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또 하나의 뿌리

13世(15대조 諱 生海비 전주이씨)

추읍산 2018. 10. 23. 10:07
경명군(景明君)


 조선 전기의 왕자.    


           





요약 테이블

시대 조선
출생1489년(성종 20)
사망1526년(중종 21)
유형 인물
직업 왕자
성별
분야 역사/조선시대사
본관 전주(全州)

요약 1489(성종 20)∼1526(중종 21). 조선 전기의 왕자.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침(李忱). 자는 성지(誠之). 아버지는 성종이며, 어머니는 숙의(淑儀)로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홍일동(洪逸童)의 딸이다. 부인은 첨정(僉正) 윤첩(尹堞)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단아하고 검소한 성품과 뛰어난 학문으로 명망이 높았다. 중종의 지우를 받으면서 종친부·종부시·사옹원의 도제조를 항상 겸대하고 또 문소전(文昭殿)도 관장하였다.

그러나 1521년 안처겸(安處謙) 등이 남곤(南袞)·심정(沈貞)의 제거를 도모하다가 오히려 남곤·심정의 반격을 받아 역모를 획책하였다는 죄명으로 주살될 때 안처겸 등이 경명군 추대를 운위하였다 하여 이에 연루되었다. 비록, 무고함을 확신하는 중종의 비호로 처벌은 받지 않았지만, 두문불출하도록 강요되는 등 실의 속에서 주야로 과음하다가 죽었다. 묘는 양주군송산(松山)에 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원보감(璿源寶鑑)』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경명군(景明君)이침[李忱]의 묘지명(墓誌銘) -김창협(金昌協)

          

경명군(景明君) 묘지명 병서

 



양주(楊州) 남쪽 수 리에 있는 송산(松山)의 모향모좌(某向某坐)의 언덕은 고(故) 왕자 경명군의 묘로, 장사 지낸 지 160여 년이 지났지만 자손들이 세시(歲時) 명절에 제사를 올리는 일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 공의 5세손 제안(齊顔)이 그 형 제하(齊夏)의 명으로 안동 김창협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경명군의 묘에 오래도록 명문(銘文)이 없는데, 당신도 우리 선조에게 외손이 되기에 부탁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창협은 여러 차례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 행적을 찾아보니, 세상에 살았던 지가 너무 오래되고 가승(家乘)이 소략하여 자세히 알 길이 없었다. 오직 고 참의(參議) 김공 영(金公瑛)이 창협의 6세 백조(伯祖)인데, 일찍이 공의 묘표(墓表)를 기록해 두어 비록 소략하기는 하나 대체적인 것은 알 수 있었다. 거기에, “공은 휘는 침(忱), 자는 성지(誠之)로, 성종대왕(成宗大王)의 아홉째 아들이다. 모친 숙의 홍씨(淑儀洪氏)는 동지중추부사 일동(逸童)의 딸로 아들 일곱을 길렀는데, 공은 그 가운데서 다섯째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영민하고 단중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음악과 여색을 즐기지 않는 등 담박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제군(諸君) 중에 가장 어질었던 까닭에 늘 종친부(宗親府), 종부시(宗簿寺), 사옹원(司饔院)의 제조를 겸임하고 또 문소전(文昭殿)을 관리하였다.” 하였다. 대체로 표문에 기록된 것은 이와 같았다.
또 듣기로, 공은 일찌감치 어질다는 명성이 나서 세상의 지목을 받았는데, 마침 간인(奸人)이 공을 주모자라고 지목하는 바람에 예측할 수 없는 화가 닥치게 되었다. 공이 이에 상소를 올려 자처할 방도를 청하자, 중묘(中廟)는 별다른 잘못이 없음을 알고 두문불출하기를 명하였다. 공은 마침내 병을 핑계로 은퇴하여 조알(朝謁)도 하지 않고 사람들과 왕래도 하지 않으면서 밤낮으로 술을 제한 없이 마시며 지낸 지 몇 해 만에 결국 술병에 걸려 죽었다. 공의 행적 중에 기록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뿐이고, 나머지는 알아낼 수가 없다.
그러나 나 창협은 삼가 이렇게 생각한다. 성묘(成廟) 때에는 어진 덕을 베풀어 교화가 무르익은 결과 왕손의 훌륭하고 번성함이 거의 《시경(詩經)》 주남(周南)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공은 그러한 때에 태어난 데다 또 그중에 가장 어질었으니, 성품으로 타고나고 몸에 갖추어진 것이 어떠하였으리라는 것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괴이한 것은, 공이 훌륭한 재덕으로 음란하고 포학한 연산군 시절은 잘 겪어 내고 자신을 온전히 보호했으면서, 도리어 어질고 성스러운 중묘 때에는 행로가 막히고 뜻이 꺾인 점이다. 이 또한 어찌 천운이 아니겠는가.
공은 홍치(弘治 명나라 효종(孝宗)의 연호) 기유년(1489, 성종20) 8월 18일에 태어나 가정(嘉靖 명나라 세종(世宗)의 연호) 병술년(1526, 중종21) 5월 25일에 별세하였다.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 강양군부인(江陽郡夫人)은 첨정 증 좌찬성 첩(堞)의 딸로, 공의 무덤과 같은 언덕에 묻히되 봉분을 달리하였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은 안성군(安城君) 수령(壽齡)이고, 차남은 안남군(安南君) 수련(壽鍊)이다. 두 딸 중에 장녀는 군수 김생해(金生海)에게 시집갔는데 그는 바로 창협의 5세조로 아들 셋을 두었고, 차녀는 판관 최충수(崔忠壽)에게 시집가서 아들 다섯과 딸 여섯을 두었다. 안성군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은 평원군(平原君) 일(鎰)이고, 딸은 강윤서(姜胤瑞)에게 시집갔다. 안남군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금천군(錦川君) 보(俌), 능성군(綾城君) 신(伸), 영천군(靈川君) 정(侹), 문성군(文城君) 건(健)이다. 이 밖에도 내외손이 번성하여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고 출가한 자만도 수백 인에 이르니,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영원히 이 나라와 운명을 함께 할 것이다. 여기에서 천도(天道)를 볼 수가 있으니, 아, 거룩하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시경》에선 문왕의 여러 공자들 / 詩歌文王
신실하고 인후함을 노래했는데 / 公子振振
선릉께서 끼치신 경사로운 복 / 宣陵之慶
공의 몸에 특별히 모이었나니 / 鍾于公身
그 덕이 여러 형제 비슷했지만 / 德則似矣
공과 견줄 인물은 없었고말고 / 莫之與倫
어찌 꼭 뿔 하나가 달려 있어야 / 何必一角
비로소 상서로운 기린일쏘냐 / 然後爲麟
다만 수명 장수를 못 누렸으나 / 惟不永年
복을 남겨 후손들 번창하였네 / 昌其後人
무덤 앞에 늘어선 푸른 소나무 / 墓門有松
혹시라도 뉘 감히 꺾지를 마라 / 無或敢薪
이는 공만 위하는 일이 아니고 / 匪直也公
인하신 우리 선릉 위함이거니 / 宣陵之仁


 

[주D-001]선릉(宣陵) : 성종의 능호로, 성종대왕을 가리킨다.

 

景明君墓誌銘 幷序 

 


楊州之南幾里松山之原坐某而向某者。爲故王子景明君之墓。今距其始葬。一百六十有餘年。子孫歲時祭祀不絶。公之五世孫齊顏。以其兄齊夏命。來謂安東金昌協曰。景明君墓。久未有銘。子於吾先祖。亦外晜也。是以爲屬。昌協旣屢辭不獲。就徵其事行。世已遠。家乘缺略。無得以詳焉。唯故參議金公瑛。昌協六世伯祖也。嘗識公墓表。雖略可以見其槩云。公諱忱。字誠之。成宗大王第九子也。母淑儀洪氏。同知中樞府事逸童之女。凡育七男。公爲第五。生而英敏端重。不喜芬華。不嗜聲色。淡如也。於一時諸君中最賢。以故常兼帶宗親府,宗簿寺,司饔院提調。又管文昭殿焉。蓋表文所記者如此。而又聞公夙著賢名。爲世所指目。會奸人以公爲口實。禍且不測。公上疏請自處。中廟知其亡他。命杜門不出。公遂謝病不朝謁。不與人交關。日夜縱飮者數歲。竟病酒以卒。公之事可紀者。止此耳。餘無徵焉。然昌協竊惟成廟之世。仁化薰蒸。麟趾之盛。幾無愧乎周南矣。公於是生而又最賢焉。則其得於性而備於躬者。槩可知矣。余獨怪公之賢。能經歷保全於燕山淫虐之日。而反畏塞夭閼於靖陵仁聖之世。豈亦天哉。公生於弘治己酉八月十八日。卒於嘉靖丙戌五月二十五日。夫人坡平尹氏江陽郡夫人。僉正贈左贊成堞之女。與公葬同原異封。生二男。長安城君壽齡。次安南君壽鍊。二女。長郡守金生海。卽昌協五世祖也。有三男。次判官崔忠壽。有五男六女。安城一男。平原君鎰。一女。姜胤瑞。安南四男。錦川君俌。綾城君伸。靈川君侹。文城君健。內外孫曾。多不能盡錄。而得姓者幾百人。本支百世。將與宗國終始。於是乎可以觀天道矣。嗚呼休哉。銘曰。
詩歌文王。公子振振。宣陵之慶。鍾于公身。德則似矣。莫之與倫。何必一角。然後爲麟。惟不永年。昌其後人。墓門有松。無或敢薪。匪直也公。宣陵之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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