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선조님 행적

곡운구곡

추읍산 2019. 4. 24. 09:21

도시의 혼탁함 굽이굽이 물줄기 따라 씻어낸다

. 2010년 10월 19일 화요일 ]


▲ 곡운 수증 추모비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의 일. 

어느 선비가 춘천 박사마을 서면을 거쳐 굽이치는 소양강 물줄기를 따라 춘천부 화학산의 끝자락 사창리로 향하여 굽이굽이 감아돌아 흘러가는 계곡에 이르러 발길을 멈추고 감상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산수는 봉래산 만폭동을 첫째로 치지만 수석이 평평하고 골이 넓어서 유영(遊泳)하고 반환(盤桓)하며 서식(栖息)하고 경착(耕鑿)할 만하기로는 저 만폭동이 이곳보다 못한 바가 있습니다. 더구나 매월당의 유적이 여기에 있으니, 내가 터를 잡아서 의지할 곳으로 삼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라고 송시열에게 말한 곳. 하늘빛 아홉 굽이 시냇물 앞에서 숨이 멈추는 듯한 놀라움에 휘감겨 말문을 닫아버린 김수증. 이곳에서 그는 봄철에 바위마다 꽃이 만발하는 계곡 방화계로부터 층층이 쌓여 있는 계곡의 바위들 첩석대에 이르기까지 동에서 서쪽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15㎞ 사이에 경치 좋은 아홉 굽이에 각각 이름을 붙인다.

김수증이 만든 곡운구곡은 북한강을 따라 춘천시 사북면 오탄리를 거쳐 사내천을 거슬러 화음계곡으로 향한다. 사내천은 춘천시 사북면과 화천군 사내면의 경계를 지나 춘천호로 유입되는 북한강 상류의 한 가닥이다. 남쪽에 1486m의 화악산과 그 북쪽의 여러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암반이 침식된 사륙 사행계곡인 이곳에 김수증은 농수정을 짓고 9계곡마다 이름을 붙여 조세걸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한 김수증만의 은둔처이다. 

조선 최고 세도가 김수증이 15㎞ 물길따라 이름 붙여 

바위마다 꽃 만발 ‘방화계’·흰구름 같은 ‘백운담’ 절경 


# 제1곡 방화계(傍花溪) 

봄철에 바위마다 꽃이 만발하는 계곡 방화계(傍花溪). 춘천시 사북면 신포리에서 화천방면으로 진입하여 국도 56호선과 접하게 되는데 이 진입로에서 5㎞ 지나 고개를 넘으면 “산이 높아지고 계곡이 깊어진다”고 하는 제1곡 방화계가 나온다. 이곳은 화천군을 넘어가기 전 춘천시에 자리 잡고 있다.  

김수증이 소박삽(小撲揷)이라는 속명을 고쳐 만든 봄철에 바위마다 꽃이 만발하는 계곡 방화계. 무이도가의 운을 차운하여 서시를 김수증이 직접 지어 중국의 무이구곡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구곡경영을 하고자 했던 심정을 나타냈다. 방화계를 지나는 계류는 완만하게 흐르다가 너럭바위에 이르면 격한 소용돌이를 이루는 곳. 너럭바위에 새긴 춘천부사 이용은의 ‘방화계 이용은’이라 새긴 각자가 바위에 또렷이 나타나 있다. 



# 제2곡 청옥협(靑玉峽) 

맑고 깊은 물이 옥색처럼 푸른 골짜기라는 청옥협(靑玉峽). 방화계로부터 몇 ㎞를 달려가면 우측의 높게 솟은 바위 봉우리와 좌측에 시내천이 흐른다. “계림을 따라 석림(石林) 가운데를 지나니 높고 낮은 큰 돌들이 많고 산봉우리는 연결되어 하늘을 막은 듯하며 길은 다한 듯 하나 다시 통한다. 또 십여리를 가니 석잔(石棧)이 물 사이에 있고 점차로 전망이 트여가는 것 같았다.”하여 이곳을 청옥협이라 부른다고 곡운기(谷雲記)에 기록하였다. 아들 창국이 차운하여 시를 짓게 한 곳으로 약 300여년의 세월 속에 곡운구곡에서 가장 운치를 자랑하던 백옥바위를 모래와 자갈로 변하게 한 곳이다. 



# 제3곡 신녀협(神女峽) 

하곡의 딸 신녀의 골짜기 신녀협(神女峽). 청옥협으로부터 상당히 먼 거리를 가야만 한다.

계류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잔잔히 흐르며 바위가 얕고 넓게 드러난 평탄한 곳으로 “벼랑의 소나무는 높아서 상쾌하고 물과 돌들을 내려다보니 심히 맑고 환하여 수운대라 지었다.”고 곡운기에 기록하여 신녀협의 언덕인 수운대(水雲臺)를 매월대(梅月臺)라고 마을사람들이 부르는 것을 보고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렀던 것을 확신했던 김수증은 기정(妓亭)을 신녀협(神女峽)이라 고쳐 불렀다. 물위에 김시습의 유적이 있는데 위아래 웅덩이 두 개가 있다. 정약용은 “협곡이 아닌데도 협곡이라고 한 것은 웅덩이의 형상이 마치 마주 서 있는 듯 두 벼랑이 협을 이룬 것 같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이곳에 조카 창집이 차운하여 시를 지은 곳으로 물위에 김시습의 유적이 있어 그 언덕을 청은대(淸隱臺)로 지었는데, 최근에 청은대(淸隱臺)라는 현판을 건 누정을 백옥색의 너른 바위와 그 위쪽의 작은 언덕 위에 세웠다. 


  
▲ 곡운구곡 화음동정사지


# 제4곡 백운담(白雲潭) 

튀어오르는 물안개 흰구름 같은 못인 백운담(白雲潭). 김주승이 “거북이와 용이 물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던 백운담. 그곳에 가면 용의 형상을 한 바위를 볼 수 있다. 정약용은 이곳을 “반석이 넓게 깔려 일천여명이 앉을 수 있고, 돌 빛은 순전한 청색에 아주 깨끗하다. 구렁으로 쏟아져 흐르는 물이 기괴하고 웅덩이에서 솟아 넘치는 기운이 언제나 흰구름 같다”고 묘사하여 곡운구곡 중에서 가장 기관(奇觀)이라고 하였다. 

조카 창협에게 차운시를 짓게 한 백운담은 물이 깊어 사람들이 모이거나 고기를 잡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곡운구곡 중에서 가장 물살이 센 곳이며 물살이 바위에 부딪쳐 흩어지는 것을 김주승은 설운(雪雲)이라하고 정약용은 백운(白雲)이라 하였다. 이곳은 층층이 주름진 바위면이 매우 특이하다. 급류를 이룬 물살과 잔잔히 흐르는 물결이 대조를 이루는 곳이다.



# 제5곡 명옥뢰(鳴玉瀨) 

옥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내는 여울 또는 작은 폭포인 명옥뢰(鳴玉瀨). 백옥담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여 있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 물살이 완급을 조절해 준다고 한다. 곡운기에서는 “기이한 장관을 이루기가 백운담보다는 못하나 맑고 온화하기는 백운담보다 낫다”고 하였다. 

정약용은 “명옥뢰는 곧 모여 있던 담수가 쏟아져 내리는 곳이다. 반석이 넓게 깔리고 놀치는 물결이 구렁으로 달림으로써 옥설이 함께 일어나고 풍뢰가 서로 부딪쳐 진동한다.”고 하여 여울물로서는 극히 아름다운 경관이라 하였다.  

조카 창흡이 차운시를 쓴 이곳은 지금은 가옥과 도로가 들어섰고 축대를 쌓아 올려 당시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지금은 높지막한 바위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높낮이를 이루며 흐르던 계류는 이제 평범한 시내로 바뀌어 있다.



# 제6곡 와룡담(臥龍潭)  

용이 숨은 깊은 물 와룡담(臥龍潭). 김수증의 농수정사(籠水精舍)가 있는 곡운구곡(谷雲九曲)의 가장 중심 되는 곳. 

곡운기에 “화학산은 비취빛을 머금어 책상을 대한 듯하고 그 앞에 용담이 있어 이름 하여 귀운동(歸雲洞)이라 하였다”는 와룡담은 북쪽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명옥뢰와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김수증이 농사정사를 지어 기거하면서 경작하던 밭들이 있어 경관의 특색보다 경작하고 거처할 환경을 갖추었다는 곳으로 농수정사(籠水精舍)는 시끄러운 여울물로 세속의 번거로움을 피하는 선비의 집을 말한다. 김수증은 농수정사가 완성된 후 농수정(籠水亭)을 짓고 “미친 듯 격한 물 층층 바위 때리며 겹겹산 굽이에 울리니 사람 말 지척 사이에서도 알아듣기 어려워라. 세상시비 소리 귀에 닿을까 두려워 짐짓 여울물 시켜 온 산을 둘러막았네.”라며 서문을 지어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였다. 

특히 와룡(臥龍)은 남송대의 주자(朱子)가 여산에 와룡암(臥龍菴)을 지어 제갈량의 위폐를 봉안하였다는 고사와 관련된 말로 자신의 곡운정사를 주자의 와룡암(臥龍庵)에 비유하고자 하였던 것. 

자기의 아들 창직에게 차운시를 쓰게 한 곳이다. 

지금은 여러 채의 민가들이 들어 차 있어 복원하려고 해도 쉽지 않은 곳이다.



# 제7곡 명월계(明月溪) 

밝은 달 비치는 계수 명월계(明月溪). 계류가 잔잔히 흐르는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 명월계는 농수정사 북쪽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와룡담으로부터 오른쪽으로 크게 굽이를 이루는데 특징적인 경관을 꼽기에는 너무 평범하다. 조카 창업에게 차운시를 쓰게 한 이곳은 “서북 모퉁이로 수 백보 나아가면 반석이 있는데 가히 배회할 만하다”라고 김수증이 곡운기에 기록하였지만, 정약용은 “우마견시(牛馬犬豕)의 오염과 티끌 등 어지럽고 더러움이 형언할 수 없다. 수석이 오염되어 있으니 이곳을 구곡에 넣기에는 불가한 곳”이라고 폄하한 곳이다. 멀리 보이는 산을 배경으로 구곡도를 그렸던 것 같으나, 계곡이라 하기에는 너무 평범하여 그냥 스쳐 지나쳐 버릴 것 같은 분위기다. 



# 제8곡 융의연(隆義淵) 

제갈량과 김시습의 절의를 기리는 깊은 물 융의연(隆義淵).명월계로부터 한 벼랑의 산을 돌면 융의연이다. 물 흐름이 완만한 곳이다. 산의 정상 부근에 절벽과 암반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는 곳으로 조카 창집으로 하여금 차운시를 쓰게 한 곳이다. 

이곳 역시 정약용은 “모두 길가에 있어 아름다운 경관이 없다”고 폄하 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산 아래 식당이 자리 잡고 있어 경관을 해치고 있다.



# 제9곡 첩석대(疊石臺) 

층층이 쌓여 있는 계곡의 바위들 첩석대(疊石臺). 곡운기에 “조금씩 더 나아가면 기이한 바위가 여기저기 나열되어 있고 물은 그 사이를 일사천리로 흘러간다. 이름 하여 첩석대라고 하니 수석(水石)의 빼어난 곳이 이곳에 이르러 다한다.”고 하여 정약용이 지적한 “좌우는 평평한 밭과 큰길로서 그늘을 이룰만한 수목이 없으니, 이곳은 아마도 은사(隱士)를 수용하지 못 할 것 같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외손 홍유인에게 차운시를 쓰게 한 이 곳은 원래 특이한 모양의 바위가 많았던 것으로 추정하나 곡운구곡 중에서 가장 경관의 변화가 심했던 곳이다. 지금은 큼직한 몇 개의 바위만이 남아 옛 자취를 말해주는데, 근대에 들어와 무분별하게 자행된 채석으로 인해 옛 경관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 아닌가 한다. 



  
▲ 곡운구곡 제4곡 백운담 모습.


화천은 총 면적의 86%가 산이다. 그래서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는 ‘푸른 산이 사방의 이웃’이라 했고, 여말선초의 학자 이지직은 ‘구름이 가까워 옷이 젖을 정도’라 했다. 실제 1000m를 넘는 산도 많아 백암산(1179m), 사명산(1197m), 광덕산(1046m), 화악산(1468m)을 비롯, 고봉들도 즐비하다. 이런 첩첩산중이 빚어낸 계곡이 절경인 것은 당연지사. 시선이 머무는 곳 어디나 수묵산수화가 따로 없다. 특히 사내천과 삼일계곡에 걸쳐져 있는, 기암괴석과 노송이 어우러진 곡운구곡(谷雲九曲)은 단순한 계곡이 아니다. 15㎞에 이르는 물길의 아홉 굽이에 제각각 이름이 있다. 1곡 방화계부터 9곡 첩석대까지. 어느 곡은 파도치는 모양의 신기한 바위가 있는가 하면, 어느 곡은 물소리가 아름답고, 어느 곡은 봄에 꽃이 만발한다고 한다. 이 깊은 산골 화악산 골짜기마다 이름이 붙은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 왜 그런 것일까.


푸른산이 사방에 이웃… 첩첩산중이 빚은 걸작 

300년 전 조세걸이 그린 ‘곡운구곡도’ 와 실경 비교해 보는 것도 묘미


# 조선 최고의 세도가 김수증이 찾은 이상향 

곡운구곡이 만들어진 것은 1670년 김수증에 의해서다. 그보다 2년 전, 평강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춘천을 거쳐 이곳을 지나가던 김수증. 일찍이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렀던 화악산 자락에 아름다운 계곡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본래 시비를 꺼리고 산수를 좋아하는 성품이었기에 흘려듣지 않았던 터, 평강 현감을 그만두고 다시 찾아왔다. 농수정사를 짓고 머무르면서, 빼어난 경치 9곳에 이름을 붙였다. 그의 호 곡운을 덧붙여 곡운구곡이 완성된 것. 1675년 겨울에는 아예 서울의 가족들까지 이주시켜, 띠집을 짓고 곡운정사 현판을 달았다. 그런데 김수증은 조선시대 최고의 세도가인 안동 김씨 장손에,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서인 계열. 권력의 중심에 있던 그가 무엇이 아쉬워 서울을 떠난 것일까.  

당시 양대 정파였던 서인과 남인은 갑인예송(甲寅禮訟, 며느리 상에 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느냐)으로 치열하게 대립했으나, 현종은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서인은 실각했고, 성천부사였던 김수증은 벼슬을 내놓고 곡운구곡으로 은둔한다. 하지만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 남인인 영의정 허적이 허락없이 왕실의 장막을 사용한 문제)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김수증은 화양부사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게 되고 가끔 곡운구곡에 들른다. 그러나 권불십년이라고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지정하려는데 남인은 찬성하고 서인은 반대)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면서, 서인의 거두 송시열과 김수증의 두 동생 김수흥 김수항이 죽게 된다.  

피를 부르는 정쟁과 끝없이 물고 물리는 정치 현실에 염증을 느낀 것일까, 김수증은 곡운구곡으로 돌아가 화음동정사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은둔한다. 이후 숙종이 지난날을 후회하며 폐비된 인현왕후를 복위하고 서인 역시 재집권 했으나, 김수증은 벼슬을 마다하고 곡운구곡을 떠나지 않았다. ‘나아가서는 백성을 다스리고, 물러나서는 학문의 도야에 힘쓰고 가르치는’성리학자의 길을 실현하고자 했던 김수증. 곡운구곡은 그에게 은둔처요, 보금자리며, 이상향이었다.


  
▲ 곡운구곡 제4곡 청옥협 모습.


# ‘구곡’은 성리학자의 삶과 사상이 어우러진 공간 

곡운구곡은 하류부터 상류로 1곡부터 9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지석이 있어 찾기 어렵지 않지만, 한 옆으로는 산자락이 그 반대로는 도로가 있어 유심히 보지 않으면 계곡의 이름이 말하는 의미를 알지 못한다. 반드시 발을 멈추고 경치를 감상해야만 제 모습과 의미를 알 수 있다. 1곡부터 계곡을 따라 걸어올라 가노라면, 곡마다 경치가 다르고 바위가 다르고 물이 다르다. 그런데 곡운구곡은 왜 하필 9곡일까. 김수증이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떴기 때문이다. 12세기 주자는 중국 무이산 아홉 굽이의 절경을 이루는 곳에 구곡을 설정하고, 무이정사를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쳤다. 고려 말에 들어온 성리학은 조선시대 통치 이념으로 자리잡아, 선비들은 주자의 생활을 교과서로 삼았다. 그래서 풍광이 좋은 곳에서 구곡을 경영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구곡은 전국에 6곳, 곡운구곡도 그 중의 하나다.

김수증 역시 곡운구곡을 설정한 뒤 곡운정사기를 송시열에게 부탁하여 쓰고, 화가 조세걸에게는 곡운구곡과 농수정을 포함한 실경을 열 폭 비단 위에 담채로 그리게 했다. 그리고 자신과 아들, 조카, 외손자까지 동원해 곡운구곡의 매 곡을 묘사하는 칠언절구의 시를 짓게 해 화첩을 만들었다. 바로 곡운구곡도첩. 그런데 이 곡운구곡도는 이전 그림과 달랐다. 생생한 우리 산수의 모습은 물론 띠집과 백성들이 농사짓는 모습, 닭 개 소 나귀 등의 동물들 움직임까지 사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제작할 때 김수증은 조세걸과 일일이 계곡을 답사하면서 어떻게 그릴지 지도했다고 한다. 거울에 비친 듯 사실대로 그리게 했다는 것. 이것은 조선 후기 겸재 정선으로 대표되는 진경산수화의 토대가 됐다. 이전의 그림은 중국의 산수화를 보고 그린 것으로, 그림 속의 산수는 우리 것이 아니었다. 곡운구곡을 찾은 것도 곡운구곡도를 참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300여 년 전의 곡운구곡도를 보고, 실제 경관을 찾아보는 것도 특별한 재미리라.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화음동 정사지를 만난다. 김수증이 정사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은둔하던 곳이다. 선생은 성리학의 세계관을 화음정사의 조경에도 응용하여, 넓은 바위에 태극도·팔괘도·하도·낙서 등을 새겼는데 인문석이라고 한다. 또한 여러 채의 건물이 계곡 사이에 흩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인문석 북쪽의 삼일정과 서쪽의 월굴암, 남쪽으로 천근석의 각자와 기둥을 세웠던 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렇듯 곡운구곡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은둔생활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인 동시에 우리나라 유교문화의 성지다.



#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찾는다 

그런데 김수증이 곡운구곡에 머물렀던 시절을 보면, 관직에서 물러났을 때와 정치적으로 어려울 때다. 이것만 보면 곡운구곡이 그의 은둔처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시절이 좋아지면 다시 나아가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다. 곡운구곡이 단지 은둔처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즉, 시절이 수상하면 물러나 마음을 추스르고 후일을 기약했다.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았기에 다른 형제와 달리 천수를 누리고 장손으로서 가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결정과 갈림길에 서게 된다. 나아가는 것이 좋을지 물러서는 것이 좋을지 몰라, 번민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은둔은 반드시 도피가 아니며, 활용에 따라서는 도약을 위한 물러섬이 되기도 한다. 진퇴와 향방 때문에 고민이라면 곡운구곡을 찾아 지혜를 얻기 바란다. 절경을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재충전 되리라. 곡운구곡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교육과 체험의 공간,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인 이유다. 



  


곡운구곡은 은둔의 메카답게 아직도 은둔중이다. 그곳에 관심을 갖고 일부러 답사를 하지 않고는 그저 화천에 있는 아름다운 계곡으로 여길 뿐.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조선조의 정치는 물론 성리학의 원류를 따라 중국 송나라까지 찾아가지 않고는 못 배길 마력을 지니고 있다. 주자는 ‘이(理)’와 ‘기(氣)’를 말한다. 이(理)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인간의 성품으로 이는 하드웨어에 속하며 선(善)을 기본으로 한다고 했다. 기(氣)는 천지 만물의 기운을 뜻하며 선과 악, 음과 양의 모든 기운을 말하며 선천적 선한기운이 기를 만나 탁해지기도 하고 맑아지기도 하며 선인도 악인도 그 기운을 받아 변해가는 일종의 소프트웨어라고 말했다. 또한 우주만물을 운행하는 이치를 담아 음양오행과 팔괘 등을 정리하여 성리학을 완성한다. 이를 조선조에서 선택해 가르침과 다스림의 기본을 삼아 조선조의 유학자들은 주자를 따르는 것이 학문의 정점을 향하는 것이라 믿었다. 하여 말년에 주자가 무이산에 들어 무이구곡을 경영한 것을 본따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 갔다. 주자가 무이산 아래 계곡에 구곡을 정해 경영한 것을 본따 계곡에 구곡을 정한 것이지만 기실, 구곡이라 함은 굳이 물길이 아니다. 구곡은 물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원림을 말한다. 그 원림 중에 물길인 구곡이 포함되는 것이다. 하여 구곡원림(九曲圓林)이라는 말이 맞다. 


깊은 산자락·시원한 물줄기 드라이브 최적지 

인지도 낮아 인적 드물어… 예산·군부대와 협의 등 개발 과제 산적


# 주자의 무이구곡에서 시작된 구곡 

원림은 지금의 정원처럼 집안에 우물을 파고 나무를 심고하듯 꾸며진 것이 아니라 집 밖의 정원을 뜻한다. 산속에 초막을 짓고 그 주위의 자연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 자연을 인위적으로 사람에 속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 속에 합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산속에 집을 짓고 그 주변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구곡원림이라 칭하며 발원은 중국 송나라 말 주자의 무이구곡에서 비롯된다. 무이산 깊은 계곡에 배를 띄워 감상하는 것이 시원인지라 조선조때 유학자들이 경영한 구곡들도 모두 계곡 물길을 택하였지만, 굳이 배를 띄워 유람했던 깊은 골을 구곡이라 칭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라.  

실개천이 흐르는 산중이라도 그 풍치가 수려하고 아름답다면 능히 구곡이라 칭할 수 있으며 누구라도 그곳에 초막을 짓고 자연을 꾸민다면 어디인들 구곡이 되지 못하랴. 기실 구곡이라 함은 도가에서 말하는 무릉도원에 이르는 선경을 말함인데 인간이 자연과 하나 되는 그것 자체가 선경이며 입신(入神)의 길이 아닐까. 비록 도시의 혼탁함 속에 살고 있을지라도 늘 마음을 정화하고 자연과 하나 되려는 노력이 있다면 18층 아파트 꼭대기며 반지하방인들 구곡이 되지 못하랴. 불가에서는 불(佛)과 마(魔)가 다 내 마음속에 있으니 극락(極樂)도 지옥(地獄)도 다 내 마음먹기 달렸다 했다. 또한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고 했듯 찌든 생활을 피할 수 없거든 짬짬이 시간을 내서 자연의 풍광을 느끼며 대자연의 기를 충전하는 것도 큰 활력소가 되리라.



#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  

곡운구곡은 차로 달리기에 으뜸이라 칭할 만큼 환상의 드라이브코스다. 시원한 물줄기며 너른 바위 그 너머로 첩첩 깊은 산중과 높은 절벽들이 장관이다. 하지만 그것은 차로 도로를 달릴 때 느끼는 감흥이다. 구곡을 직접 답사하기 위해 차를 세우고 도로변에서 감상을 하려면 목숨을 건 위험이 따른다. 또한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도 없어 위험천만한 모험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곡과 2곡은 주변으로 달리는 차량들이 두렵다. 

그나마 3곡은 주차장과 정자도 마련되어 있고 4곡부터는 차량이 뜸하긴 하지만 군부대 앞이라 그 앞에 차를 댈 수가 없다. 필자는 친절하게 길 안내를 해주는 지역주민 길종갑 씨에게 “곡운구곡은 화천군에서 버린 곳이군요.”라며 볼멘소리까지 해 댔다. 그만큼 곡운구곡을 직접 느끼려면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화천군에선 이곳을 개발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두고 노력하고 있지만 예산이며 주민, 군부대의 협조가 이루어지질 않아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 곡운구곡 안내도


발췌 강원도민일보 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