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庶尹公의 후예

삼연(諱 昌翕)선조를 뵙다

추읍산 2021. 2. 28. 07:31

먼저 삼연(김창흡)에 대해 알아보자 : 클릭> 김창흡(金昌翕)

 

요산단(堯山壇)

삼연 문중의 분산(墳山) 입구로 삼연 묘역 아래에 있다.

조선 헌종 때 신읍리 요골 뒷산에 사당을 창건하여, 1850년(철종 1)에 ‘요산 영당()’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 영당은 요산사()로도 불려졌다. 『삼연선생연보()』[김수근()이 지음]에 의하면 본래 ‘선생의 묘 아래에 병사()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불을 질러 없어졌다. 그 자리에 포천현의 인사가 발의하여 영당을 짓고 가묘()에 있던 영정을 옮겨 봉안하여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하였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영당이 훼철되자, 포천 유림들이 영당은 없어졌지만 향사는 폐할 수 없다 하여 그 터에 단을 만들고 향사를 이어왔다. 이것이 요산단이다. 6·25 전쟁 때 그 단마저도 훼손되어 1967년에 포천 유림들이 다시 발의하여 단을 만들었다. 김창흡 묘소 아래에 있는 지금의 요산단은 1987년 5월 11일에 이를 새롭게 하여 세운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요산단[堯山壇]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요산단(堯山壇) 경내의 비석이다

 

요산단 건립 후원자 명단이다. 
삼연  선조님 묘소에서
삼연 선조님의 장손이신 휘 범행(1706 -1764)께서는 가평군수를 역임하셨다. 
가족묘지가 곳곳 있어 문중차원에서 추진했을 것이다.
모셔온 22世 諱 達淳의 묘역으로 깨끗이 단장했고 여초(김응현)의 글씨가 빛난다

우뚝하셨는데 훗날 명예가 가슴 아파옵니다. 갈고 닦아 그 빛 끝이 없으리이다. 편안히 쉬십시오 볼 곳 :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8893 

 

김달순(金達淳)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도이(道以), 호는 일청(一靑). 김양겸(金養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범행(金範行)이고, 아버지는 군수 김이현(金履鉉)이며, 어머니는 송재화(宋載和)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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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달순 묘역(위의 사진) 우측이다. 

주말이고 고향의 교하노씨 노직 형제의 문중묘역을 나와 양평을 거쳐 포천으로 가는 길이 이른 오후라서 인지 막힘이 없다. 날씨는 많이 풀렸고 같은 11대조 문곡의 셋째 아들인 삼연(諱 昌翕) 문중에 미리 이야기하고 성묘길에 나섰고 처음이다. 이곳은 보현당이 오래전 답사한 바 있어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중심에 삼연 계시고 묘하 입구에는 삼연을 기리는 요산단(堯山壇)이 있다. 곳곳 작은 분산을 이루었는데 현 안동김씨 어느 문중도 이만할까? 마치고 앞 도로변에 위치한 삼연 파종의 사무실을 찾았다.

 

다시 생각하게 하는 文谷 [諱 壽恒, 1629년(인조 7년) - 1689년(숙종 15년)]의 아들 6형제(昌集, 昌協, 昌翕, 昌業, 昌緝, 昌立 이른바 六昌으로 불린다)가 쌓아 올린 업적(業績)이 솟아 백두산에 닿았다. 일묘사충(一廟四忠 참고 http://blog.daum.net/0113508344/4721724)과 더불어 유일한데 다지고 키워 모두에게 다가가기 바란다.  필자는 맏아들 몽와 [諱 昌集, 1648년(인조 26년) - 1722년 5월 2일(경종 2년)]의 10 세손이다.

 

그곳 회장님과 총무를 만나 잠시 담소를 나누고 귀갓길에 올랐는데 늦은 점심, 근처 갈비탕이다. 돌아오는 길 사통팔달, 수려한 산천이 시원하다. 일찍이 이런 때는 없었는데 뒤돌아 가는 느낌, 기우 아니길 바란다. 봄이 오고 길목에서 우러르니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단다. 가족은 나의 보금자리, 긴 밤, 나 홀로 걸었는데 닭 우는 소리는 어디로 갔는가? 여명(黎明)을 받들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