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산 관광지 경내에는 박물관이 있고 위 그림과 같이 공지하였다. 필자는 지인 김흥식 씨와 지난 11일 다녀왔다. 총 9명의 기증품 중에서 선별한 전시에서는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농촌의 생활용품, 교과서 등이 출품되어 1950년 ~ 70년대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로는 저희 집에서 전하여오던 호패 등이 유일하다. 봄기운이 완연한 용문산엔 인적이 뜸해 코로나바이러스가 엄습해오고 있었다.
[기증하신 유물은 언제, 어떻게 소장하게 된 건가요?]
이에 대하여는 저의 뿌리부터 알으셔야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안동김씨 찬성공(贊成公) 김달행(諱 達行 1706 ~1738, 자 脩甫)의 8代 종손입니다. 찬성공께서는 김상헌(諱 尙憲 1570 ~ 1652, 자 叔度, 호 淸陰, 시호 文正)을 파조로 모시고 청음의 셋째 손자이신 김수항(諱 壽恒 1629 ~ 1689, 자 久之, 호 文谷, 시호 文忠) 이하 일묘사충(一廟四忠)의 맥을 이으신 분이십니다. 이는 김수항을 기점으로 대를 이은 김창집(諱 昌集 1648 ~ 1722, 자 汝成, 호 夢窩, 시호 忠獻), 김제겸(諱 濟謙 1680 ~ 1722, 자 必亨, 호 竹醉, 시호 忠愍), 김성행(諱 省行, 1696 ~ 1722, 자 士三, 호 翠柏軒, 시호 忠正)을 가리킵니다.
찬성공(휘 달행)께서는 죽취 김제겸의 넷재 아들이시고 잘 아시는 풍고(楓皐) 김조순(諱 祖淳 1765 ~ 1832 자 士源, 호 楓皐, 시호 忠文)은 찬성공의 손자이십니다. 살피건대 직계와 그 형제분의 역사상 흔적를 생각합니다. 청음 이래 400년이라는 오랜 세월과 전란과 수난 속에서도 대대로 열절하신 나라와 조상님 사랑이 그 밑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증하신 유물이 가문에 관련된 유물이 많으신데 안동김씨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세요?]
세도정치와 관련하여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음 아프지만 전후하여 있는 그대로 시조와 직계 중심으로 핵심(核心)을 요약하겠습니다.
➀ 시조 태사공 김선평(金宣平)
신라 말 고창(古昌: 지금의 안동) 성주(城主)로 권행(權幸, 안동 권씨 시조), 장길(張吉, 안동 장씨 시조)과 더불어 삼태사로 불립니다. 고려 개국공신으로 고창 땅에 침입한 후백제 견훤의 대군을 병산(甁山) 전투에서 대파하여 그 이전까지 수세에 밀리던 왕건(王建, 847년 ~ 918년, 재위: 907년 ~ 918년)을 도와서 고려 개국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➁ 청백리와 충신의 반열(班列)에 오르다.
12세인 서윤공 김번(庶尹公 諱 璠 1479~1544, 자 文瑞, 필자의 16대조)께서 오랜 세거지인 안동을 떠나 서울로 이주하면서 명문가로서의 발판을 마련하여 이른바 장동김씨(壯洞金氏)라는 토대를 닦았습니다. 그 집터인 무속헌(無俗軒 청와대 옆 궁정동 2번지, 현 로마교황청 대사관 자리)과 묘소(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 5)는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며 오늘날에도 많은 탐구자들이 찾는 명소로 되었습니다. 그 후손에서 수많은 일꾼과 충신이 나왔는데 금관자 서 말이라는 말도 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서윤공의 증손자 대에 와서 15세 김상용(金尙容 1561 ~ 1637, 자 景擇, 호 仙源, 시호 文忠)과 김상헌(金尙憲 1570 ~ 1652 자 叔度, 호 淸陰, 시호 文正) 형제는 저희 문중을 조선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도약시킨 기초를 쌓으신 분입니다. 두 분은 병자호란의 국난에서 우국충정 하신 분이십니다.
➂ 文正公派입니다.
- 始祖 金宣平-----------15世 13代祖 상헌尙憲---12代祖 광찬光燦(生父 尙寬)---壽增 壽興(出 伯父 光爀 后) 11代祖 수항壽恒 壽徵 壽應 壽稱 壽能|---10代祖 창집昌集 昌協 昌翕 昌業 昌緝 昌立|---9代祖 제겸濟謙 好謙(出 從叔 昌肅 后)---省行 竣行(出 季父 好謙 后) 元行(出 從叔 崇謙 后) 8代祖 달행達行 坦行 偉行---7代祖 이기履基 履中, 履慶---6代祖 용순龍淳 明淳(出 季父 履慶 后)---5代祖 유근逌根(生父 祖淳)---高祖 병주炳㴤(生父 弘根)---曾祖 정규定圭---祖父 익진翼鎭---父親 조한朝漢---28世 철동澈東(本人)
청음 김상헌의 시호가 文正이며 정점(頂點)으로 그 후손을 문정공파라고 합니다. 필자는 13세손으로 직계 조상님과 그 형제분 가문이 안동김씨를 대표적인 명문가로 인식하게끔 한 구심점이라고 생각합니다.
➃ 기사환국(己巳換局)과 삼수(三壽)의 수난
청음 김상헌은 일곱 분의 손자를 두셨고(위 계통도 참조) 모두 출중하셨는데 위로 김수증(諱 壽增 1624 ~ 1701, 자 延之, 호 谷雲), 김수흥(諱 壽興 1626 ~ 1690, 자 起之, 호 退憂堂, 東郭散人, 시호 文翼), 김수항(諱 壽恒 1629 ~ 1689, 자 久之, 호 文谷, 시호 文忠)]은 숙종(1661 ~1720) 15년, 기사환국[1689년 후궁 소의 장씨(昭儀張氏) 소생 윤(昀)의 원자정호(元子定號) 문제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국(政局)을 장악한 사건을 가리킴]으로 그 화를 피하지 못하시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때 100여 명의 서인이 사형, 유배, 삭탈관직당하였다고 합니다.
이를 후회한 숙종은 1694년[갑술환국이 있었던 해로 서인(노론과 소론)이 집권한 해)] 송시열, 김수흥, 김수항 등을 복권하고 김수증에게 출사를 종용하지만, 김수증은 사화(士禍)로 점철되는 정국에서 오는 환멸과 형제를 잃은 슬픔으로 더는 출사하지 않고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삼일리와 용담리에 펼쳐진 곡운구곡(谷雲九曲)을 터전으로 하시고 문학을 연구하고 자연에 심취하셨는데 78세로 운명하시기까지 30년 가까이 은둔 생활을 하십니다. 곡운께서 별세하신지 300년이 지난 지금 화천군에서는 그 정신을 기리고자 유적지를 복원 중이고 문화유적 답사 코스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⑤ 신임사화(辛壬士禍)는 일묘사충(一廟四忠)을 불러왔다.
1720년 장희빈이 생모(生母)인 원자 윤(昀)이 33세로 숙종의 뒤를 이어 조선 제20대 왕으로 즉위하니 이분이 경종대왕입니다. 경종은 조용하시고 정이 많으시며 형제간에 우애가 깊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병이 많고 후사가 없는 불행하신 분 이 시기도 합니다. 노론은 연잉군(후에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건의하고 실행시켰으며 삼종의 혈맥을 받들게 되지만, 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세제 대리청정 문제로 1721년과 1722년에 걸친 신임사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김수항이 기사환국으로 운명하신지 33년이 흘렀을 때로 대를 이은 3대(창집 - 제겸 - 성행)에 걸쳐 목숨을 잃는 화를 당하셨는데 이는 선대(김수항)까지 4대에 걸친 화(禍)로 명부조(命不祧), 일묘사충(一廟四忠), 4대불천지위(四代不遷之位), 4대충신(四代忠臣)이라는 유일무이한 충절로 기록되지만, 흘린 피가 너무나도 커 슬픈 마음을 금 할 수 없습니다. 이때 참형(斬刑)을 받은 자가 20여 명, 장사(杖死)된 자가 30여 명, 그들 가족으로 교살(絞殺) 된 자가 13명, 유배된 자가 114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 연좌(連坐)된 자가 173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朝鮮王朝) 때는 서로 죽이는 사화(士禍)가 많이 일어났는데 이는 대의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 없는 왕조국가에서 붕당정치(朋黨政治)가 낳은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⑥ [육창(六昌)]
문곡 김수항(11대조)은 육 형제를 두셨는데 모두 당대의 대학자로 칭송되어 이른바 육 창으로 불립니다. 순서에 의해 김창집[金昌集 1648 ~1722 | 자: 여성 (汝成) | 호: 몽와(夢窩) | 시호: 충헌(忠獻)], 김창협[金昌協 1651 ~ 1708 | 자: 중화(仲和) | 호: 농암(農巖), 삼주(三洲) | 시호: 문간(文簡)], 김창흡([金昌翕 1653 ~ 1722 | 자: 자익(子益) | 호: 삼연(三淵) | 시호: 문강(文康)], 김창업[金昌業 1658 ~ 1721 | 자: 대유(大有) | 호: 노가재(老稼齋)], 김창즙[金昌緝 1662 ~ 1713 | 자: 경명(敬明) | 호: 포음(圃陰)] , 김창립([金昌立 1666~ 1683 | 자: 탁이(卓而) | 호: 택재(澤齋)]입니다.
⑦ [석실서원(石室書院)]
김상헌과 김상용의 도덕과 충절을 기리고자 1656년(효종 7)에 건립되고 1663년(현종 4) 석실사(石室祠)라는 편액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저희 문중의 정신적 바탕이며 서울 경기지역 교육의 중심지인 이곳은 조선 후기,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습니다. 진경 문화와 북학사상을 꽃피운 원천으로 나라사랑의 정신이고 횃불입니다.
⑧ [영안부원군 김조순]
한 사람을 평가할 때는 그 생존한 때로 한정하여야 하고 자신이 그때 모습 속으로 빠져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수없이 쏟아지는 오류투성이의 글을 보면서 깊이 있는 연구 없이 진실은 가려지고 세태(世態)에 편승하려는 글이라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영안 부원군 김조순입니다. 그분은 자애(慈愛)로우며 곧고 밝은 분으로 정조의 유탁(遺託)에 의해 충심(忠心)으로 순조를 보필하시고 1832년(순조 32)에 별세하셨습니다. 알지도 못했을 철종 대왕 재위 기간(1849~1863)의 부정적인 의미의 세도정치를 자꾸 김조순과 연결 지어 맑은 모습을 흐리려 함은 생존한 때로 한정하여야 하는 평가 원칙을 무너트리고 이는 진실에 먹칠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 어릴 때부터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성격이 곧고 밝아서 정조의 사랑을 받았다. 왕세자의 보도(輔導 : 보필하여 인도함)를 맡았고, 국구(國舅 : 왕의 장인)가 된 뒤로는 왕을 보필해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요직이 제수될 때마다 사양하는 것으로 보아 권세를 누리기 위해 노력한 인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벽의 당파나 세도의 풍을 형성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척족 세력들이 후일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출처: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그의 평가를 생존한 때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⑨ 김조순의 순조대왕 보필 시(1804년~1832년) 정경(정 2품 이상)급의 문중 출사표]
급제하고 처음 출사한 때 | 1804년(순조 4) ~1832년 순조 32) |
출사한 분 | |
영조 | 김문순 |
정조 | 김이익, 김이교, 김이재, 김이양, 김이도, 김조순, 김희순, 김달순 |
정순왕후 수렴청정할 때 | 김시근 |
김조순의 순조대왕 보필할 때 | 김학순, 김교근, 김유근 |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1804년 이후 매년 단위로 정리하니 평균 2명입니다. 이는 20여 명에 이르는 정경급의 인사 중 일부로 이 숫자가 많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현대의 모든 정직한 기록(인명사전 등)은 위 열거된 분들이 여러 굴곡 속에서도 한결같이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충직 된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하는 타 문중 분들이 있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시대가 총체적인 부정부패에 빠져들었는지? 김조순의 흔적은 어떠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 시대를 세도정치라는 틀에서 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⑩ 세도정치(勢道政治)]
김조순(諱 祖淳) 후대에 전개된 세도정치는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그 기반이 청음(김상헌) 이래 숙종과 영, 정조 대를 거쳐오면서 쌓은 명망(名望)과 순조 임금님을 바로 보필한 충심이 역설적인 기반으로 작용했다면 슬픕니다. 여기에다 유약하고 단명한 임금과 맛 물린 측면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철종 때(재위 1849 ~ 1863) 절정을 이룬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부끄러워합니다. 한 문중으로 나라의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다는 것은 공평하여야 할 인사제도를 무너트렸으며 견제세력이 없는 정권은 결코 정의로울 수 없다는 가리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찬성공(贊成公 金達行)의 8대 종손으로서 머리 숙여 깊은 사죄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부터 정직한 삶 속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또 그렇게 다짐함으로써 국가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⑪ 흥선 대원군 집권 이후의 안동김씨]
많은 사람이 1863년 12월 흥선 대원군이 집권 이후 안동김씨 세도가들을 조정(朝廷)에서 쫓아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크게 다릅니다. 연로(年老)하신 주류(金左根, 金興根)는 떠났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핵심 2세인 김병주(金炳㴤 이조판서), 김병지(金炳地 형조판서), 김병기(金炳冀 좌찬성), 김병시(金炳始 영의정), 김병덕(金炳德 좌의정), 김병학(金炳學 영의정), 김병국(金炳國 영의정), 김병교(金炳喬 이조판서), 김병필(金炳弼 예조판서) 등과 그 후손인 김정규(金定圭), 김석규(金錫圭), 김용규(金用圭), 김용규(金容圭), 김종규(金宗圭) 등은 흥선대원군 집권 시절(炳 자 돌림)과 고종 친정 이후(炳, 圭 자 돌림)에도 계속 출사하여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고종 때 안동김씨 급제자는 36인으로 역대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인재는 계속 등용하려는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의도로 보입니다. 참고 : 고종실록,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비롯한 인명사전 등
맺는 말
조선 제26대 왕이며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 때(1863~1907 재위)부터는 총체적인 격변(激變)으로부터 오는 국란(國亂) 속에서도 우리 민족이 긴 잠에서 깨어나는 여명기(黎明期)이기도 합니다. 숱한 가시길을 걸어오면서 현대의 민주주의가 정착하기까지 저희 직계의 발자취를 따라 중점을 투영(投影) 하였는데 산 역사의 한 장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글을 써 내려옴에 짧은 지식 속에서도 진실을 담으려고 온 힘을 다했습니다. 혹 미비하고 교정할 부분이 있다면 일깨워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역사를 추적함은 곱씹어 얻어지는 교훈이 두고두고 지침으로 삼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천혜의 자연을 보유한 양평군을 정의롭고 풍요로운 삶의 터전으로 만들어 후대에 물려주어야 합니다. 1등 양평을 만드는 일에 우리 모두 힘을 모읍시다. 감사합니다.
[유물을 오랜 시간 보관하면서 얻게 된 보람이라면?]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수난 또한 피할 수 없음이니 그나마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증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네 가지로 요약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모든 국민이 역사를 공유하여야 하는 원칙
둘째, 개인이 소장함으로써 오게 되는 훼손과 분실을 막고
셋째, 과학적으로 관리하여 영구 보존이 가능하며
넷째, 갖고만 있다면 한낮 작은 종이나 물건에 불과하겠지만, 연구하고 발표하여 그 가치가 더욱 빛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 소장해온 유물들을 떠나보내는데, 아쉽지는 않으셨나요?]
해마다 봄, 가을이면 말리고 통풍시키기를 반복해 왔습니다. 관리를 잘해주시고 연구하고 발표하여 아쉬움을 메꾸어 주시기 바랍니다.
[기증하신 유물 중에 가장 아끼는 유물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조선 중후기 역사의 한 이면으로 모두가 소중합니다. 부득이 꼽는다면 청음에 대한 기록, 황산유고와 초고, 그리고 효명세자 편지와 대대로 이어져온 호패, 제기 등입니다.
[평상시에 박물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맡은 바 묵묵히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용문산의 명성 만큼이나 크게 빛나기를 바랍니다.
[유물을 기증할 기관 중에 저희 기관에 기증하시게 된 동기가 있으신지요?]
제가 양평군민의 일원이고 향곡(개군면 향리)이 선영입니다.
[기증유물 중에 안동김씨 세보가 있으신데 간략하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옛날에는 족보를 소장 한다는 게 무척이나 어려웠다고 들었습니다. 뿌리를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열정으로 생각합니다.
[박물관에 바라시는 것이 있다면]
먼저 꾸준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또한, 연구하고 발표하여 친환경 농업을 선도해주시고 역사를 바로 알리는데 보탬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대를 이어 기억하고 소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기증유물이 전시될 예정인데 어떤 느낌이신지?]
눈으로 만의 감상이 아니라 마음에 남는 전시가 되기를 바랍니다.
'안동 김씨 > 贊成公(達行) 가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적산 동록(東麓)의 영원사(영원암)는 가문의 원찰이다 (0) | 2020.04.23 |
---|---|
영원암절(영원사) 스님을 생각합니다. (0) | 2020.04.20 |
신륵사 중수기(神勒寺重修記) (0) | 2020.02.04 |
조선 후기 서울, 도성 안의 겨울나기 (0) | 2019.10.31 |
추석날의 향곡 (0) | 2019.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