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또 하나의 뿌리

외가

추읍산 2018. 10. 22. 08:00

(1) 27世 父(諱 朝漢) 先妣 豐山洪氏


父 參尉 祐景


흩어진 묘역을 하나로 모셨다(포천시 내촌면)

납골묘를 안내하는 표석은 外祖父 참위 우경(祐景)의 백부(諱 홍철주) 종가 내력이다. 즉 필자의 모계뿌리로 현 종손은 홍병흠이다.


참고할 곳 ⓘ http://blog.daum.net/0113508344/4720136

               http://blog.daum.net/0113508344/4719989 

               ③ http://blog.daum.net/0113508344/4719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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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6世 祖(諱 翼鎭)妣


① 宣人 豊壤趙氏


父 趙康夏


이칭별칭 경평()
유형인물
시대근대/개항기
출생 - 사망1841년(헌종 7) ~ 1892년(고종 29)
성격문신
성별
본관풍양()
대표관직(경력)경기도관찰사, 독판내무부사

정의

1841(헌종 7)∼1892(고종 29). 조선 말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풍양(). 자는 경평(). 현령 조병석()의 아들로, 조영하()의 형(옮긴이 수정)이며, 조대비()의 조카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64년(고종 1)조대비의 일족이 대거 등용될 때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한림권점()·관록()·도당록()에 잇달아 오르고, 1873년 대사성을 거쳐 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조강하를 전라도관찰사에 특별히 임명하였으나, 형 조영하가 대원군을 축출하여 부임하지 않았고,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그 때 진휼을 요청하여 내탕전() 2만 냥과 관서곡(西) 2만 석을 받았으므로 진주에 조강하의 선정비가 세워졌다.

경관()으로 있을 때에는 칭송이 없었지만, 지방관으로서 명성을 날렸다. 내직에 들어와서도 경상도의 환곡()과 통영곡()의 탕감을 직접 주청하기도 하였다. 1885년에 지춘추관사·공조판서·지의금부사가 되었고, 좌우포도대장이 되어 갑신정변 여당을 추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화당으로 지목을 받고 있던 유길준()이 1885년에 귀국하자, 포도대장이 거짓으로 왕명을 빙자하여 유길준을 구금하자 조경하가 민응식()에게 말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고 한규설()의 집에 유폐되도록 하였다. 뒤에 선혜청제조·한성부판윤·예조판서를 지냈고, 1889년 독판내무부사()가 되었다.

참고문헌

  • 『고종실록(高宗實錄)』
  • 『문품안(文品案)』
  • 『매천야록(梅泉野錄)』
  • 『漢城の風雲と名士』(細井肇, 1909)

발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② 宣人 龍仁李氏 
 父 源容, 祖 禹鉉


(3) 25世 曾祖 諱 定圭)妣

① 贈 貞夫人 南陽洪氏


父 淳翊, 祖 판서 鍾英, 증조 목사 증 판서 集圭, 외조 金萬根 본종인


과거 및 취재

홍종영(洪鍾英)

[문과] 헌종(憲宗) 9년(184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5위(15/52)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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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교(可敎)
시호정헌(靖獻)
생년 무신(戊申) 1788년(정조 12)
졸년 정사(丁巳) 1857년(철종 8)
본인본관

남양(南陽[唐])



거주지한성([京])

[이력사항]

선발인원52명 [甲3‧乙7‧丙42]
전력목사(牧使)
타과순조(純祖) 13년(181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2등(二等) 12위

[가족사항]  

[부(父)]
[조부(祖父)]
[증조부(曾祖父)]
성명 : 홍상윤(洪相胤)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태영(李泰永) 
발췌


② 貞夫人 靑海李氏

父 主事 承達 祖 都正 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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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4世(高祖 諱 金炳㴤)妣 |

① 贈 貞敬夫人 平山申氏


父 신석우(愚)

양산 통도사 소장 신석우 영정신석우 글씨

〈신석우 편지〉, 『근묵』, 1862, 초서, 36.4×52.4㎝,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순영(巡營)에 구속된 친구의 일을 부탁하며 보낸 편지.


이칭별칭자 성여(), 호 해장(), 시호 문정()
유형인물
시대조선
출생 - 사망1805년(순조 5) ~ 1865년(고종 2)
성격문신
성별
본관평산()
대표관직(경력)

병조참판, 우승지, 양주목사

1805(순조 5)∼1865(고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평산(). 자는 성여(), 호는 해장(). 신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광손()이고, 아버지는 교리 신재업()이고, 어머니는 좌참찬 김이탁()의 딸이다. 판서 신석희()의 형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28년(순조 28) 진사가 되고 1834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가주서()·예문관검열·사간원정언을 거쳐 1838년(헌종 4) 용강현령()을 지냈으며 그 뒤 부교리·병조참판·우승지·양주목사·대사성·이조참의·승지·이조참판 등을 거쳐 1855년(철종 6)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1857년 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한성부판윤을 거쳐 1859년 형조판서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다. 1860년 동지정사(使)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이 때 청나라에서는 영국·프랑스연합군에게 광동()을 점령당하고 북경()이 함락당한 때였으므로 귀국하여 이러한 사정을 보고하니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1863년에는 「해주기적비()」의 서사관()으로 특별 가자()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정()이다.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헌종실록(憲宗實錄)』
  • 『철종실록(哲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발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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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后配 贈 貞敬夫人 坡平尹氏


과거 및 취재

윤상태(尹相泰)

[진사] 순조(純祖) 19년(181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6위(46/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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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경(來卿)
생년 신해(辛亥) 1791년(정조 15)
본인본관파평(坡平)
거주지한성([京])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유학(幼學)
사마시소답안일부(一賦)
부모구존중시하(重侍下)

[가족사항]  

[출전]

『숭정4기묘식사마방목(崇禎四己卯式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일산古6024-35])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일산古6024-35]‧[古朝26-29-83]

 

[진사] 순조(純祖) 19년(181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6위(46/100)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724C0C1D0DCB1791X0

내경(來卿)

생년

신해(辛亥) 1791년(정조 15)

본인본관

파평(坡平)

거주지

한성([京])

[이력사항]

선발인원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유학(幼學)
사마시소답안일부(一賦)
부모구존

중시하(重侍下)


[가족사항]  

[출전]

『숭정4기묘식사마방목(崇禎四己卯式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일산古6024-35])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일산古6024-35]‧[古朝26-29-83]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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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3配 貞敬夫人 豐川任氏


父 海準, 祖 泰후?, 증조 潤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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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3世 5代祖(諱 逌根)妣 |

① 해주오씨

父 오서상(吳敍常)


인물 생애 정보  

오서상(吳敍常)

1761년(영조 37)∼1800년(정조 24).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돈(士惇).

군수(郡守) 오재유(吳載維)의 아들이다. 오재유(吳載維)가 죽고 후학(後學)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일찍이 박사(博士)의 소질을 갈고 닦았으나 유사(有司)에는 소질이 없었다. 음사(蔭仕)로 돈녕부참봉(敦寧府參奉)에 제수(除授)되어서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옮겼다. 1881년(고종 18, 광서 7) 이조참의에 추증(追贈)되었다.

[참고문헌]

朝鮮人名辭書
日省錄
承政院日記
발췌 :


后配 貞敬夫人여흥민씨

父 廷爀 祖 參奉 百全





(5-2 혈통상) 23세 5代祖(諱 弘根)              


贈貞敬夫人 豊山洪氏



父 縣監 홍희수(洪羲綏)

  

兄弟 홍원모(洪遠謨 홍희수의 子)

[음관] 문음보(文蔭譜)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D64DC6D0BAA8B1784X0

성선(聖先)
생년 갑진(甲辰) 1784년(정조 8)
졸년 경인(庚寅)【補】(주1) 1830년(헌종 1)
본인본관풍산(豊山)

[이력사항]

초직신미(辛未) 정(庭)

[가족사항]  

[부(父)]

성명 : 홍희수(洪羲綏)
관직 : 부사(府使)
관직 : 음관(蔭官)

[조부 - 조부1:부의 부]

성명 : 홍문호(洪文浩)
관직 : 현감(縣監)
관직 : 음관(蔭官)

[증조부 - 증조부1:조부1의 부]

성명 : 홍경보(洪鏡輔)
관직 : 승지(承旨)
과거 : 문과(文科)

[4대 - 4대조1:증조부1의 부]

성명 : 홍중복(洪重福)
관직 : 동돈(同敦)
관직 : 음관(蔭官)

[5대 - 5대조1:4대조1의 부]

성명 : 홍만용(洪萬容)
: 금화(金華)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극현(李克顯)

[생외조부(生外祖父)]

성명 : 조주(曺霔)

[처부(妻父)]

성명 : 심학지(沈學之)


后配 貞敬夫人 海平尹氏


父 윤치익(尹致翼)

[진사] 순조(純祖) 5년(1805) 을축(乙丑)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30위(60/100)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724CE58C775B1775X0

군서(君瑞)
생년 을미(乙未) 1775년(영조 51)
본인본관해평(海平)
거주지한성([京])

[관련정보]

선발인원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유학(幼學)
사마시소답안일시(一詩)
부모구존자시하(慈侍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윤정렬(尹鼎烈)
관직 : 학생(學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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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6) 22世 6代祖妣                                                


① 계통상

    諱 龍淳妣 貞敬夫人 豊山洪氏


홍배호(洪配浩 1725-1792)

호남 암행 어사 심진현(沈晉賢)이 복명(復命)하였는데 서계(書啓)를 올려, 담양 전 부사(潭陽前府使) 홍배호(洪配浩)·전주 전 판관(全州前判官) 이의기(李宜耆)·운봉 현감(雲峰縣監) 한광적(韓光迪)·고산 현감(高山縣監) 이의일(李義逸)은 위법(違法)을 다스리지 않은 죄이고, 좌도 수군 절도사 허임(許任)은 송금(松禁)을 단속하지 못한 잘못이 있다는 것으로써 허임 홍배호, 이의기는 잡아다 심문하여 정죄(定罪)하고, 한광적 이의일은 파출(罷黜)하게 하였다. 그 별단(別單)에 이르기를,


초휘:배한(配漢)
자: 중직(仲直)
쌍백당공 중주(重疇)의 손자이며 선공감 부정 전보(銓輔)의아드님이시다..
생원으로 한산군수.순흥부사.담양부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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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祖 : 홍전보(洪銓輔) 

    1695∼176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정칙(正則) 

    형조참판(刑曹參判) 쌍백당공(雙栢堂公) 중주(重疇)의 장자이며 예조판서 만용(萬容)의 손자이시다.. 

    부사과(副司果)및 종3품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역임..

    발췌 : http://pshong.techus.net/technote7/board.php?board=sukilblogboard&page=9&category=11&sort=rand()&sortorder=1&call=chu_mob&command=body&no=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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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조 홍중주(洪重疇)

    1672년(현종 13)~미상. 조선 중기 유학자. 자는 도진(道陳)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부친은 예조판서(禮曹判書) 홍만용(洪萬容)이다. 형은 홍중기(洪重箕)‧홍중범(洪重範)‧홍중연(洪重衍)‧홍중복(洪重福)이다.

    관직은 양주목사(楊州牧使)‧교하군수(交河郡守)‧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우윤(右尹) 등을 역임하였다.

    1699년(숙종 25) 식년시 진사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과거 시험장에서 김필정(金必禎)과 합심하여 부정을 저지른 일이 드러나 낙제되었다가, 예조참판(禮曹參判) 송창(宋昌)의 상소로 다시 합격되었다. 1725년(영조 1) 군포를 탕감하여 백성들을 진휼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영조가 윤허하였다. 1727년(영조 3) 정언(正言) 신처수(申處洙)의 탄핵으로, 형 홍중범‧홍중복과 함께 사판(仕版)에서 삭제되었다. 1731년(영조 7) 왕릉 제사에서의 노고를 인정받아 가자(加資)되었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肅宗實錄
    英祖實錄
    발췌 : 


    혈통상 6代祖(諱 明淳)妣 平山申氏


    父 신광온제의 子 신재식

    [간략정보]
    • 한자 
    • 분야 
    • 유형 
    • 시대 
    • 성격 
    • 성별 
    • 생년 
    • 몰년 
    • 본관 
    • 저서(작품) 
    • 대표관직(경력) 
    • 집필자 
     
    1770(영조 4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중립(仲立), 호는 취미(翠微). 신사건(申思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소(申韶)이고, 아버지는 판관 신광온(申光蘊)이며, 어머니는 송익흠(宋益欽)의 딸이다.
    1805년(순조 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의 벼슬을 거쳐 1818년 대사간에 이어 강원도관찰사·이조참의를 지내고 1826년 동지사(冬至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이조참판을 지내고 1831년에 부제학으로 재임시 함경도 마천령(摩天嶺) 이북에서의 전화(錢貨) 사용의 금지를 상소하여 실시되었다. 그 뒤 개성유수·지경연사(知經筵事)·공조판서·우빈객(右賓客)을 역임하였다.
    1835년(헌종 1) 대제학에 오르고 다음 해 익종(翼宗)의 태실가봉(胎室加封) 때 제조(提調) 겸 서표관(書標官)이 되고 동지사(冬至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이조판서·실록총재관(實錄摠裁官)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저서로는 『취미집』이 있다.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헌종실록(憲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진신자력(縉紳資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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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 6代祖(諱 祖淳 5대조의 生父)妣 靑陽府夫人 靑松沈氏

    父 沈健之(호조정랑) 

    조부 : 심택현 - 이조판서

    • 조부 : 심구 - 영천군수

    과거 및 취재

    심건지(沈健之)

    [생원] 영조(英祖) 49년(1773) 계사(癸巳)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17위(47/100)

    [가족사항]

    [부(父)]    


     21世 7代祖(諱 履基)妣 貞夫人 靑海李氏        

    이용(李榕 기록탐색) 

    http://tip.daum.net/openknow/70470794  」


    이유민(民) 


    본관은 청해(). 자는 덕유(). 개국공신 이지란()의 후손이며, 이명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문주()이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이핵()이며, 어머니는 이승효()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96년(숙종 2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고, 병조좌랑·부안현감을 거쳐 홍주목사로 있으면서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은 권문세가의 횡포를 조정에 알려 토지를 백성에게 반환하도록 하였다. 충주·의주 등 각 지방관을 지내고, 수원부사가 되어 백성을 잘 다스림으로써 왕으로부터 표리(: 속과 겉의 옷감)가 하사되었다.

    1714년 지평·장령·정언 등을 거쳐 1718년 승지에 이어 형조참의가 되고, 이듬해 여주목사, 뒤에 함경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721년(경종 1) 한성부좌윤, 이어 형조참판이 되었다. 이 해이진유() 등 소론에게 배척을 당하여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1725년(영조 1) 사직을 거쳐 자헌대부()로 병조판서에 특진되고, 이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1728년 공조판서로서 이인좌()의 난의 평정을 도와 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도총관·지의금부사를 지냈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민()이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풍고집(楓皐集)』



    20世 8代祖(諱 達行)妣 贈貞敬夫人 韓山李氏

    父 이집(李 1670년 - 1727년)


    1670(현종 11)∼1727(영조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 호는 한주(). 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증직된 정룡()이며, 어머니는 제주양씨()로 응교를 지낸 만용()의 딸이다. 형인 욱()·택()·협() 등과 아버지에게 배웠다.

    1699년(숙종 25)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703년 음공()으로 목릉침랑()에 제수되었다. 1725년(영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당쟁의 와중에서 청주목사·한성부우윤을 역임한 뒤 이듬해 승정원승지에 제수되었다.

    그 해 5월 황해도관찰사에 전임되어 민생구제에 부단한 노력을 쏟다가 1727년 임지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한주고』 7책 영본()이 있다.

    한주고


    한주고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발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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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김씨 문정공파 세보와 묘표

    ♢ 族譜: | 字 脩甫 | 肅宗  丙戌 12 月 11 生~ 戊午 6 月 29 日 卒, 贈 左贊成

       配贈貞敬夫人 韓山李氏 丙戌生 丁卯 10 月 9 日 卒

       父 監司潗祖郡守廷龍曾祖文府使穧外祖參判兪櫶本杞溪

       墓 驪州 介軍面 香里 亥坐合窆 誌 兄 渼湖公撰 表 孫男 祖淳撰

     

    墓表의 일부: 始 葬 驪州 草峴里 先塋之次 丁卯 移奉于其北十餘里趨揖山下香谷里亥坐之原 夫人 李氏 韓山牧隱先生之裔 監司諱潗之女

     

    위를 요약하여 풀이하면,

    ○ 族譜: 1706(숙종 32)죽취 김제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시고 1738년(영조 14) 운명하시다. -- 지은(撰) 분은 묘지명은 형 미호 김원행이고 묘표는 손남 김조순이다. 

     

    墓表: 개군면 향리로 이묘할 때의 모습을 옮긴 것으로 이 부분만은 같다. 해제하면, 초장은 여주군 등신면(현 대신면) 초현리 선영이다. 9년 만인 1747년(영조 23)에 한산이씨께서 돌아가셨고 이때 북쪽으로 십 리 거리에 있는 추읍산 아래 향곡리로 이묘하고 할머니와 합장 되시었다. 한산이씨는 목은의 후예로 감사 집의 여식이다.


    한중록을 통해본 당시의 어려운 경제사정

     

    8대조 할아버지를 향리에 모셔놓고 이때부터 이곳은 저희 가문에 선영이 되었습니다.

    7대조 할아버지 형제들은 어디서 사셨을까? 형제분은 모두 세 분인데 김달행의 장자는 저의 7대조 김이기, 차자는 김이중으로 영안 부원군 김조순의 부친이고, 막내는 김이경입니다. 그러면 한중록에 실려 있는 당시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어머니는 형제가 세 분인데 그 중 일찍 홀어머니가 되신 김생원댁(김달행의 부인)을 어머니께서 극진히 섬기셨다. 이모부가 돌아가신 후에는 어머니께서 이종들을 자식같이 불쌍하게 여겨 양식과 옷을 대여 주셔서 배고픔과 추위를 잊게 하였다. 그래서 이종들이 항상, “사람마다 어머니가 한 분이지만 우리는 두 분이시다. 라며 감격하였다. 이종 김이기씨는 신유년 늦봄에 외가에서 혼인을 했는데 그때 어머니도 가 계셨다. 막내 작은 어머니이신 이모 송참판댁 장녀도 외가에 가 계셧다가 그 혼인에 화려한 옷차림으로 참석하였다. 나는 그 때 상복 입을 나이가 되지는 않았다. 흰 옷을 입었더니 어머니는 나에게 , “ 남은 저렇게 곱게 입었는데 너도 저렇게 입어봐라, ” 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 나는 할아버지 상복을 입어야 하니까 다른 아이들과 같이 빛깔있는 옷을 입어서는 안 되지요. ” 나는 문밖에도 나가지 않고 몸가짐을 삼갔다. 지금 생각하니 그런 것도 보통 때 가르친 교훈 때문인 것 같다.


    인용: 지경사 발행, 한중록  PP11~ 12.


    아래 두 곳(①, ②)은 네이버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yugy1000&logNo=60155463887에서 퍼왔다.

    ① 이집(諱 潗)께서는 8대조비 한산이씨의 부친이시다.


    분당 한산이씨 묘역은 저의 근본을 바쳐주고 있다.


    위 자료들은 월봉 블로그의 한주 이집에서 사진찍었다.




    조선 숙종시대 문신인 한주(韓州) 이집(李潗·1670~1727)의 ‘한주집’(한울아카데미 펴냄)이 처음으로 국역돼 출간됐다. 이집은 명문가인 한산 이씨 출신으로 1725년 증광시(增廣試)에서 장원급제해 청주 목사,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나 정치가라기보다 문인에 가까웠다. 시벽(詩癖)이 있어 시 짓기를 즐겼다. 고려 말 문신인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그의 11대 할아버지다. 한주집에는 시가 1064수나 들어 있다. 친구들과 만나 지은 시, 송별시, 죽은 이를 애도하며 지은 만시(輓詩) 등이다. 또 200편에 달하는 서간문은 친지나 친구들의 안부를 묻는 글이 대부분이다. 한주집은 전체 7책 27권 가운데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13권을 뺀 나머지 분량이 연세대 중앙도서관에 귀중본으로 소장돼 있다. 이번에 출간된 한주집은 권오호 한남고전연구소장이 번역을 맡고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해제를 썼다. 전 2권. 14만 5000원.                           


    2014-08-28 16면


    부친 이정용 : http://blog.naver.com/hyugy1000/601554638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