자인 박규수의 친구로서 당시 천문·역법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또한『영환지략(瀛 志略)』,『해국도지(海國圖志)』등의 서적을 통하여 서양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축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П. 의기집설(儀器輯說)의 혼천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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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북적극 공(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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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병철은 이러한 사상적, 학문적 바탕 위에서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 비판하여『의기집설』을 비롯한 과학서적을 저술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의기집설』은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편찬한 천문·계시의기의 제작법과 사용법을 다룬 책이다. 이 책은 상하 2권 2책으로, 상권은 혼천의, 하권은 혼개통헌의(渾蓋通憲儀)를 비롯하여 간평의(簡平儀), 험시의, 적도고일귀의(赤道高日晷儀), 혼평의(渾平儀), 지구의(地球儀), 구진천추합의(勾陳天樞合儀), 양경규일의(兩景揆日儀), 양도의(量度儀)의 제작과 사용법으로 구성되어있다. 남병철은 천문 관련 문헌을 단순히 선집(選輯) 하는데 그치지 않고 필요에 따라서는 일련의 관련문헌을 선택적으로 집록(輯錄)하여 해설을 덧붙였을 뿐 아니라 몇 가지 의기는 독창적으로 발명하였다. 이 책은 조선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과학기기 저술로서 이 책을 통하여 19세기 후반기 조선의 천문과학과 의기제작기술을 가름할 수 있다(이 책의 원본은 국립중앙도서관의『육일재총서』를 비롯하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데 본 연구에서는 규장각 소장본인 奎 4781 등, 상·하 2책을 대본으로 하였다). 상권은 목록 앞 뒤 1쪽과「혼천」의 앞 뒤 53쪽으로 되어있으며, 서문이나 발문(跋文)이 없어 정확한 간행 시기를 알 수 없는데 대략 1850년대 중·후기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권은 앞 뒤 63쪽이며, 여기에 수록된 내용 가운데 혼평의, 지구의는 박규수가, 양경규일의는 이상혁이, 양도의는 남병길이 만든 것을 모아 해설하였다. 그의 천문학 연구는『의기집설』의 상권「혼천의」에 나타나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최초의 혼천의 연구서라 할 수 있다. 주요저서 |
출처 : http://anastro.kisti.re.kr/scalar/scalar6.htm
남병철은 영안 부원군 김조순의 외손자로 따라서 효명세자하고는 이종사촌이 된다. 문장에도 뛰어났는데 여기서 그가 지은 김조순 신도비를 보자.
http://gsm.nricp.go.kr/_third/user/search/KBD008.jsp?ksmno=8655
▒▒▒ 조선후기 천문학자 남병길 ▒▒▒
П.남병길 형제와 집안
남병길(南秉吉, 1820∼1869, 일명 상길(相吉))의 자는 자상(字裳), 호는 육일재(六一齋) 또는 혜천(惠泉)이다. 형인 병철(秉哲, 1817∼1863)의 자는 자명(字明) 또는 원명(元明), 호는 규재(圭齋)·강설(絳雪)·구당(鷗堂)·계당(桂堂)이다. 이들 형제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직극하였고, 형제의 우애가 남달리 깊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의 집안은 후손이 귀하고, 또 후손이 없어 양자를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8대 조부 남용익(南龍翼, 1628-1692, 대제학, 이조판서를 지냄)을 비롯하여, 5대 조부 유용(有容, 형조판서를 지냄), 영의정을 지낸 공철(公轍), 고조부(高祖父)인 공보(公輔, 진사를 지냄, 공철의 아우), 양조부 종헌(宗獻)은 3대째 독자였다가 후손이 없어 좌승지를 지낸 주헌(周獻)의 아들 구순(久淳, 1794-1853)을 양자로 맞게 된다. 이렇게 해서 구순의 아들로 병철(秉哲, 1817-1863)과 병길(秉吉)이 태어나게 된다.
어머니는 안동김씨,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의 딸로, 자세가 바르고 부덕이 또한 높았으며, 신색(神色)이 깨끗하였다고 전해진다. 외조부 김조순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다져 놓은 사람으로서, 그들의 후손은 순조(純祖, 김상순(金相淳)의 딸과 혼인), 헌종(憲宗, 김조근(金祖根)의 딸과 혼인), 철종(哲宗, 김문근(金汶根)의 딸과 혼인)대에 이르기까지 60여년동안을 세도정치를 하며 크게 권력행사를 하였다.
П. 남병길의 생애
1820년(순조 20)인 경진년에 태어나서 1869년(고종 10)인 50세의 나이에 졸(卒)하였다. 그는 1850년(철종 1)에 문과에 합격한 뒤, 관직은 예조판서에까지 달하였으며 관상감제조도 겸하였다. 수학과 천문학의 천재라고 불리었으며, 특히 천문에 능통하기로는 당시의 제1인자라고 알려졌다. 그는 청빈하고 강직하였으며, 항상 어렵고 약한 사람편에서 일을 하였다. 아첨을 싫어하고 불의(不義)를 바로잡아 가는 곳마다 존경과 추앙을 받았다. 부모에 대한 효도는 물론이고 형에 대한 우의도 두터워 형과 형수를 부모와 같이 존경하고 깎듯이 모셨다고 한다.
П. 군정, 민정, 행정 등의 통괄 지휘 능력 발휘
그가 약관 32세의 나이로 평안남도 성천(成天) 고을의 부사(府使)로 부임하게 되었을 때 그 곳의 행정 질서와 치안 상태가 아주 문란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구 훈련도감 종사관(수도 한양 수비의 책임을 맡던 군정기관)의 관직에서 매섭고 강직한 성격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 하는 사람들의 죄를 철저히 규명하여 풀어주고, 도적들을 잡아 가두어 치안 질서를 바로 잡았다. 한편 재정의 질서를 바로 잡아 그 고을에서 생산되는 곡식이 다른 곳으로 유출되는 것을 철저히 막고 창고에 잘 저장해 흉년에 대비하여 1852년에 가뭄으로 인한 흉년으로 전국적으로 굶어 죽는 자가 많았으나 성천 고을은 곡식의 저장으로 흉년의 어려움을 잘 넘김으로써 평온한 고을로 이름나 있었다. 이로써 그의 군정, 민정, 행정 등의 통괄 지휘 능력은 온 주민은 물론이고 궁중에 까지 알려져 38세의 나이로 황해도 관찰사에 오르게 된다.
П. 두 형제의 남다른 효심
1853년 형 병철이 평안도 관찰사로 있었고, 동생 병길은 병조판서로 재직하고 있을 때의 일로 아버님의 병환이 심해지자 두 형제 모두 관직을 사임하고 아버님을 간호하여 지극한 효성심을 나타냈다. 이와 같이 남병철과 남병길 형제의 효성은 우의정 박규수(朴珪壽, 1807∼1876)의 익문(謚文)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아버지의 3년 탈상(脫喪)을 하고 황해도 개성부 유수(留守, 임금의 총애를 받는 사람을 임명하는 특수 왼관직)가 되었을 때에도 그는 탁월한 행정능력을 발휘하였다. 또한 남병길이 개성을 떠난뒤에 개성의 주민들이 그의 화상을 비석에 새겨놓고 제당을 만들어 오랫동안 칭송하며 제사를 지냈다.
П. 관상감제조에 올라 서양 천문학의 중요성을 강조
남병길이 제작한 적도의 복원품(소장 : 나일성 천문관)
남병길은 1865년 춘추관사(春秋館舍, 시정기록을 맡은 관청), 사력원제조(司譯院提調)를 거쳐 다음해에 관상감에서 관상감제조를 겸직하게 되었다. 사력원이라 기관은 외국어의 번역과 통역을 맡아보던 관청이었는데,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남병길은 중국어, 몽고어, 만주어, 일본어로 된 문서와 서적을 번역하게 되었고, 따라서 새로운 학문을 여과없이 대하게 되었다. 아울러 일찍이 전파되었던 선교사들의 서양 천문학을 누구 보다도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이 분야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때가 남병길의 천문학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여 7년 동안 전성기를 맞게 되었고 새로운 서양의 천문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산학에 능통하여 일식계산이나 월식계산등 천체 운행에 관계된 시각의 계산을 중국의 것과 서양의 것을 비교하면서 거의 완벽하게 계산해 내었다. 또한 그는 중국 중심의 학문적 체계에서 여러 학자들의 설득하여 새로운 서양 학문의 세계를 전개하였다. 남병길은 잡과시험에 쓰는 방술서 가운데 단원자(丹元子)의 보천가(步天歌)가 별을 살피는 방도의 이치에 가깝지 않다고 지적했으며, 이순지의 천문역법이 역 제정에 있어서 잘 부합하지 않으며 계산의 어려움이 따른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시헌기요(時憲紀要)』와 『신법보천가』(이준양 편)를 편집하여 잡과 시험에 사용하였다.
남병길이 저술한 성경
또한 『춘추고(春秋攷)』의 일식을 계산하기도 하고, 산학에 관한 여러 책을 편찬하여 학문의 혼란을 관상감 관원들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였다. 서양의 천문학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배움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주요저서
《성경(星鏡)》,《시헌기요(時憲紀要)》,《추보첩례(推步捷例)》,《선택기요(選擇紀要)》
《산학정의(算學正義)》,《류씨구고술요도해(劉氏句股術要圖解)》,《육일재총서(六一齋叢書》
《만향재지록(晩香齋誌錄)》,《춘추일식고(春秋日食攷(考))》,《중수중성표(重修中星表)》
《측량도해(測量圖解)》,《항성출입표(恒星出入表)》,《양도의도설(量度儀圖設)》등등
출처 : http://anastro.kisti.re.kr/scalar/scalar7.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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