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庶尹公의 후예

김상준 비명

추읍산 2018. 6. 14. 09:29

김상준

[]

원본글 출처김상준의 비명()
저자이명한()
본관안동()
이명 : 여수()
: 휴암()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52 우계ㆍ율곡 종유 친자인[]


황해도 관찰사(使) 김공() 회이(, 김광욱()의 자())씨가 청음() 김 상서(, 김상헌())가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그 선부군() 참판() 휴암공(, 김상준()의 호())의 비명()을 지어달라고 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양가()는 대대로 형제()의 의리가 있으니, 자네가 아니면 나의 선인()의 비명()을 지을 수가 없다.”고 하므로, 나 이명한()이 절을 하고 그 행장을 받았는데, 그 행장에 이르기를, “안동 김씨()는 멀리서부터 계대()를 차례대로 이어왔는데, 신라() 말엽에 고창군()의 성주()로서 고려 태조()를 군사로 도와서 견훤()에게 원수를 갚았으므로 태사()에 봉해졌고, 고창군의 태사묘()에 모시어 제향()하는 분이 있으니, 곧 김선평()으로, 이분이 그 시조[]가 된다.” 고창은 뒤에 안동()이라고 이름을 바꾸었고, 그 자손()들이 드디어 안동()을 관향()으로 삼았다. 태사 이후에 4백여 년 동안 자손들이 연이어 계속 경사()를 물려받았는데, 본조()에 들어와서 휘() 득우()라는 분은 중현 대부() 판전농정()을 지냈으며, 3대()를 지나서 사헌부 장령() 휘 영수()에 이르렀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부()이다. 장령의 아들이 평양 서윤()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휘() 번()이다. 증 이조 판서의 아들이 신천 군수()를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된 김생해()이다. 찬성공(김생해)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아들이 군기시 정()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휘 원효()로서, 완산 이씨() 승열()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그녀는 공정 대왕(, 태종())의 아들 근녕군()의 후손()이다. 가정() 신유년(, 1561년 명종 16년) 5월 11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상준()이고, 자는 여수()이고, 휴암()이 그의 호()이다. 어려서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아서 집밖을 나가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학업을 닦았다. 조금 자라서 학궁()에서 공부하였는데, 시험을 보면 번번이 일등을 차지하였으므로, 그 제배()들이 감히 경쟁할 생각을 못하였다. 젊은 나이에 발해(, 향시()에 합격한 사람을 중앙에 보내어 과거에 응시케 하는 일)에 제2등으로 천거()되었는데, 문성공() 율곡() 이이() 선생이 문형()을 맡아서 극구 칭찬하였기 때문에 명성()이 이로부터 더욱 드러났다. 임오년(, 1582년 선조 15년) 진사()에 합격하였다. 을유년(, 1585년 선조 18년) 모친상을 당하여 상례()를 잘 치렀다고 소문이 났었다. 복제()를 끝마치고 더욱 열심히 책을 읽었는데, 항상 아침부터 한밤중[]에 이르도록 책을 거두지 아니하였다. 여러 사촌 동생들 가운데 공을 따라서 학업()을 닦던 자들이 잠잘 때에도 공이 글 읽는 소리를 익히 들었기 때문에, 그들도 또한 능히 책을 보지 아니하고서도 그 문자()를 암송할 정도였다.

경인년(, 1590년 선조 23년)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 승문원())에 선임되었다. 임진년(, 1592년 선조 25년) 고() 상신() 심수경() 공이 호서(西) 지방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토벌할 때에 공을 벽소()하여 종사관()으로 삼았는데, 막료()의 계획들이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으므로, 심수경 공이 그를 매우 중하게 여겼다. 계사년(, 1593년 선조 26년) 행재소()에 나아가서 승정원 주서()에 천거되었고, 얼마 안되어 예문관 검열()로 옮겼다가 대교()에 승진되었다. 이때에 왜적들이 바닷가에 주둔하여 웅거()하였는데, 조정()에서 그들이 다시 침범할까봐 걱정하여 장차 다시 명()나라 군사를 요청하려고 사신(使)을 선발하였는데, 사기()가 위급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신으로 가기를 많이 꺼려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누가 갈 만한가?’라고 물었으나, 좌우에서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임금의 뜻이 편치 못하였는데, 공이 바야흐로 (사관()의) 기주()하던 붓을 손에서 놓고 곧 나아가서 하급의 사신[]에 충당해 주기를 자청()하니,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즉시 이것을 허락하였지만, 끝내 사관()의 자리를 채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실지로 가지는 못하였으나, 임금의 뜻은 진실로 이것을 맡기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이듬해 봉교()에 승진되었고, 병조 좌랑()에 옮겨졌다가 예조()로 옮겼으며, 또 그 다음 해 병조()에 돌아왔는데, 언제나 전주()에서 비답()을 내릴 때에 일찍이 공을 내버려두고 다른 사람을 뽑은 적이 없었다. 조정에서 3로()의 어사()를 설치하여 강직()하다고 이름난 사람을 골라서 보낼 때에, 공도 더불어 선임되어 영동() 지방을 안찰()하면서 범법()한 관리를 조사하였는데, 그 관리가 바로 국사()를 맡은 대신()의 사인()이었기 때문에 (그 대신이) 도리어 대간()의 신료들을 사주(使)하여 공을 탄핵하니, 임금이 그 소장()을 살펴본 후 마침내 범법한 관리를 죄주고 공을 바르다고 하였다. 얼마 안되어 영광 군수()에 임명되었는데, (영광은) 본디 형편이 어려운데다가 또 왜적에 가까운 땅이었으므로, ‘쓸 만한 인재()를 골라 자격()을 뛰어넘어 이 자리에 임명해야 한다’고 핑계하여 말하였으나, 실지로는 국사()를 맡은 자가 공을 내친 것이었다. 공은 조금도 그 불평의 기미()를 보이지 아니하고 마음을 다하여 직책을 수행하니, 3년 만에 정사()가 이루어져 강포한 자를 억누르고 간사한 자를 막아서 쌀과 소금이 충실하게 되었으므로, 고과()가 한 도()에서 최고였다.

정유년(, 1597년 선조 30년)에 왜적이 호남() 지방에 핍근하므로, 바닷가에 있는 주()ㆍ군()의 수령관()을 모두 무신() 관리로 바꾸게 되어 공을 방백()의 종사관으로 삼았으며, 또 명나라 마 제독(, 마귀())을 접대하는 사신에 벽소()당하여 그를 따라서 영남() 지방으로 가서, 도산()의 전역()에 항상 군중()에 있었다. 다음 해 군자감 정()으로 승진되었고, 사예()에 개차()되었다가 또 내섬시 정()에 개차되었고, 호남 지방의 조발사(調使)에 충원되어, 명나라 수병()에게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기해년(, 1599년 선조 32년)에 조정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외방으로 나가서 공주 목사(使)가 되어 고을 산성() 수축을 맡았는데, 방백()이 군영()을 개설하여 조세를 받아서 수송()하면서 그 보장()을 좌우의 고을에 교대로 책임지웠기 때문에, 전임자()들이 모두 유능하다고 선발되어 도착하였다가는 번번이 낭패하여 퇴거(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이 도임하여 백성을 안집()시켜 위무()하여 은혜와 사랑이 두루 흡족하니,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떠돌아다니던 백성들이 다 돌아갔고 온갖 폐단도 잘 다스려졌으므로, 체찰사(使)와 관찰사(使)ㆍ대각()의 사자(使)가 서로 잇따라 그 치적()을 상등으로 매기니,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직질()을 올려주고 교서()를 내려 포상()하였다.

임인년(, 1602년 선조 35년) 병()으로써 사직하고 돌아왔는데, 대신()이 공을 천거하여 4도()의 조도사(調使)에 임명되어, 관동()ㆍ영남()ㆍ호남()ㆍ호서(西) 지방을 출입하면서 험조()한 수천 리()의 길을 거쳐 곡식을 수만 석()이나 얻었으므로, 군대의 식량을 넉넉하게 하고 백성들도 고통받지 아니하였다. 3년 만에 돌아왔으나, 곧 해주 목사(使)로 부임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선조가 일찍이 (왜란() 때에) 주필()한 땅이라고 생각하여 반드시 은혜롭고 현명한 공을 (임명하여 보내어) 그 백성들을 위로하고자 하였다. 전주()에서 선임()한 자들이 모두 마땅치 않았으므로, 임금의 뜻은 세 번이나 의망(, 후보자를 추천함)을 바꾸어서 마침내 공을 임명하였다. 친구들은 공이 오래도록 외방()에 나가서 고생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서 병()이라고 관직을 사양하도록 권고하였으나, 공은 걱정스럽게 말하기를, “출사()한 몸이 임금을 섬길 때에 평탄하고 험난한 일이 모두 나의 직분이다.” 하고 힘써 고을에 부임하였다. 해주()의 전정()이 오래도록 기강()을 세우지 못하여 관리들이 상하()에서 힘을 빌리기 때문에, 호족[]들이 간사한 계획으로 세금을 면하지만 단약()한 백성들은 지나치게 곤란하였는데, 공은 대장()을 만들고 이것을 정리()하니, 요역()이 비로소 규정된 법식()을 가지게 되었다. 대개 세월이 오래 될수록 사람들마다 이것을 편리하게 여겨 서로 이르기를, “김공()의 은혜를 대대로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듬해 관직을 사면()하고 돌아왔으나 가을철에 죽주 목사(使)에 임명되었는데, 죽주도 또한 산성()이 있어서 호남() 지방과 영남() 지방의 큰길에 해당하였으므로 문무()의 재질을 갖추지 아니하면 고을을 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신년(, 1608년 광해군 즉위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가 좌부승지()에 승진하였다. 천추사(使)로서 북경[]에 입조()하였는데, 돌아와서 우승지()에 임명되었다가 바꾸어 좌승지()가 되었다. 명나라 신종 황제()가 태감() 염등()을 보내어 책문()을 내릴 때에 공이 예방() 승지를 맡아서 일을 주선()한 것이 빠진 것이 없었으므로, 품계를 가선 대부()에 올려 도승지()에 발탁되었다가 교체되어 동지중추부사 겸 부총관()이 되었다. 그 이듬해 가의 대부()에 올라 형조 참판()에 임명되어, 동지춘추관사()ㆍ의금부사()를 겸임하였다. 그때에 관부()의 우두머리가 외방에 있었기 때문에 공이 대신하여 형조()의 옥사()를 맡아서 판결()한 것이 공평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칭찬하였다.

임자년(, 1612년 광해군 4년)에 판서공(, 김원효())의 상()을 당하여 지나치게 애훼()하였다가 박응서()의 옥사()가 일어나자 정협()이 무고()하여 공의 부자()를 끌어들이어, 공이 바야흐로 매우 곤란해 하며 마음속으로 무엇 때문인지 이해하지를 못하다가 갑자기 체포당하였다. 광해군()이 친히 엄한 국문()을 더하자, 공이 핍박하는 데 대답하는 말이 조금이라도 차서()를 잃어버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으므로, 이날 공의 일을 구경한 사람들은 모두 그 질병이 정신을 혼란하게 한 줄을 알았으나, 이것을 잘못 들은 자들은 도리어 공을 비정()하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석방되자 병이 더욱 심해져서 거의 일어나지 못하였다. 복상()을 끝마치자 문을 닫고 들어앉아서 바깥의 일에 관여하지 아니하였고 사람들과 왕래하지도 아니하였으며, 혹은 묻는 자가 있어도 또한 스스로 설욕하려 하지 아니하고 묵묵히 있으면서 오직 시()를 지어 자기의 뜻을 나타냈을 뿐이었다.

무신년(, 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간신()들이 모후(, 인목 대비())를 폐위()하자고 청하였을 때에, 모든 관료()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분주()하게 나아갔으나 공은 반열()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는데, 광해군이 묻기를, “김 아무개는 어찌하여 참여하지 아니하였는가?”라고 하였고, 간당() 중에 공과 더불어 같은 마을에 사는 자가 화복()을 자세히 말하면서 억지로 나아갈 것을 권유하였으나, 공은 이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또 조정에서 모후를 폐위시킬 것인가 폐위시키지 아니할 것인가를 의논할 때에 병자()들도 집에 있으면서 의논하게 하였으나 공은 끝내 의논하지 아니하였다. 뒤에 명나라 조사(使)가 이르자, 전조()에서 공을 영위사(使)에 충임()하였는데, 광해군이 노하여 말하기를, “조정에도 나오지 못하는 자를 어찌 사신을 접대하게 하겠는가?”라고 하여, 공을 폐기()하고 녹용(錄)하지 아니한 지가 11년이 되었다.

계해년(, 1623년 인조 원년)에 반정(, 인조 반정)이 일어나자, 언관()들이 뒤따라 지난 일을 허물하여 공을 죄에 연좌시켜서 (함경도) 길주()에 유배()시켰다가 정묘년(, 1627년 인조 5년)에 (충청도) 아산()으로 양이(, 죄를 참작하여 유배지를 옮기는 것)하였는데, 계유년(, 1633년 인조 11년)에 대사면()을 내리어 스스로 종편(便)하도록 허락하였고, 을해년(, 1635년 인조 13년) 용서하는 은전()을 받아서 도성()에 들어왔다. 그해 8월 29일에 집에서 졸()하였는데, 춘추()가 75세였다.

부인() 이씨()는 현령() 이천우()의 따님으로, 부모에게 효도와 순종()을 독실히 하고 친족에게 인혜()를 베풀며, 여자의 길쌈[]과 부녀자의 일을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민첩하였으므로, 공으로 하여금 가난하고 어려울 때에도 스스로 편안하게 지내도록 하여 드디어 그 학업()을 이루게 한 것은 모두 부인()의 내조() 덕분이었다. 부인은 공보다 23년 앞서 계축년(, 1613년 광해군 5년)에 졸()하였는데, 그 묘소는 판서공()의 무덤 뒤에 유방()을 향한 묘원에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공과 더불어 합장()하였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김광욱()은 바로 관찰공()이고, 차남() 김광위()는 진위 현령()을 지냈으며, 딸은 참판() 윤이지()에게 시집갔다. 관찰공은 1녀를 두었는데, 판관() 이적()에게 시집갔다. 현령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김수익()은 홍문관 교리()이고, 다음은 김수기()이며, 다음은 김수일()인데 관찰공의 후사()가 되었다. 딸은 종실() 풍래군() 이번()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나이가 어리다. 사위 참판공(, 윤이지())은 8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윤탄()은 군수()이고, 차남 윤강()은 현감()이고, 3남 윤식()은 요절하였고, 4남 윤우()는 현감()이고, 5남 윤점()은 감찰()이고, 6남 윤개()는 판관()이고, 7남 윤성()은 진사()이고, 나머지는 나이가 어리며, 그 딸은 승지() 송시길()에게 시집갔다. 내외() 증손()ㆍ현손()이 72인이다. 측실()에게서 세 아들을 두었는데, 김광혼()ㆍ김광련()이고, 하나는 어리다.

공은 집안에 있을 때의 행동을 잘 닦고 삼가면서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그 뜻을 어기지 아니하였다. 서모()는 성질이 섬기기가 어려웠으나, 공은 곡진()한 뜻으로 잘 받들어서 끝내 그 환심()을 얻었던 것이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명확하게 살폈기 때문에 항상 명예()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며, 일체의 이해() 관계에 이르러서도 분연()히 스스로 떨쳐버렸으므로 비록 엄격한 상관()이라고 하더라도 능히 그 이론을 빼앗을 수 없었고, 하관()을 단속할 적에 엄격한 훈령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총명()하고 강단()하였기 때문에 서리()들이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바가 되었다. 공이 장차 공주 목사(使)로 부임하려고 할 때에, 고을의 후리(, 척후() 노릇을 하는 관원)가 고사()를 인용하여 일찍이 연약한 자를 침모()하는가 강성한 자를 외피()하는 가를 시험하기 위하여 ‘태세왕()’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먼저 이를 알리자 고을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는데, 지금까지 그 말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검약()하였는데, 현달()한 관직에 이르러서도 이것을 조금도 바꾸지 아니하여 음식은 맛있는 것을 먹지 아니하였으며, 의복()과 거마()도 구차스럽게 갖추었을 정도뿐이었다. 천성()이 독서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으며, 늙어서 ≪통감강목()≫을 좋아하여, 손수 그 내용을 20권()으로 초록()해 놓고 제목()을 ‘강감요략()’이라고 하였는데, 보는 자들이 그 정밀하게 요약()한 것에 감탄하였다. 공이 길주()에 귀양 가서 있을 때에 발걸음이 문밖을 나가지 아니하였으며, 학업()을 묻는 자가 있으면 인도하여 잘 이끌어 주었기 때문에 신발이 항상 집에 가득하였고, 고을 사람들의 자제()들이 점차 빛이 나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뒤에 공의 상()을 듣고서 모두 천리 길을 달려와서 조부()를 하였다.

아! 공은 일찍이 문장()으로써 벼슬길에 진출하여 화려한 소문이 매우 성대하였으며, 내직()과 외직()을 두루 역임하게 되자 이르는 곳마다 모두 훌륭한 명성()이 있었다. 이미 세상에 쓰일 재주를 부담하여 장점을 스스로 나타냈던 것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세상에서도 또한 그 재주를 알아주었고, 또 일에 익숙하여 중책()을 맡았었다. 그러나 죄에 연좌()되었을 적에 형세()를 붙좇는 길에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몸과 명성이 벼슬길에 허통()하는가 막히는가의 기로()에 있다가 불행하게도 재액()을 만나서 착오되어 떨치지 못하였고, 마침내 비방()에 어려움을 겪다가 불우()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사람들은 진실로 그 끝을 보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지만, 자손()들이 그 남은 복록(祿)을 누려서 바야흐로 벼슬길에 진출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이것이 이른바 ‘복록이 당사자에게 있지 아니하면 그 후손()에게 있다.’는 것이다. 공이 어찌 유감()이 있겠는가? 슬프도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씨족()은 고창()에서 나왔는데 태사() 때에 비로소 천양()되었고, 대대로 이름난 명신() 석보()가 태어나서 혁혁한 관면()이 있었도다. 공 또한 일찍이 분연()히 일어나자 여러 종제()들도 아울러 일어나서, 내직()에 선임되고 외직()에 임명되어, 명성은 실적()으로써 징험하였네. 내가 가진 것은 재주이나 그 천명()을 어찌하랴? 땅에는 두루 함정()을 파놓고 하늘에는 가득히 망라()하므로, 한번 거꾸러져서 끝이 나니 누가 공을 슬퍼하지 않겠는가? 아들이 있고 손자가 있어서 능히 그 남은 복록을 누리고, 이미 효도하고 또 현달()하여 경사()를 이어감이 그치지 않도다. 내가 비석()에 글을 써서 이것을 군자()들에게 질정()하노라.

관련이미지 5

 

 

출처: 국역 국조인물고


'안동 김씨 > 庶尹公의 후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수증의 묘표(墓表)  (0) 2018.06.25
김상용 비명  (0) 2018.06.14
죽소공 묘비석  (0) 2018.06.02
석실묘역 비 피해와 복구  (0) 2018.05.18
석실묘역 사초 진행중  (0) 2018.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