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庶尹公의 후예

김상용 비명

추읍산 2018. 6. 14. 13:46

김상용

[]

원본글 출처김상용의 비명()
저자김상헌()
이명

: 경택()
: 선원(), 풍계()


원전서지국조인물고 권62 노난시 입절 정토인()

나의 백씨() 의정공()은 휘()가 상용()이고, 자()는 경택()이며, 스스로 호()를 선원()이라고 하고, 또는 호()를 풍계()라고 한다. 선군(, 김극효())이 좌의정() 임당() 정 부군(, 정유길())의 집안에 장가들어서 다섯 장부()의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가 바로 공이다.

병자호란()을 당하여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는데, 적병()이 이미 물러나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공의 절개를 마땅히 제일 먼저 표창하여 기록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대신()과 예관()이 나라 사람들의 말을 가지고 상소하고 간청하여, 드디어 그 가문()에 ‘충신()의 집안’이라고 정문()을 세웠다. 나라 사람들이 또 모두 이르기를, “선군()은 훌륭한 아들을 두었고, 외가[]는 택상()이 있으니, 그 죽음을 슬픔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영광으로 여길 것이다.”라고 하므로, 불초() 아우 김상헌()은 이것을 듣고서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아! 백씨()는 어찌하여 태평성대에 태어나시지 못하였으며 어찌하여 백세()의 수명()을 누리시지 못하였으며 어찌하여 수족()이 훼상()하지 않았는지 이불을 열어 보라는 일을 명하시지 못하고서 도리어 자신의 불행으로써 나라의 영광을 삼으신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성현()이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살신성인()한다.’고 하였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자기의 도()를 다하다가 죽는다는 것은 바로 천명()이다.”라고 하였다. 만약 이와 같다면, 백씨의 죽음에 대하여 내가 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선군()은 성()이 김씨()로 휘()가 극효()이고, 지위는 돈령부 도정()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고려() 태사()를 지낸 휘() 선평()의 후손이다. 그 선고()는 신천 군수()를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된 부군() 휘 생해()이다. 그 조부[]는 평양 서윤()을 지내고 이조 판서() 대제학()에 추증된 부군 휘 번()이다. 그 증조부[]는 사헌부 장령() 부군 휘 영수()이다. 판서(, 김번()) 이하의 증직()은 모두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비()는 정경 부인()에 증봉()되었는데, 바로 임당 부군(, 정유길)의 제3녀이다. 임당 부군은 휘가 유길()인데, 덕업()과 문장()이 한 시대에 추앙받았으므로 세상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호()를 일컬었다.

공은 가정() 신유년(, 1561년 명종 16년) 5월 9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화순()하며, 유희()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나이 13세에 선군()을 따라서 고을의 청사()에 있었는데, 명령이 있지 아니하면 문득 아문()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는 나머지 여가에는 한 서실()에 앉아서 해가 질 때까지 책을 읽으며 절대로 자제()로서의 허물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노성()한 전형()을 칭찬하였다. 임오년(, 1582년 선조 15년) 사마시()에 높은 등수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서 생활하였는데, 사우()들의 중하게 대우()하는 바가 되었다. 여러 유생()들이 항소()하여 국가에 대사()를 논박()할 때에, 공을 추대하여 우두머리로 삼았다. 전조()에서 공을 천거하여 선릉 참봉()을 제수()하였는데, 어버이가 늙었기 때문에 억지로 취임하였으나, 그가 즐겨한 바는 아니었다.

경인년(, 1590년 선조 23년) 별시() 문과()에 뽑혀서 분관(, 급제 후 승문원()ㆍ성균관()ㆍ교서관()에 배치시키던 것)하여 권지()로 실무를 익히게 하기 이전에 바로 추천되어 사국()에 들어가서 검열()이 되었는데, 이윽고 상피() 때문에 서반(西)에 서용()되었다.

임진년(, 1592년 선조 25년) 체찰사(使) 정철()공과 검찰사(使) 김찬()공이 벽소()하여 종사관()으로 삼았으므로, 오랫동안 막부()에 머물면서 자문()하여 의논한 바가 많았다. 형조()ㆍ병조() 2조()의 좌랑(), 사간원 정언(), 성균관 전적 겸 사관 기주()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공이 외방에 있었기 때문에 개차()되었다. 곧 이조 좌랑 지제교 겸 세자 사서()에 임명되었으나, 부인의 상()으로써 병들어서 사면하였다. 이조 정랑()에 승진되었으나, 사건에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여러 번 옮겨서 홍문관 수찬(), 성균관 직강()을 역임하고, 다시 부응교 겸 세자 필선()이 되었다. 또 도원수() 권율()과 접반사(使) 김수()ㆍ장운익()의 종사관이 되어서 호남()과 영남()의 군중()을 왕래하였다. 명()나라의 감군() 진효()가 오자 용만관()에 문례()하였는데, 도로()와 전마()의 사이에서 괴로움이 대단히 많았지만 일찍이 사피()하지 아니하였다.

무술년(, 1598년 선조 31년)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는데, 품계()를 뛰어넘어 초탁()한 것은 대개 특이한 은전()이었다. 인척[]으로서 먼저 요우()의 자리에 재직()한 자가 있어, 사임을 고하여 체임()을 허락하였는데, 다시 승지()가 되었다. 이해 겨울에 북경[]에 가서 황제의 성절()을 하례()하고 돌아와서 기한을 넘겼다고 논하여 죄에 연좌되어 파면되었으나, 얼마 안되어 곧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두 해 동안에 14번 자리를 옮겼지만, 후사(, 승정원)와 금성(, 대간())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였는데, 이것은 임금의 은총과 대우()가 매우 우악()하였기 때문이다.

신축년(, 1601년 선조 34년) 가을에 대사간()으로서 입대()하여, ‘언론()이 넓지 않고 궁위(, 궁궐)가 엄숙하지 않다’고 지극하게 논하니, 임금이 묻기를, “그대가 엄숙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일인지를 숨기지 말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여러 소인배()들이 궁액()과 교통하고 나쁜 짓을 저질렀던 사건들을 모두 폭로하니, 임금이 대답하지 아니하고 안색이 아주 변하였는데, 대신() 이하가 모골()이 송연()하여 목을 움츠리지 아니하는 자가 없었다. 마침 고() 상신() 심희수()공과 종백(, 예조 판서) 이정귀()공이 아뢰기를, “이 일은 신() 등도 또한 들었지만, 두렵고 무서워서 감히 말하지 못하였으나, 아무개가 홀로 이것을 다 말하였으니, 이것은 ‘아침 햇살 속에 새의 울음소리[]’라고 할 만합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비로소 공을 위로하는 유시()를 내리고 곧 조회를 파하였다. 뒤에 들으니, 임금이 노하여 여러 빈어()들이 후정()에서 몰래 남을 헐뜯는 말을 많이 하는 자를 책문()하였다고 한다. 또 공이 동료()와 함께 차자()를 갖추어 청하기를, “관노()를 제어하고 공헌()을 절약하여서 민폐()를 없애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옳겠다고 답하였으나, 이때부터 임금의 뜻을 거슬러서 간장(, 대사간())에서 승지()와 대사성()으로 옮겼고 또 병조()로 옮겼으나, 모두 오래지 않아 사임하여 교체()되었다.

또 얼신() 유영경()이 몰래 (영창 대군()을) 지원한다고 빙자하여 정권[]을 잡고 임금에게 아첨하기를 구하면서 옛날 관함()의 사람들을 몰아내고자 하여, 먼저 공을 정주 목사(使)에 제수하였다. 그때에 공은 장자()가 죽어서 장례도 치르지 못하였는데, 핍박당하고 내쫓겨서 관()에 부임하였다. 마침 명나라 조사(使) 고천준()ㆍ최정건()이 이르렀는데, 그 욕심()이 너무나 많았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힘이 다하여 흩어져서 도망갈 생각을 하였는데, 공이 정성을 다하여 이것을 처리하여 마침내 아무런 일이 없었다. 3년 만에 정사()가 이루어지니, 상하()가 편안하고 공사()가 풍족하였으며, 옥송()이 정체되지 아니하고 유풍()이 크게 변하였으며, 관전(, 여관()과 역전())이 수리되고 정비되어 빈려()가 돌아가게 되었으며, 구혁(, 봇도랑)이 통하고 저축한 곡식이 많아져서 홍수와 가뭄에 대비하였으므로, 백성들에게 옛날의 병폐()가 없어졌다. 이러한 일이 알려져서 여러 번 나라의 포상()을 받았다. 직질()이 만료되어 장차 돌아오려고 하는데, 고을의 노소() 사람들이 수레를 둘러싸고 가지 못하도록 만류하다가 이미 떠나자 공을 추모()하여 비()를 세웠다.

상주 목사(使)에 제수되어 2년 만에 그만두고 돌아오자 또 안변 부사(使)에 제수되었는데, 이때에 얼신()이 아직도 (조정()에) 있으면서 종전의 원한 갚기를 그만두지 아니하였으므로, 달포를 넘기지도 못하고 갑자기 외방으로 내보내어 반드시 변방()의 관새()나 영해()의 먼 땅에다 공을 두었으므로, 양친()이 서로 상심()하고 빈객()이 번갈아 위로하였으나, 공은 불평()의 기미()를 보이지 아니하고 명령이 내리자 즉시 길을 떠났는데, 그 치적()은 정주()와 같았다. 그러나 공이 만나는 백성들의 풍속과 아전의 풍속이 각각 바로잡기가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을 한결같이 관대하고 분명하고 청렴하고 은혜로운 태도로써 이것을 조정하여, 강한 것과 부드러운 것을 서로 조화시켜서 마침내 훌륭한 정치를 이루었으므로, 백성들과 뒤에 와서 정사()를 계승하는 자들이 오래도록 더욱 공을 칭송()하였다.

선조[]가 승하하자 공을 불러서 명정()을 전서()로써 쓰게 하였다. 첨지중추부사()ㆍ형조 참의()에 임명되고, 산릉()의 일을 끝마치자 품계()를 올려서 한성 우윤(), 호조 참판(), 부총관()을 역임하고,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1609년 광해군 원년)에 (명나라) 웅화()와 유용() 두 사람이 황제()의 조사(使)로서 왔는데, 공이 주선()하는 것이 법도()에 맞았으므로, 2품계를 초탁()하여 한성 판윤 겸 의금부 춘추관 총관()에 임명되었다. 다시 대사헌()이 되어서 ‘궁중()에 좌도()가 점차 성행()하므로, 빨리 엄하게 배척함을 보여서 본원()을 단정()하게 하여야 한다’고 논하였다. 교체되어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목릉(, 선조()의 능)의 산역()을 감독하여 완성하자 한 품계를 올렸다. 여러 번 옮겨서 형조 판서(), 지중추부사(), 한성 판윤()을 역임하였다. 박응서()의 옥사()에 죄없이 끌어들임을 당하여 심문을 받았으나 즉시 석방되었는데, 간당()들이 반드시 해치고자 하였으나, 공이 조정에 있을 때에 본래 성실()한 장자()로 신임하였던 터라 끝내 그 간계()를 써먹지 못하였다. 얼마 안되어 태묘()에 일이 있어 그 노고를 서용()하여 직질()을 승진시켰다.

정사년(, 1617년 광해군 9년) 간신() 이이첨() 등이 모후(, 인목 대비())를 폐위할 것을 청하자 온 조정이 이에 휩쓸렸으나, 공은 이 일에 간여하지 않았는데, 간당이 언로()를 부추겨서 공을 귀양 보내고 임금에게 보고하지 아니하였다. 유랑 생활[羿]1) 하면서 지낸 것이 7년이란 오랜 세월에 이르렀다. 무오년(, 1618년 광해군 10년) 선군()이 돌아가시고 신유년(, 1621년 광해군 13년) 대부인(, 어머니)이 세상을 떠나셨는데, 공은 거듭 고난()을 당하여 슬픔을 머금고 견책()을 기다렸는데, 계해년(, 1623년 광해군 15년) 국가에서 반정(, 인조 반정)이 일어났다. 이듬해 갑자년(, 1624년 인조 2년) 비로소 외방()에 제수하고 판돈령부사()에 임명되었다. 이괄()의 반란이 일어나자, 임금이 공주()로 거둥할 때에 공은 검찰사(使)로서 먼저 가서 임금을 공돈()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게 하고,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수송하여 군사를 일으키는 일을 도왔는데, 반란군이 평정되자 어가()를 호종()하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원임()과 겸직()을 아울러 전에와 같이하고 동지성균관사()를 더 겸임하였다. 사명(使)을 받아 모문룡()의 군영()으로 가서 (가도()에 있는) 요동()의 백성들을 처리하는 방도를 의논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문서()를 (삼남 지방에) 잘못 보낸 죄에 연좌되어 견책()당하여 파면되었다가 이윽고 판돈령부사가 되었다. 명나라 왕민정()과 호양보() 두 귀인()이 조사(使)로 왔으므로, 공은 원접사(使)가 되어 알맞게 수응()하여 국가의 체통을 세웠으므로 유익한 바가 아주 많았다. 예조 판서()로 옮겼는데, 다시 한 품계를 올려 경연 빈객 총관()을 더 겸임하게 하였다. 임금이 사친(, 인헌 왕후())의 상사()를 당하자 여러 신하들은 간쟁()하여 3년 상례()를 치루려 하지 아니하였으나, 임금이 예관()을 꾸짖고 협박하여 상복()을 바치도록 하니, 언로()에서 인책()하였으므로, 공은 스스로 면직()하여 서반(西)에 서용되었다가 다시 지중추부사() 참찬()으로 옮겼는데, 이미 장례()를 치르고서 은전()을 내리어 보국 숭록대부(祿)의 품계를 더하여 삼공(, 삼정승)의 반열에 나란히 하였으나, 공부(, 의정부())에 서임되어 근무하는 것이 불편하였으므로, 참찬을 사임하고 다시 판돈령부사가 되었으며, 또 판중추부사 겸 예조 판서()로 개차()되어 다른 관직을 옛날과 같이 겸임하였다.

정묘년(, 1627년 인조 5년)에 서쪽 오랑캐(후금())가 깊숙이 침입하였으므로, 임금이 강화[]로 피난하면서 공으로 하여금 도성()에 남아서 수습하게 하니, 그 호령()이 분명하여 성중()이 숙연()하였다. 오랑캐가 물러가고 어가()가 돌아왔을 적에 종묘()에 강신제[]를 행하는 것을 도왔다. 관직을 옮겨서 이조 판서(), 판의금부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가을에 병으로 사임하였다가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경오년(, 1630년 인조 8년)에 이르러 기로사()에 들어가자 나이를 핑계대고 치사()하였는데, 임금이 온지()를 내려서 머물도록 만류하였고, 여러 번 소장()을 올렸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얼마 안되어 장릉(, 원종()의 능)을 보수()하지 않았다고 하여 왕릉()을 소홀히 한 죄에 연좌되어 견책당하여 파면되었는데, 그때에 임금이 특별히 격분(忿)한 감정이 있어서이며, 실지로는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곧 예조 판서 겸 판의금부사()에 서용되었는데, 다시 치사()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공은 평소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가슴이 답답하여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지 못하고 힘써 사양하여 관직()에서 해임되었는데,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언관() 가운데 사건을 논하다가 죄를 얻은 자가 있었는데, 임금의 뜻은 오래도록 그를 금고()시키고자 하였으나 공이 갑자기 그를 현직()에 후보자로서 추천하여 임금의 뜻을 거슬렸기 때문에 연좌당하여 파면되었다.

임신년(, 1632년 인조 10년) 우의정()에 임명되었는데, 외할아버지[] 고() 상신() 정유길()공과 사위 장유()와 불초() (김상헌이) 한집안에서 4인이 동시에 (정승 자리에) 매복(, 일일이 점침)되었으므로, 공이 더욱 두려워하여 관직에 나아가기를 주저하고 사피()하였다. 마침 변고()를 아뢰는 사건이 있어서 대신()들을 재촉하여 불렀으므로, 공은 부득이하여 이에 조정에 나아갔으나, 공은 집안이 너무 번창한 것[滿]을 깊이 경계하여 오래도록 정승의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서 전후하여 황급히 청하였으나, 임금이 급히 근신()을 보내어 돈면(, 정성을 들여 힘씀)하였으므로, 29번이나 소장()을 올려서야 임금이 허락하여 판돈령부사가 되었다.

갑술년(, 1634년 인조 12년) 다시 우의정[]으로 들어갔는데,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다음 해 6월에 다시 사임하여, 임금의 윤허()를 얻어서 영돈령부사()가 되었다. 그때에 유백증()과 나만갑() 등이 상소()하여 말한 내용이 기휘()에 저촉된 것이 많았으며, 유백증은 대신()들을 더욱 비난하였으므로, 임금이 크게 노하여 엄하게 견책하였는데, 공은 그들을 너그럽게 용서해주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혹자가 풍자()하여 말하기를, “이들은 시세()의 변화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라고 하였으나, 공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삼공()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정에 과실()이 있는데, 어찌 입을 다물고 나라의 은혜()를 저버릴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고, 끝내 이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났다. 얼마 안되어 조경()의 사건이 일어나자, 임금이 정위(, 형옥()을 맡은 벼슬)로 하여금 심문하게 하려고 하여 여러 대신()들에게 물으므로, 공은 그들을 추핵()하기를 청하였고 언로()에서는 불가하다고 말하였는데, 임금이 도리어 ‘전의 의논이 시비()를 가리는 데 주장이 없으면서 말들만 분분()하다.’고 비난하였다. 공이 오히려 기뻐하지 아니하고 다시 치사()하기를 청하는 소장을 세 번 올렸으나, 허락하지 아니하고 특별히 온지()를 내려서 후회하는 뜻을 나타내었다. 곧 공이 현질()로써 고생한다는 말을 듣고 어의()와 내약()을 은사()한 것이 길에 연달았었다.

오랑캐의 세력이 날로 위급해지자, 임금이 고() 상신() 윤방()에게 명령하여 종묘사직()을 받들게 하고, 검찰사(使) 김경징()과 (부검찰사(使)) 이민구() 등에게 후궁()과 원손()과 왕자()들을 호위하게 하고, 또 여러 신하들 가운데 늙어서 병든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강화도로 가도록 하였는데, 공도 또한 따라갔다. 이날 저녁에 어가()가 계속해 출발하여 숭례문(, 남대문())에 이르렀는데, 오랑캐의 기병()이 이미 서교(西)에 박두()하였기 때문에 다급한 나머지 남한산성()으로 행차하였다. 강화도로 가는 길은 마침내 끊어져서 통하지 못하였다. 적병()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군사를 나누어서 강화도를 침입할 계획을 하였다. 이듬해 정축년(, 1637년 인조 15년) 오랑캐 군주(, 청 태종())가 스스로 대군()을 거느리고 20만 명이라고 일컬었다. 성중()이 더욱 위급하니, 호서(西) 지방의 군사들이 먼저 이르렀으나, 적병을 만나서 궤멸()되었다. 여러 도()의 근왕() 군사들도 모두 두려워하여 겁을 내어서 즐겨 전진()하지 아니하였다. 검찰사(김경징)와 강화 유수() 장신() 등은 천험()이 있는 것을 믿고 군사()를 다스리지 않으며 방자하여 자신만 편안하게 지내려 하므로, 공이 분연()히 이르기를, “임금의 행재소()가 포위를 당한 날이 오래 되어서 위급함이 조석()에 달려 있다. 혹자는 말하기를, ‘정세규()가 패배하여 죽었고, 호서(西) 지방에는 군사()를 주관할 자가 없다’고 하는데, 강화도에는 검찰사 1인이면 족하니, 부사(使)는 마땅히 호서 지방으로 가서 흩어진 군사를 거두고 의병()을 규합하여, 호남() 군사로 배후()에 있는 자들을 독려해 군부()의 위급함을 가서 구원해야 하므로, 시기()를 늦출 수가 없다.”고 하니, (부검찰사) 이민구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실행하지는 아니하였다. 공이 또 이르기를, “남한산성의 소식이 불통()하니, 상금()을 후하게 해서 군사를 모집하여 그곳의 안부를 알아봐야 할텐데 열 번을 간다면 반드시 한 번쯤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의 도리로서 어찌 손발을 묶고서 가만히 앉아서만 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나, 김경징() 등은 서로 더불어 이 말을 비난하고, 마침내 아무 것도 시행한 바가 없었다. 하루 저녁에 긴급 소식[]이 다시 이르자, 김경징 등이 비로소 두려워하였는데, 한밤중에 외롭게 남게 되자 겁을 내고 우왕좌왕하면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다가, 적선()을 멀리서 바라보고 한꺼번에 도망가버리니, 그가 부탁()받은 바와 아울러 그 노모()를 호구()에 맡겨서 내버리는 것과 같았다. 적병이 성()의 아래에 이르므로, 공은 일이 구제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그 입었던 융의(, 군복의 하나)를 벗어 겸인(, 시중드는 하인())에게 맡기고는 남쪽 성벽()의 문루()에 올라가서 가운데에 화약()을 쌓아놓고 그 위에 올라앉은 다음에 불을 질러서 스스로 불타서 죽었는데, 손자 한 사람과 종 한 사람도 모두 따라서 죽었다. 마치 빠른 우뢰()와 벽력() 같은 소리가 천지()를 찢었으며, 지붕의 기와와 서까래ㆍ기둥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이것이 실로 (정축년) 정월 22일이었다.

그때에 공의 두 아들은 하나는 남한산성에서 임금을 호종()하고 있었고 하나는 동도()에서 관직()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병이 물러가자 유족들이 분주히 남은 시체를 찾았으나 수습할 수가 없었으므로, 이에 공의 남긴 옷을 가지고 초혼[]하였다. 4월 모일()에 선영()이 있는 양주() 동면() 도혈리()의 건좌()인 묘원에 장사지냈는데, 공의 수명은 77세였다.

부인()은 영가 권씨()로 공조 좌랑() 권개()의 따님이고, 영의정() 권철()의 손녀이다. 부인은 순수한 덕()과 아름다운 행실로써 상하의 사람과 화합하였으므로, 내외의 친족들이 즐거워하여 사모하여 따랐는데, 나이 33세에 병()으로 졸()하여 강화도 진강리()에 장사지냈다가 신사년(, 1641년 인조 19년) 2월에 공의 유명()으로써 옮겨서 합장()하였다. 공은 생시()에 스스로 자기의 지문()을 짓고, 아울러 부인 묘()의 지문도 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것을 사용하였다.

3남 3녀를 두어, 장자() 김광형()은 순행()이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현령() 이헌심()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김수창()이고 현감()이다. 차자()는 김광환()으로, 상주 목사(使)이며, 승지() 이철()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김수홍()이고 진사()이다. 삼자()는 김광현()으로, 호조 참판()이며, 진사() 심율()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5녀를 낳았는데, 그 아들에 김수인()은 현령()이고, 김수민()과 김수빈()은 모두 학문에 전념 중이며, 시직() 조석형(), 감역() 윤운거(), 진사() 이정기(), 세마() 강문명(), 사인() 이회()는 그 사위들이다. 장녀()는 사어() 남호학()에게 시집가서 1남 3녀를 두어, 아들 남노성()은 좌랑()이며, 참봉() 박승건(), 사인() 신명규()가 그 사위들이고, 막내딸은 아직 시집가지 아니하였다. 차녀()는 우의정() 장유()에게 시집가서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장선징()이고, 딸은 봉림 대군(, 뒷날의 효종())의 부인()이 되었다. 삼녀()는 군수() 이이성()에게 시집가서 4녀를 낳았는데, 사인() 윤필은(), 김식()이 그 사위들이고, 나머지 딸들은 아직 시집가지 아니하였다. 측실()에서도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 김광소()는 현감()으로 진무 공신()이 되었으며, 2남 3녀를 낳았는데, 그 장남 김수전()은 바로 공을 따라서 순사()한 자이고, 차자()는 김수견()이며, 종실() 언흥령() 이순선(), 장경()이 그 사위들이고, 그 나머지는 아직 시집가지 아니하였다. (측실()의) 4녀 중에서 두 사람은 판서() 한인급(), 군수() 이석망()의 첩()이 되었으며, 두 사람은 현감() 이응인()과 성후룡()의 처()가 되었다. 안팎의 증손() 남녀()가 모두 30여 인이다.

공은 사람됨이 돈후()하고 겸손 신중하며, 용모()가 온화하고 청수()하여 겉모습과 속마음이 하나같았으므로 공을 쳐다보면 그가 장자()의 덕()을 가진 군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버이를 섬길 때에 일찍이 (그 뜻을) 거스리는 얼굴 표정을 본 적이 없었고, 여러 동생들에게 우애()하는 것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였으며, 가속()들 어거하기를 은혜롭게 하면서 법도가 있었으므로, 문정() 안에 온화한 화기()가 넘쳤다. 할머니[]의 질병을 구완할 때에 3개월 동안 옷을 벗지 않고 그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자기 몸으로써 어버이를 대신하여 그 수고를 잊어버릴 정도였으므로 병환이 낫기에 이르렀다. 두 동생이 먼저 죽었는데, 어버이의 마음을 위로()하여 상사()를 처리하는 것은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가기가 어려웠던 바가 많았다. 자녀()들을 가르치고 훈계할 적에 하나같이 법도를 따르게 하여 부화()하고 사치()하는 습관을 깊이 경계하였으며, 오륜가()를 지어서 항상 이것을 외우게 하여 마음에 깨우치도록 하였다.

어려서 이경(, ≪시경()≫과 ≪서경()≫)과 사자(, 사서())를 읽어서 대의()를 통하였고, 자라면서 고문()과 시()를 외조부(정유길())에게서 배웠으며, ≪역경()≫을 박수() 공에게 배웠고, ≪춘추좌씨전()≫을 윤기() 공에게 배웠으며, 우계() 성혼() 선생의 문하()에 왕래하였고, 문성공() 율곡() 이이()를 흠모하였으므로, 사도()가 있는 사람이라고 추앙되어 교유()한 사람들이 모두 한 시대의 이름난 명인()이었는데, 문충공() 이항복(), 문정공() 신흠(), 상국() 오윤겸(), 문충공() 이정귀(), 문민공() 황신(), 문숙공() 정엽()과 같은 이가 가장 깊이 사귀던 분들이었다.

널리 사랑하고 포용하여 절대로 남과 경계를 두지 아니하였으나, 심중()은 실로 의연()하여 결코 빼앗을 수 없는 지조가 있어서 관직()을 사양하거나 받을 적에는 마음에 맞아야 행동하였으며,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여 명화()와 고적()이 있는 것을 보면 좌우()에 나열해 두고, 그 암자()의 이름을 와유암()이라고 하여 우아한 취미를 그것으로 보상하였는데, 만년()에 풍계()에 수석()을 쌓아놓자, 선군()이 마음으로 이것을 좋아해서 견여(輿)를 타고 날마다 왕래()하니, 공은 문득 진미()를 고루 골라서 바치려고 꾀하였고, 경사스러운 날이나 수연()의 시기에는 널리 빈객()을 맞아서 아래로 영공(, 악공())과 기악()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어버이의 하고 싶은 뜻을 이루도록 하여, 힘써 즐거움을 다하려고 하였다.

선군()은 덕()을 베풀기를 잘하셨고, 대부인()은 은혜()를 베풀기를 잘하셨으며, 며느리들은 음식상을 차리기를 잘하였고, 자제()들은 (훈도()에) 순치()하기를 잘하였다. 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는 사람이 많아서 어버이를 영광스럽게 하고 잘 봉양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모두 공에게 복을 돌렸다. 공은 봉록(祿)의 절반이 고아()ㆍ과부()와 빈궁()한 집에 들여보냈는데, 집안사람 가운데 곤궁()한 사람이 있어도 그것은 빌려 주는 것이라면서 구휼()하지 아니하였으며, 세상 풍속의 사치()와 검소()가 모두 예절()에 맞지 아니한 것을 걱정하여, 제사 의식[]을 지어 가훈()으로 삼았고, 방안의 모퉁이에 고금()의 격언()을 써 붙여서 항상 감계()하면서 살았다. 한집안 안의 서적()과 궤안()에서부터 정원()의 화훼()와 수목()에 이르기까지 나란하게 정리()하였다. 지팡이를 짚고 산골짜기의 수풀 사이를 걸으면서 소요()하고 자적()하였으며, 휴가()에는 조용하게 앉아서 책을 보면서 향()을 피우고 차()를 달였는데, 대저 성기(, 소리와 기생())와 박잡()한 놀이를 하지 않았다. 문()은 사장()의 통달을 취하였고, 시()에는 청아()하고 풍성한 운치를 숭상하였으며, 글씨는 왕희지()ㆍ왕헌지()를 본받았고 전서()는 여러 서체()를 갖추었으나, 모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유고(稿) 2권()을 집안에 간직해 두었다.

공이 홍명구()와 윤계()를 낭서() 중에서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반드시 입신()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김경징()은 끝내 가정과 자손을 보존하지 못하였으니, 모두 그 말과 같았던 것이다. 공이 강화도에 있을 적에 혹자가 ‘배를 준비하여 위급할 때에 대비하자’고 권유하였으나, 공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주상()이 포위 가운데에 계시어 그 안위()를 알 수 없는데다가 종묘사직()과 원손()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만일 불행한 일이 닥치면 죽음만이 있을 뿐인데, 어찌 구차히 살기를 바라겠는가?”라고 하니, 이때부터 아무도 감히 다시 말하는 자가 없었다.

평생 남보다 지나치게 모난 행동과 비뚤어진 행적이 없었으며, 특이한 의론을 제기하여 스스로 즐겨하지도 아니하였고, 억지로 감정을 억눌러서 명예를 구하지도 아니하였다. 통달함을 격을 때는 격리()될 것이라 보았고 격리됨을 격을 때는 통달할 것이라 보았으니, 그 도량()은 깊디깊었고 그 마음은 성실하여 변함이 없어, 두 번이나 정승으로 들어가도 좋아하지 아니하였고 두 번이나 정승을 떠나도 뉘우치지 아니하였으며, 세 번이나 관직에서 쫓겨났어도 원망하지 아니하였고 세 번이나 치적()이 표창되었어도 뽐내지 아니하였다. 예측하지 않았던 처지에 짓밟혔으나 상도()를 잃지 아니하였고 생각하지도 않는 간련()을 당하였으나 능히 순리대로 버려두었으며, 남을 구제()할 적에 은연중에 덕()을 행하였지 은혜로써 나타내지 아니하였고 일을 도모할 적에 비록 이룩하려고 주장하였으나 반드시 정도()로써 행하였으며, 벼슬길에 나아가더라도 물러날 것을 생각하였고 몸이 귀하게 되더라도 가난한 생활에 능하였다. 이것들은 공이 안으로 쌓은 소양()으로 시용()을 거치면서 사람들이 함께 알고 있는 것이고, 우리 한집안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다.

불초() (김상헌이) 여생()으로써 형님을 능히 받들지 못하고, 이에 도리어 후세에 징거()할 중대한 것으로 위촉을 받으니, 장차 무슨 마음으로 이 글을 짓겠는가? 후세의 군자()들이 나를 믿을는지 알 수 없지만, (군자가) 또한 오로지 나를 알아주면 이것을 알게 될 것이고,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이것을 알지 못할 것이라 생각될 뿐이다. 마침내 이것을 위하여 비명()을 짓는 바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단청()은 색깔을 나타낼 수 있으나 소리는 나타낼 수는 없으며, 음악()은 덕()을 나타낼 수 있으나 모양을 나타낼 수는 없는데, 누가 문자()로 기술하여 금석()에 새기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가? 아! 공의 충성과 절개는 만고()에 걸쳐서 해와 별처럼 빛나리라.

각주

  • 1) 유랑 생활[羿彀] : 중국 신화 전설에 나오는 후예(侯羿)는 활을 잘 쏘는 명궁(名弓)으로서 인간 세상의 재앙(災殃)을 구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와서 인류를 구원하였으나, 천제(天帝)의 미움을 사서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활을 쏘면서 제자들과 세상을 유랑하였다. 세상을 구원하고서도 천제(天帝)의 미움을 사서, 활을 쏘면서 세상을 유랑하던 후예(侯羿)의 방랑 생활을 귀양살이하던 김상용(金尙容)의 야인(野人) 생활과 견주어 말한 것임.

관련이미지 9

      

국조인물고 김상용

 


'안동 김씨 > 庶尹公의 후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창직의 묘표(墓表)  (0) 2018.06.25
김수증의 묘표(墓表)  (0) 2018.06.25
김상준 비명  (0) 2018.06.14
죽소공 묘비석  (0) 2018.06.02
석실묘역 비 피해와 복구  (0) 2018.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