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일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리 산 5번지, 석실 묘역에서는 비 피해 복구가 우선 아래쪽에서 있었다. 특히 청음 할아버지 쪽이 컸고 땅이 더 마르기를 기다리면서 아래쪽 쓸린 부분을 정비하였다. 같은 날 소속 휴암공파에서는 죽소(휘 광욱) 할아버지 묘역에서 비석 위쪽 떨어져 나간 부분을 찾기 위한 땅파기 작업이 있었다. 새로 대치한 비석 아래 방치된 원래의 비석은 위 갓 부분이 조각나 보이 지를 않는다. 이 보이 지를 않는 부분을 찾아야 한다. 찾아 복원하기 위함이다. 소속 종인 김성한씨 그리고 김근태 교수와 양경직 씨, 근처 서윤공 묘역 아래서 보아 좌측 내력이고 가지고 온 쇠 꼬챙이로 여러 번 시도 끝에 보람을 찾았다. 역사의 현장은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다. 소속 휴암공파의 열심을 담는다.
원래의 비석은 상돌 우측에 깨어져 부분 없어진채 방치되고 있다.
묘역 중앙 비탈이 시작되는 곳 드디어 찾았다. 두 분의 노고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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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욱
동의어 회이(晦而), 죽소(竹所), 문정(文貞) 다른 표기 언어 金光煜
시대 |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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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80년(선조 13) |
사망 | 1656년(효종 7) |
경력 | 양서관향사(兩西管餉士), 우참찬 |
유형 | 인물 |
직업 | 문신 |
대표작 | 죽소집 |
성별 | 남 |
분야 | 역사/조선시대사 |
본관 | 안동(安東) |
요약 1580(선조 13)∼1656(효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목차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회이(晦而), 호는 죽소(竹所). 김생해(金生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원효(金元孝)이고, 아버지는 형조참판 김상준(金尙寯)이며, 어머니는 이천우(李天祐)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6년 진사시에 제1인으로 합격하고, 같은 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배속되었다가 검열·대교·봉교를 거쳐, 병조좌랑·정언·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611년(광해군 3) 다시 정언이 되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는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에 아버지와 함께 연루되어 국문을 받았으나 곧 풀려났으며, 1617년 폐모논의를 위한 정청(庭請)에도 참가하지 않아 삭직되자 고양(高陽)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 복관되어 고산찰방(高山察訪)·고원군수(高原郡守)·판교(判校)·홍주목사(洪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633년(인조 11) 양서관향사(兩西管餉士)로 국가재정의 확보에 큰 공을 세웠다. 1641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고, 경직에 돌아와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1644년 부승지 겸 세자빈객으로 세자를 모시고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도승지·병조참판·호조참판을 거쳐 경기감사로 나가 수원부사 변사기(邊士紀)의 모역사건을 밝혀냈다.
효종 즉위 후 개성유수에 보임되었으며, 동지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고, 지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를 거쳐 우참찬에 올랐다. 문예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장릉지장(長陵誌狀)』 을 찬하였다. 저서로는 『죽소집(竹所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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