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선현들의 발자취

주금당기(晝錦堂記)

추읍산 2018. 6. 28. 12:00

구양영숙(歐陽永叔)

 

仕宦而至將相하고 富貴而歸故鄕 此人情之所榮이오

 而今昔之所同也.

 

벼슬길에 나아가 장군이 되고 재상이 되어

부귀를 한몸에 안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을,

세상 사람들 모두가 영예로 생각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蓋士方窮時 困厄閭里하야 庸人孺子 皆得易而侮之

若季子不禮於其嫂하고 買臣見棄於其妻.

一旦 高車駟馬 旗旄導前而騎卒擁後하야 夾道之人 相與騈肩累跡하야

瞻望諮嗟하고 而所謂庸夫愚婦者 奔走駭汗하며 羞愧俯伏하야

 以自悔罪於 車塵馬足之間이라.

此一介之士 得志當時하야 而意氣之盛 昔人比之衣錦之榮也.

 

대체로, 뜻 높은 선비라 할지라도, 시골 마을에서 곤궁하게 지내게 되면,

범용(凡庸)한 사람들에게는 물론 철부지에게까지도

 비옷음과 멸시를 당하기 일쑤이다.

마치, 초라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던 소진(蘇秦)이

 형수에게서 밥조차 얻어 먹지 못하고,

나무를 지고 가면서도 책을 읽던 주매신(朱買臣)이

그의 아내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것과 같다.

그러나, 뒤에 두 사람이 크게 출세하여 네 필이 끄는 높은 마차에 올라

의장용 기를 든 부하들의 인도와 기마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고향으로 돌아오자,

고향 사람들이 길 양편에 빽빽히 나와 어깨를 나란히하고 발꿈치를 맞댄 채

우러러보며 부러워하였다. 더우기, 지난날

그들을 그렇게도 업신여기던 범용한 사람들과 어리석은 부녀자들은,

그들의 행차 앞으로 분주히 달려나와 부끄러워 땅에 엎드린 채,

수레 지나간 뒤의 뿌연 먼지와 말발굽 사이에서 자신들이 지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쳤다.

소진(蘇秦)이나 주매신(朱買臣)의 경우는,

한 선비가 평소에 지녔던 뜻을 이루어 의기(意氣)가 양양했던 예인데,

옛 사람은 이를 일러 '의금지영(衣錦之榮)' ,

즉 비단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오는영광이라 했다.

 

惟大丞相魏國公則不然이라. 公相人也.

世有令德하야 爲時名卿이오 自公少時 已擢高科登顯仕하야

海內之士 聞下風而望餘光者 蓋亦有年矣.

所謂將相而富貴 蓋公所宜素有 非如窮厄之人 僥倖得志於一時하야

出於庸夫禹婦之不意하야 以驚駭而誇耀之也.

 

그러나, 오직 대재상(大宰相) 위국공(衛國公)만은, 위에 말한

소진이나 주매신처럼 갑자기 출세하여 이름을 드날린 그런 사람들과는 다르다.

공(公)은 상주(相州) 안양(安陽) 사람이다.

공의 집안은 아버지는 물론 형제분들까지도 대를 이어 진사(進士)에 급제한

 명망있는 가문이며,  공은 당시 명예로운 공경(公卿)이었다.

공은 이미 20세의 약관에, 뛰어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셨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공의 덕이 멀리 미쳐 세상을 감화시키는 것을 보고,

공의 덕광(德光)을 입고자 공을 흠모해온 지 오래였다.

공께서 장군(將軍)과 재상(宰相)을 겸하여 부와 귀를 한몸에 안은 것은,

모두 본디부터 타고난 공의 재덕(才德)에 기인한 것이지,

결코 곤궁했던 사람들이 요행으로 한때 뜻을 얻어 크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하찮은 범부(凡夫)와 우매한 부녀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자신의 출세를 자랑하여 뽐내려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然則高牙大纛 不足爲公榮이며 桓圭袞裳 不足爲公貴

惟德被生民而功施社稷 勒之金石하며 播之聲詩하야 以耀後世而垂無窮

 此公之志 而士亦以此 望於公也. 豈止과一時而榮一鄕哉?

 

그러한 즉, 상아(象牙)로 장식한 깃발을 앞세우고 쇠꼬리를 건 기를 수레에 높이 세워

위엄 있게 행차하는 것도 공에게는 영광될 것이 없으며,

 또 삼공(三公)의 표지인 환규(桓圭)를 손에 쥐고 곤룡(袞龍)의 관복을 걸치는 것도

 공에게는 귀한 것이 못 된다.

공은 오직, 백성들에게 은덕을 베풀고 국가와 사직을 위해 큰 공훈을 세워,

그 공적이 쇠와 돌에 새겨지고 시(詩)와 음악으로 지어져

후세에까지 무궁토록 전해지는 것을

최대의 영광이며 가장 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공의 높은 뜻이 이러하니,

세상 사람들 또한 공의 그 훌륭한 뜻이 이룩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을 어찌 한때의 자랑이요, 한 마을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公在至和中 嘗以武康之節 來治於相일새 乃作晝錦之堂于後圃하고

旣又刻詩於石하야 以遺相人이라.

其言以快恩讐矜名譽爲可薄하니 蓋不以昔人所과者爲榮이오 而以爲戒

於此 見公之視富貴爲如何 而其志豈易量哉?

 

공은, 인종(仁宗)의 지화(至和) 원년에, 무강군(武康郡)의 절도사(節度史)가 되어

고향인 상주(相州)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 때, 관저(官邸)의 후원에 주금당(晝錦堂)을 짓고,

시를 지어 돌에 새겨 여러 사람들에게 남겨 주니,

그 내용은 이러하다.

"전날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던 사람들에게는 극진히 보답하고

 원한을 맺었던 사람들에게는 마음껏 보복하여 은혜와 원수를 마음대로 행하는 것과,

출세하였다고 고향에 돌아와 명예를 자랑하는 것은,

 도리어 자신의 덕을 엷게 하는 것이다."

공은 이처럼, 옛사람들이 자랑으로 여기던 일을 조금도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것을 경계하였다. 

이것만으로도 공이 부귀를 보기를 어떻게 하였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어찌, 공의 그 깊고 높은 뜻을 쉽게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

 

高能出入將相하야 勤勞王家호되 而夷險一節하고 至於臨大事決大議하야난

垂紳正笏하야 不動聲色하고 而措天下於泰山之安하니 可謂社稷之臣矣.

其豊功盛烈 所以銘彛鼎而被絃歌者 乃邦家之光이오 非閭里之榮也니라.

 

그러한 까닭에 공은, 조정 밖에서는 나라를 지키는 대장군(大將軍)으로,

조정 안에서는 훌류한 재상(宰相)으로 국가를 위해 애썼으며,

나라가 태평할 때에나 어지러울 때에나 한결같이 절조(節操)를 굳게 지켰다.

또, 국가의 큰일을 당하여 논의할 때에는, 큰 띠를 길게 드리우고 홀(笏)을 바로잡아

위의(威儀)를 단정히하고 조금도 말소리나 얼굴빛이 달라지는 일 없이

국사를 논하여, 천하를 태산(太山)같이 평안하게 하였다.

진정 공이야말로, 국가의 안위(安威)를 함께하는 사직(社稷)의 대신이라 할 수 있다.

 

余雖不獲登公之堂이나 幸嘗竊誦公之詩하야 樂公之志有成이오

 而喜爲天下道也일새 於是乎書하노라.

 

나는 아직 공이 지은 주금당(晝錦堂)에 올라가 보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거기에 새겨진 공의 시만은 남몰래 외고 있다.

평소 존경하던 공의 원대한 뜻이 성취됨을 기뻐하며,

천하 사람들에게 공의 높은 덕을 알리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다.

 

 

해설

 

한기(韓琦)는 상주(相州) 사람으로 자(字)를 치규(稚圭)라 한다.

20세의 약관에 진사에 급제하고, 뒤에 송(宋)의 인종(仁宗) 때 재상(宰相)을 지냈다.

범중엄(范中淹)과 함께 명재상으로 손꼽힌다.

고향 상주의 태수가 되어 돌아와, 후원에 당(堂)을 짓고 '주금당(晝錦堂)' 이라 이름지었다.

이는 출세하여 금의 환향(錦衣還鄕)한 것을 대낮에 비단옷을 입고 걷는 것에 비유한 옛말과

자신의 상황이 비슷게 여겨졌기 때문인데,

한기는 오히려 명예욕을 경계하는 것을 요지(要旨)로 하여 한 편의 글을 지었다.

이 글은, 일찌기 한기의 높은 덕에 심복하여

 '백의 구양수를 합한들 어찌 한공(韓公) 한 분을 바라볼 수 있으랴.'하며

한기를 존경한 구양수가 한기의 높은 덕을 기리고자

 '주금당'에 부쳐 지은 글이다.

소진(蘇秦)과 주매신(朱買臣)의 일화를 상기시키면서 한기의 금의 환양이 갖는 의미를

 설명한 것은  매우 인상적으로 호소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