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주말이면 큰아들(정현)의 안내를 받고 있다. 향곡과 덕소 주변의 볼 곳을 찾아 나서는데 장마가 주춤한 토요일 마침 찾아온 리완(손자), 三 代가 삼패동 한강 시민공원에서 한 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데려다 줄 겸 마석 (둘째)에 잠시 들렀고 나오다 차석리 기계유씨 묘역, 묘적사 등 2일간의 주말을 보냈는데 순서대로 올린다.
7월 25일 토요일
26일 일요일
조욱[趙昱 1498(연산군 4 -명종 12) - 1557(명종 12)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경양(景陽), 호는 용문(龍門)·보진재(葆眞齋). 아버지는 판관 조수함(趙守諴)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춘양군(春陽君) 이래(李徠)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16년(중종 11)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조광조(趙光祖)·김식(金湜)을 사사하면서 학문연마에 힘썼다. 기묘사화 때 두 스승에 계루되었으나 연소하다고 하여 화를 면하였다. 그 뒤 형인 조성(趙晟)과 함께 삭령에 집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며 지냈는데, 세상사람들은 그들을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에 비겨 칭송하였다. 뒤에 선원전(璿源殿)·순릉(順陵)·영릉(寧陵) 등의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어머니가 죽은 뒤 3년상을 마치고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는데, 학문이 알려져 용문선생이라 일컬어졌다. 명종 때 성수침(成守琛)·조식(曺植) 등과 함께 천거되어 내섬시주부(內贍寺主簿)가 제수되었고, 이듬해 장수현감에 이르렀다.
시문과 서화에 능하였으며,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이조참의에 추증되었고, 용문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용문집(龍門集)』이 있다. 시호는 文康
출처(발췌)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유록 신도비
이유록(李綏祿, 1564~1620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유지(綏之), 호는 동고(東皐),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첨정(僉正) 이극강(李克綱)의 아들이다. 이유록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자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李敬輿)이다.
선조 19년(1586)에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서북면 체찰사(西北面 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이후 광주목사․봉산군수․상주목사 등을 역임하면서 백성들의 구휼에 힘썼다. 광해군 9년(1617) 폐모론에 반대, 사직하고 고향인 양근으로 은퇴하여 이원익․정엽(鄭曄) 등과 교류했으며, 뒤에 여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취임하지 않았다. 광해군 12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신도비문에 의하면 양근군 백운봉 아래(현 양근리)에 장례를 치루었다 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유록 신도비(총높이 273㎝, 폭 81㎝, 두께 20㎝)는 1994년에 양근리 192번지에서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비는 장방형의 백색화강암으로 비좌와 비신 및 쌍용의 이수를 갖추고 있다. 비좌는 상부를 부드럽게 처리 하였으며 이수는 검게 산화되어 있는데 전면에는 구름무늬와 두 마리 용이 중심부위 여러 곳에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비신은 전․후면에 비문이 있으며, 상단에 횡으로 『贈領議政李公神道碑銘』이라 했고, 비제(碑題)는 『有明朝鮮國贈領議政神道碑銘幷序』라 음각되어 있다. 건립연기가 없어 정확한 건립시기는 알 수 없다. 비문은 김상헌(金尙憲)이 찬하고, 윤문거(尹文擧)가 글씨를 썼으며, 허목(許穆)이 전(篆)을 했다.
- 발췌 양평문화원 홈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