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2일 임술 9번째기사 1637년 명 숭정(崇禎) 10년
강도 함락 시, 전 의정부 우의정 김상용과 전 우승지 홍명형 등의 졸기
전 의정부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죽었다. 난리 초기에 김상용이 상의 분부에 따라 먼저 강도(江都)에 들어갔다가 적의 형세가 이미 급박해지자 분사(分司)에 들어가 자결하려고 하였다. 인하여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올라가 앞에 화약(火藥)을 장치한 뒤 좌우를 물러가게 하고 불 속에 뛰어들어 타죽었는데, 그의 손자 한 명과 노복 한 명이 따라 죽었다.
김상용의 자는 경택(景擇)이고 호는 선원(仙源)으로 김상헌(金尙憲)의 형이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근신했으며 선묘(宣廟)를 섬겨 청직(淸職)과 화직(華職)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해야 할 일을 만나면 임금이 싫어해도 극언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에 참여하지 않아 화가 박두했는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상이 반정(反正)함에 이르러 더욱 중하게 은총을 받아 지위가 정축(鼎軸)015) 에 이르렀지만, 항상 몸을 단속하여 물러날 것을 생각하며 한결같이 바른 지조를 지켰으니, 정승으로서 칭송할 만한 업적은 없다 하더라도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러다가 국가가 위망에 처하자 먼저 의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므로 강도의 인사들이 그의 충렬(忠烈)에 감복하여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전 우승지 홍명형(洪命亨)은 젊었을 때부터 재명(才名)이 있어 동료들의 인정을 받았으며 여러 번 종반(從班)을 역임하였다. 임금이 서울을 떠나던 날, 미처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지 못하고 뒤따라 강도에 들어갔다가 김상용을 따라 남문루(南門樓)의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는데, 뒤에 이조 판서로 추증(追贈)되었다.
생원 김익겸(金益兼)은 참판 김반(金槃)의 아들로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여 재명(才名)이 있었다. 어미를 모시고 강도에 피난 중 적이 이르자 남문루에서 김상용을 따랐다. 그의 어미가 장차 자결하려고 불러다 서로 이별하자 익겸이 울면서 ‘내가 어찌 차마 어미가 죽는 것을 보겠는가.’ 하고, 마침내 떠나지 않고 함께 타죽었다.
별좌(別坐) 권순장(權順長)은 참판 권진기(權盡己)의 아들이다. 김익겸과 함께 남문루에 갔는데, 김상용이 장차 스스로 불에 타죽으려 하면서 그들에게 피해 떠나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고 함께 죽었다. 뒤에 모두 관직을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사복시 주부 송시영(宋時榮)은 좌랑 송방조(宋邦祚)의 아들로 본래 조행(操行)이 있었으며 충효를 스스로 힘썼다. 강도가 함락되자 먼저 스스로 염습(斂襲)할 기구를 마련해 놓은 뒤 신기(神氣)를 편안히 하고 목을 매어 죽었다.
전 사헌부 장령 이시직(李時稷)은 연성 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의 후손으로 성품이 겸손하고 신중했으며 공평하고 정직하였다. 적이 성에 들어오자 송시영(宋時榮)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고인(古人)의 글을 읽었는데, 오늘날 구차스럽게 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송시영이 먼저 죽자 스스로 가서 초빈한 뒤 두 개의 구덩이를 파서 그 중 하나를 비워두고 말하기를,
"나를 묻어라."
하였다. 이에 글을 지어 그의 아들 이경(李憬)에게 부치기를,
"장강(長江)의 요새를 잘못 지켜 오랑캐 군사가 나는 듯 강을 건넜는데, 취한 장수가 겁을 먹고 나라를 배반한 채 욕되게 살려고 하니, 파수하는 일은 와해되고 만 백성은 도륙을 당하였다. 더구나 저 남한 산성마저 아침저녁으로 곧 함락될 운명인데,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는 없으니, 기꺼이 자결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함으로써 천지간에 부끄러움이 없고자 한다. 아, 내아들아, 조심하여 목숨을 상하지 말고 돌아가 유해(遺骸)를 장사지낸 뒤, 늙은 어미를 잘 봉양하며 고향에서 숨어 살고 나오지 말라. 구구하게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네가 나의 뜻을 잘 잇는 데 있다."
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심현(沈誢)은 변이 일어난 초기에 강도에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버릴 뜻을 맹세하였다. 적의 공격을 받던 날, 그의 가족이 배로 떠날 준비를 하고 피하도록 청하니, 듣지 않고 직접 유소(遺疏)를 쓰기를,
"뜻하지 않게 흉적이 오늘 갑진(甲津)을 건넜으니, 종사(宗社)가 이미 망하여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부인(夫人) 송성(宋姓)과 함께 진강(鎭江)에서 죽어 맹세코 두터운 은혜를 저버리지 않으려 합니다."
하고, 드디어 관대(冠帶)를 갖추고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며, 그의 처도 손을 씻고 옷을 갈아 입은 뒤 함께 죽었다. 상이 유소를 보고 이르기를,
"국가가 심현에게 별로 은택을 내려 준 일이 없는데, 난리에 임하여 절개를 지키다가 죽기를 중신(重臣)들보다 먼저 했으니 대현(大賢)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겠는가. 그의 처 송씨가 함께 죽은 절개 또한 매우 가상하다. 해조로 하여금 함께 정문(旌門)하고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게 하여 그 충렬(忠烈)을 드러내도록 하라."
하였다. 전 사헌부 장령 정백형(鄭百亨)은 관찰사 정효성(鄭孝成)의 아들인데, 그의 고조(高祖) 이하 4세(世)가 모두 절의(節義)와 효도로 정려(旌閭)되었다. 정효성이 연로한데다 병까지 위독하여 강도에 피난하였는데, 적이 성에 침입하자 정백형이 그의 아비를 돌보며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크게 노략질하자 면하지 못할 줄을 알고서 조복(朝服)을 갖추고 남한 산성을 바라보며 네 번 절한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며, 그의 두 첩도 함께 죽었다.
전 공조 판서 이상길(李尙吉)은 변란이 일어난 초기에 강도에 들어가 시골 집에 있었는데, 적병이 강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 말을 달려 성으로 들어갔다가 마침내 적에게 해를 당하였다. 이상길은 선조(先朝)의 기구(耆舊)로서 양사의 장관을 역임하였고, 뒤에 나이 80이 넘었다 하여 초자(超資)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예조가 정표(旌表)하도록 계청하였다.
충의(忠義) 민성(閔垶)은 여양군(驪陽君) 민인백(閔仁伯)의 아들이다. 강도가 함락되던 날, 먼저 세 아들과 세 며느리를 벤 뒤 자살하였다. 기타 유사(儒士)와 부녀(婦女)로서 변란을 듣고 자결한 자와 적을 만나 굴복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668면
- 【분류】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군사-전쟁(戰爭) / 외교-야(野)
- [註 015]
정축(鼎軸) : 삼공(三公).
○前議政府右議政金尙容死之。 亂初, 尙容因上敎, 先入江都。 及賊勢已迫, 入分司, 將欲自決, 仍上城南門樓, 前置火藥, 麾左右使去, 投火自燒。 其一孫、一僕從死。 尙容字景擇、號仙源, 尙憲之兄也。 爲人重厚謹愼, 事宣廟, 歷踐淸華, 遇事犯顔極言。 光海時, 不參廢母之論, 禍且迫而不懼。 及上反正, 寵遇尤重, 位至鼎軸, 而恒思斂退, 雅操如一。 雖相業無稱, 而足以矜式一時。 及至顚沛之際, 爲殉義之先, 江都人士, 服其忠烈, 立祠以祭之。 前右承旨洪命亨, 少有才名, 爲流輩所許, 屢踐從班。 去邠之日, 未及扈駕, 追入江都, 從金尙容, 死於南樓之火。 後贈吏曹判書。 生員金益兼, 參判槃之子也。 魁司馬, 有才名。 將母避兵于江都, 及賊至, 從金尙容於南樓。 其母將自裁, 招與相訣, 益兼泣曰: "吾何忍見母死?" 遂不去, 與之俱焚。 別坐權順長, 參判盡己之子也。 與益兼俱往南樓, 金尙容將自焚, 使之避去, 不聽而同死, 後皆命贈官。 司僕寺主簿宋時榮, 佐郞邦祚之子也。 素有操行, 以忠孝自厲。 江都陷, 先自治襲斂之具, 神氣安閑, 卽自縊死。 前司憲府掌令李時稷, 延城府院君 石亨之後也。 性謙愼、公直。 及賊入城, 謂宋時榮曰: "吾輩讀古人書, 今日尙可苟生乎?" 時榮先死, 自臨爲殯, 鑿兩坎, 虛其一曰殯我。 於是, 作書寄其子憬曰: "長江失險, 北軍飛渡。 醉將恇㤼, 背國偸生, 把守瓦解, 萬姓魚肉。 況彼南漢, 朝暮且陷, 義不苟活, 甘心自決, 殺身成仁, 俯仰無怍。 嗟爾吾兒, 愼勿傷生, 歸葬遺骸, 善養老母。 縮跡鄕關, 隱而不起。 區區遺願, 在爾善述。" 遂自縊死。 敦寧府都正沈誢, 變初入江都, 自矢捐生之志。 受敵之日, 其家人艤船請避, 不聽, 手寫遺疏曰: "不意兇賊, 今日渡甲津, 宗社已亡, 事無可爲者。 臣與夫人宋姓, 同死於鎭江, 誓不負厚恩耳。" 遂冠帶, 北向四拜, 自縊死。 其妻亦盥沃易服, 偕死。 上見遺疏曰: "國家於沈誢, 別無深恩厚澤, 而臨亂死節, 先於重臣。 若非大賢, 何以至此? 其妻宋氏同死之節, 亦甚可嘉。 令該曹竝旌門, 錄用其子孫, 以表忠烈。" 前司憲府掌令鄭百亨, 觀察使孝成之子也。 其高祖以下四世, 皆以節孝旌閭。 孝成年老, 病且革, 避兵于江都。 賊入城, 百亨守其父不去。 及賊大掠, 知不免, 具朝服, 望山城四拜, 自縊死, 其兩妾亦同死。 前工曹判書李尙吉, 變初入江都, 在村舍, 聞賊兵渡江, 馳入城, 卒爲敵所害。 尙吉以先朝耆舊, 歷兩司之長, 後以年八十超資, 至是死焉。 禮曹啓請旌表。 忠義閔垶, 驪陽君 仁伯之子也。 江都被陷之日, 先刃三子、三婦後自殺。 其餘儒士、婦女之聞變自決者, 遇賊不屈而死者, 不可殫記。
- 【태백산사고본】 34책 34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668면
- 【분류】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군사-전쟁(戰爭) / 외교-야(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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