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실서원을 가리켜 진경문화와 북학파의 산실이라고 하였다. 씨앗 된 두 할아버지(13대조 청음과 그 형님 선원) 정신이 파종되었는데 병자호란을 통해서 나타난 불굴의 충절을 본받기 위함이다. 싹트고 무럭무럭 자라 그 열매 조선 후기 양식으로 되었는데 1870년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있었다.
세월은 흔적마저 지우려는가? 옛 문화를 오늘에 되살림은 가치이기 이전에 순종(順從)이라고 할 수 있다. 배출된 선현은 줄줄이 등댓불이었고 배향록 또한, 문제 될 수 없다. 잊혀 가는 현실 속에 벽은 높아만 가고 관련 문중은 외면하니 부끄럽다 어찌 아니 하겠습니까?. 그런 속에서도 일깨우는 분들 있음은 기여한 바 크기 때문이다. 얽히고설킨 실타래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은 없을까?
농암[農巖 金昌協 1651(효종 2) -1708(숙종 34)], 초석을 놓았습니다
석실서원은 1663년 (효종 7) 건립되고 1663년(현종 4)에 사액사원이 되었습니다. 미호변의 남양주시 수석동 모장산 자락의 석실서원, 강단에 서신 할아버지(영조 때)입니다. 문하에는 이재(李縡), 어유봉(魚有鳳), 이병연(李秉淵), 조영석(趙榮石) 등이 있습니다. 들불처럼 이어지고 번져 조선후기 황량한 삶 속에서 청량한 음료수가 되었습니다.
학문
그림
'남기고 싶은 글 > 진경문화와 북학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학파)석실서원 입학, 차별을 두지 아니한다 (0) | 2021.03.30 |
---|---|
진경문화의 대가들 (0) | 2021.03.29 |
석실서원 백두대간을 노짓다 (0) | 2021.03.28 |
석실서원을 보는 세상의 눈 (0) | 2021.03.28 |
석실서원 학규 (0) | 2020.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