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글/풍고집 해제본

8대조(諱 達行) 증 좌찬성부군 묘표135

추읍산 2021. 2. 25. 20:54

풍고집(楓皐集)은 풍고 김조순(永安府院君 金祖淳 1765 -1832)의 문집으로 원본은 16권 8책이다. 이는 장남 김유근(金逌根 1785 -1840, 종백부 金龍淳 앞으로 입후)이 유문(遺文)을 모아 편집(1832 -1837)을 마쳤으나 1837년 이후 중환으로 간행을 미루다가 1840(헌종 7)년 별세하였다. 이를 三男 김좌근(金左根, 1797 - 1869)이 이어받아 1868년(고종 5) 간행하였다.


풍고 별세 189년, 이해를 돕기 위한 한글역이 나오니 감회가 남다르다. 현재 <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번역총서/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에서는 문헌으로(책) 남은 선현들의 흔적에서 역사를 추적하고 있다. 옮긴이는 며칠 전  풍고집 2차 한글역 3, 4, 5 권을 성균관대학교 측으로부터 받아 이는 2년 전 1, 2권에 이은 것이다. 5권에서는 (옮긴이의)8대조(諱 達行으로 김조순의 조부) 증좌찬성부군(贈左贊成府君 諱 達行) 墓表를 싣고 있어 여기 옮긴다. 풍고집을 통해 김조순을 바로 이해하는데 한 걸음 더 다가가기를 바라면서 관계 기관, 참여하신 모든 분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그러면 처음 편집을 마친 황산의 감회를 읽겠습니다.

閱先稿 열선고

선친의 원고를 살펴보다

 

김유근(金逌根 1785~1840)

 

玉瓚黃流爛有光  옥찬(玉瓚)의 황류 찬란하게 빛나고

積中勳業是文章  내면의 쌓은 공업 바로 문장이라네

昭回歷代淵源重  역대를 밝게 살폈으니 연원이 깊고

賁飾熙朝黼黻煌  훌륭한 시대 꾸몄으니 나라 빛냄 찬란하네

昔日朱門來舊客  옛날 흥성했던 시절 찾아오던 옛 손님들

長年綠野掩虛堂  나이 들자 시골에서 빈 집만 닫혀 있네

編摩自盡生三義  유고(遺稿)를 다 편집하자 군사부(君師父) 의리 알겠으니

纏慟窮天俾可忘  하늘에 사무치는 애통함 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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楓皐集

 

卷之十二 / 墓表

 

王考贈左贊成府君墓表

府君諱達行。字脩甫。我金出安東。高麗太師諱宣平之後。我朝有諱尙憲。左議政文正公。是嘗斥和拘瀋獄。天下誦其義。而東國學士大夫尊之曰。淸陰先生。於府君爲五世祖。曾祖領議政文忠公諱壽恒。被己巳士禍。是曰。文谷先生。祖領議政忠獻公諱昌集。是曰。夢窩先生。考諱濟謙。右副承旨贈左贊成。號竹醉。妣贈貞敬夫人恩津宋氏。文正公同春先生之孫。都事炳遠女也。府君以肅宗丙戌十二月十一日生。生十六年。而當景宗辛丑。忠獻公與李忠文,忠愍,趙忠翼三大臣。决策禁中。建英宗爲儲。羣凶籍奧。援起誣獄。以逼世弟。忠獻與贊成及其長孫三世。後先被酷禍。是謂辛壬士禍。而府君亦坐配歙谷。英宗卽位。化理淸明。黜羣凶。伸諸寃。還諸坐之遷徙者。建祠江上。以侑四大臣。當是時。天心悔禍。庶幾君子道長。並受其福。已而凶黨復起。持悖誣脅上。上怵其說。悉反前案。府君復泣血。杜門十餘年。以戊午六月二十九日卒。享年纔三十有三。嗚呼寃矣。於是府君之第三兄文敬公渼湖先生誌其葬曰。君生而有俊氣。見人之回互齷齪。欲唾其面。性通曉於事物。技能鮮有滯礙。而其材力精敏強榦。又足以濟之。故知者皆以君爲有用也。君旣早以家禍自廢。平居不甚讀書。然與之論文字談經義。精識往往過人。尤工於古文隷字。能絶逼于古。亦未嘗甚用其力。亦可以見其才矣。惜乎。其不能學而成也。雖然。以其之才生於家國隆平之日。隨其能以致其用。則亦何渠不若人。而流離嶺海。備險艱而極窮約。抱至寃而終其身。天乎豈不悲哉。嗚呼。先生之言。足以知府君之深也夫。始葬驪州草峴里先塋之次。丁卯。移奉于其北十餘里趨揖山下香谷里坐亥之原。夫人李氏祔焉。夫人氏韓山牧隱先生之裔。監司諱潗之女。賢而有度。事君子無違言。今上壬戌。大婚成。用例贈府君左贊成。夫人貞敬夫人。有三男。履基牧使,履中府使,履慶早歿。二女李得祥郡守,宋載緯縣監。牧使男龍淳。蔭前正。明淳女。李健源注書,尹守翼蔭正。府使男祖淳。今領敦寧。女李章紹蔭都正,洪羲命生員。男平淳。武及第。女沈能極。履慶無子。以明淳爲後參判。郡守男英麟。縣監男允鼎,久鼎,太鼎縣監,基鼎今正郞。女金相休。今判書,李度中前洗馬。龍淳以祖淳子逌根爲嗣。今參判。女黃鍾一 遜根。女洪壎。祖淳男逌根,元根今牧使,左根生員。女長卽今中宮殿下。誕生東宮及二公主。次南久淳,李謙在,李肯愚。明淳男弘根。今主簿。應根,興根。並生員。側男偁根。前武兼。竊惟府君夙嬰禍難。復不得年。德育而潛。光蘊而幽。不肖輩雖欲揄揚。何所摭實。渼湖先生以天倫之情。爲幽宮之誌。其辭簡而嚴。其文峻而潔。形容摸寫。大略具在先生百世儒也。後之考府君之德者。文不在玆乎。遂謹表先生之語。而出之以勒于石。不敢復以不肖輩一二遺聞舊傳。贅於其間。以速僭妄之罪云爾『 이상 고전번역원분으로 끝부분, 빠진 글자가 있어 아래 채운다.

孫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使兼知 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奎章閣檢校提學都摠府都摠管 永安府院君 祖淳謹識

 

大字 集 蘇軾 書 .小字 集 韓濩 書

上之二十二年 壬午 月 日立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2

출처 : http://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600A_0130_020_0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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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군의 휘는 달행(達行)이고, 자는 수보(修甫)이다. 우리 김씨는 안동(安東)에서 나왔으니,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휘 선평(宣平)의 후손이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 상헌(尙憲)이 있으니,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이분이 일찍이 화의(和議)를 배척하다가 심양(瀋陽)의 감옥에 억류되니 천하 사람들이 그 의리를 칭송하였고, 우리나라의 학사와 대부들이 존경하여 '청음 선생(淸陰先生)'이라고 부른다. 부군에게는 5대조이다. 증조는 영의정을 지낸 문충공(文忠公) 휘 수항(壽恒)이니, 기사년(1689, 숙종15)에 사화(士禍)를 당하였다136. 이분이 문곡 선생(文谷先生)이다. 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충헌공(忠獻公) 휘 창집(昌集)이니, 이분이 몽와 선생(夢窩先生)이다. 부친의 휘는 제겸(濟謙)이니, 우부승지를 지냈고 좌찬성으로 추증되었으며 호는 죽취(竹醉)이다. 모친은 증 정경부인으로 추증된 은진 송씨(恩津宋氏)이니, 문정공(文正公)  동춘(同春 宋浚吉) 선생의 손녀요 도사(都事) 송병원(宋炳遠)의 딸이다. 

 

부군은 숙종 병술년(1706, 숙종32) 12월 11일에 태어났다. 태어난지 16년만인  경종(景宗) 신축년(1721, 경종1, 16세)에 충헌공이 이충문[李忠文 이이명(李頤命)]과 이충민[李忠愍 이건명(李健命)]과 조충익[趙忠翼 조태채(趙泰采) 세 대신과 함께 금중(禁中)에서 결단하여 영종(英宗 영조)을 세워 세제(世弟)로 삼으려 하였는데, 흉악한 무리가 궁중의 은밀한 도움을받아 무옥을 일으켜 세제를 픽박하였다. 137  충헌공이 찬성(贊成)과 그의 장손138과 함께 삼대가 선후로 혹독한 화를 당하였으니 이를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한다. 부군(김달행) 역시 연좌되어 흡곡(歙谷 강원도 통천군에 폐합된 조선 말기의 행정구역으로 북한 지역 - 옮긴이 주)

에 유배되었다.

 

영종이 즉위하여 교화와 다스림이 청명해져 흉악한 무리를 내쫓고, 여러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신원해 주고 연좌되어 멀리 유배되었던 이들을 방면하였으며, 강가에 사당을 세워 사대신(四大臣)을 제향하였다.139 이때에는 하늘도 화를 내린 것을 후화여 거의 군자의 도가 자라나 모두 그 복을 받을 듯하였다.140 그러나 얼마 뒤에 흉악한 무리가 다시 일어나 터무니없는 모함으로 성상을 위협하니, 성상이 그들의 말을 두려워해 이전의 단안(斷案)을 모두 뒤집었다.141 부군은 다시 피눈물을 흘리며 십여  년 두문불출하다가 무오년(1738, 영조 14) 6월 29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은 겨우 33세였다. 아! 원통하도다. 이에 부군의 셋째 형인 문경공(文敬公)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선생이 부군의 묘지명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142 

 

"군은 태어나면서부터 준엄한 기상이 있어 정직하지 않거나 좀스러운 사람을 보면 그 얼굴에 침을 뺕고 싶어 하였다. 천성적으로 통찰력이 있고 사리에 밝아 사물의 기능에 대해 막힘이 거의 없었으며, 재주있고 명민한 데다 심지가 굳어 일을 성사시켜 내었기에 아는 사람들은 모두 군을 유용한 인재라고 생각하였다. 군은 이미 일찌감치 집안이 화를 당한 것을 이유로 벼슬길에 나갈 생각을 접어 평소에 그다지 글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함께 문자를 논하고 경서(經書)의 뜻을 담론해 보면 정밀한 식견이 왕왕 보통 사람들을 능가하였다. 특히 고문(古文)과 예서(隸書)에 뛰어나 고법(古法)에 아주 가까웠는데, 여기에도 그다지 힘을 쏟은 적은 없었으니, 이것 만으로도 그 재주를 알 수 있다. 제대로 배워서 성취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그렇지만 군의 재주로 보아 집안이 융성하고 국가가 태평한 날에 태어나 능력만큼 역량을 펼칠 수 있었다면 어찌 그가 남만 못했겠는가. 그러나 영해(嶺海)를 떠돌며 온갖 고생만 겪고 몹시도 가난하게 살다가 지극한 통한을 품은 채 일생을 마쳤으니, 천명이로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아아! 미호 선생의 이 말에서 부군은 깊이 알기에 충분하다. 부군은 처음에 여주(驪州) 초현리(草峴里) 선영의 묘역에 장사 지냈다가 정묘년(1747, 영조 23)에 그 북쪽 십여 리 되는 추읍산(趨揖山) 아래 향곡리(香谷里) 해좌(亥坐)의 언덕으로 옮겨 안장하였다. 부인 이씨(李氏)도 합장하였다. 부인의 관향은 한산(韓山)으로, 목은(牧隱 이색) 선생의 후손이며 감사 휘 집(潗)의 딸이다. 현명하고 법도가 있었으며 지아비를 섬기며 그 뜻을 거스르는 말이 없었다. 금상 임술년(1802, 순조 2)대혼(大婚)이 이루어져143 규례에 따라 부군에게는 좌찬성을, 부인에게는 정경부인을 추증하였다. 부군은 아들 셋을 두었으니, 이기(履基)는 목사이고 이중(履中)은 부사이며 이경(履慶)은 요절하였다. 딸 둘을 두었는데 군수 이득상(李得祥)과 현감 송재위(宋載緯)에게 출가하였다. 

 

목사(김이기)의 아들은 음직으로 전 정(正)을 지낸 용순(龍淳)과 명순(明淳)이고, 딸은 주서 이건원(李健源)과 음직으로 정(正)을 지낸 윤수익(尹守翼)에게 출가하였다. 부사(김이중)의 아들 조순(祖淳)은 지금 영돈녕이고, 딸은 음직으로 도정(都正)을 지낸 이장소(李章紹)와 생원 홍희명(洪羲命)에게 출가하였다. 아들 평순(平淳)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딸은 심능극(沈能極)에게 출가하였다. 이경은 아들이 없어 명순을 후사로 삼았으니 참판이다. 군수(이득상)의 아들은 이영린(李英麟)이다. 현감(송재위)의 아들은 송윤정(宋允鼎)과 송구정(宋久鼎)과 송태정(宋太鼎)과 지금 정랑으로 있는 송기정(宋基鼎)이며, 두 딸은 판서로 있는 김상휴(金相休)와 전 세마(洗馬) 이도중(李度中)에게 출가하였다. 

 

용순은 나(김조순)의 아들 유근(根)을 후사로 삼으니 지금 참판이며, 딸은 황종일(黃鍾一)에게 출가하였다. 아들은 손근(遜根)이고, 달은 홍훈(洪壎)에게 출가하였다. 조순의 아들은 유근(逌根)과, 지금 목사로 있는 원근(元根)과 생원 좌근(左根)이다. 장녀는 바로 지금의 중궁 전하이니, 동궁과 두 공주를 낳았다. 차녀는 남구순(南久淳)과 이겸재(李謙在)와 이긍우(李肯愚)에게 출가하였다. 명순의 아들 홍근(弘根)은 지금 주부(注簿)이고, 응근(應根)과 흥근(興根)은 모두 생원이다. 아들 칭근(偁根)은 전 무겸(武兼 무신겸선전관)이다. 

 

삼가 생각건대, 부군은 어린 시절에 환난을 당했고 또 천수를 누리지 못했으며 덕을 길렀으나 숨겼고 광휘를 품었지만 드러내지 않았으니, 불초자들이 드러내어 선양하고 싶은 들 어디에서 그 사실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미호 선생이 천륜(天倫)의 정으로 무덤에 지문(誌文)을 지었으니, 그 말은 간결하면서도 엄정하고 그 글은 굳세면서도 깨끗하여 공의 덕을 형용하고 모사함이 대략 갖추어져 있다. 미호 선생은  백대의 유종(儒宗)이니 훗날 부군의 덕을 살피려는 자들은 그 문장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이에 삼가 선생의 말씀을 표출하여 이를 드러내 비석에 새기며, 감히 불초자들이 알고 있는 한두가지 유문(遺聞)과 구전(舊傳)을 그 사이에 덧붙여 참람하고 망령된 죄를 초래하게 하지 않을 뿐이다. 

 

(번역에서 빠진 부분으로 양평문화원의 번역분을 아래 채운다.) [ 손자 보국숭록대부 영돈령부사 겸 지경연사 홍문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규장각 검교제학오위도총부도총관 영안부원군 조순(祖淳)이 삼가 기록하다. 

 

전면 큰 글자는 소식(蘇軾)의 서체를 모아쓰다. 후면 작은 글자는 한호(韓濩)의 서체를 모아 쓰다. 

 

순조 22년 임오년(1822) 모월 모일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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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왕고(王考) ........묘표 : (김조순의) 조부 김달행(金達行, 1706 -1738)에 대한 묘표이다. 김달행은 미호(渼湖) 김원행의 생부인 김제겸(金濟謙)의 넷째 아들이다. 김원행이 지은 묘지명이 참고가 된다. < 미호집 권 15 從弟修甫墓誌銘幷序)

 

136 기사년에 사화를 당하였다. : 己巳換局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김수항은 탄핵을 받아 진도(珍島)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사사되었다. 

 

137 충헌공이 .... 핍박하였다. 경종이 즉위한 뒤 병약하고 후사가 없자, 이른바 노론 4대신이 왕세제(王世弟)였던 연잉군(후일 영조)의 대리청정을 건의했다가 소론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하였고 , 이후 소론의 거두였던 조태구와 김일경이 환관 박상검(朴尙儉)과 결탁해 노론 세력을 완전히 축출한 임인옥사를 일으킨것을 말한다. 

 

138 찬성(贊成)과 그의 장손 : 몽와 김창집의 아들 김제겸 장손자 김성행의 삼 대를 말한다. 

 

139 강가에 ......제향하였다. 영조는 즉위 후 노론 4대신의 관작을 회복하고 노량진(사육신 묘역 근처)에 사충서원을 세우게 하였다. 

 

140 군자의 ....... 듯하였다 :  원문은 '군자도장병수기복(君子道長竝受其福)'인데 <주역> <태괘(泰卦) 단(彖)>에 "군자를 안에 있게 하고 소인을 밖에 있게 하니, 군자의 도가 자라나고 소인의 도가 없어진다.[內君子而外小人, 君子道長, 小人道消也.]"라는 구절이 있고, <정괘(井卦) 구삼(九三)>에 "임금이 밝으면 모두 복을 받는다. [王明竝受其福]" 라는 구절이 있다. 

 

141 그러나 ....... 뒤집었다. 이른바 정미환국(丁未換局)을 말한다. 영조는 즉위한 뒤 노론의 요청에 따라 신임사화를 무옥으로 판정하고 신임사화 때 처벌된 노론을 신원하는 을사처분(乙巳處分)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1727년(영조 3)인 정미년에 이광좌(李光佐)와 조태억(趙泰億) 등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자 을사처분을 뒤집어 노론 사대신을 죄안(罪案)에 들게 하고 신임사화를 역옥으로 규정하였다. 

 

142 이에 ........기록하였다. : 아래에 인용한 묘지명은 <미호집> 권 15에 수록된 ,종제수보묘지명병서(從弟修甫墓誌銘竝書)>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143 대혼(大婚)이 이루어져 : 풍고의 딸이 순조의 비가 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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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2020년 12월 31 발행(성균관대학교 출판부) 풍고집 5, p84 -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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