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0일)는 고향 향곡의 벌초를 마무리하는 날로 정현이가 월차를 내어 8일(수요일)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8대조 김달행(諱 達行), 그리고 6대조 김용순(諱 龍淳), 5대조 김유근(諱 逌根) 묘역은 넓고 남향이다. 10시 30분경 도착하였는데 상당 부분 진행되었고 나머지 묘역은 부탁한 분 따로 있다. 갈퀴질하고 모아 모아 묘역 밖으로 날랐는데 정현이의 예취기 소리는 마무리로 달린다.
낮 시간, 아직은 덮다. 35년 전에는 음 7월 20일이 벌초 날이다. 작은 산골 마을에서는 한 집당 한 분씩 참석했고 이는 1747년(영조 23), 찬성공[諱 達行 1706(숙종 32) -1738(영조 14)] 묘역이 자리 잡고부터 이어져온 연례행사다. 1942년 저수지 개설 이후 마을은 작아졌고 십오 분 정도 참여했다. 보리고개를 넘을 때나 동란의 와중에도 끊김이 없어 감사한다. 변혁은 1980년대, 예취기가 나오면서부터다. 나 홀로 벌초하기 그 얼마이던가? 넉넉잡아 일주일 정도로 더 이상 의존하고 싶지 않았고 세태에 맞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취기가 없었다면 나 또한,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추억을 더듬어 아래 안내한다.
낮 시간이다. 예전 같으면 점심 후, 늘어지게 한잠 자고 각자 맡은 구역으로 향했는데 오늘은 상당한 진척을 이루어 마무리는 저녁 무렵으로 하고 조상님과 선현의 흔적 찾기를 좋아하는 정현이의 제안에 따라 원주의 의민공사우(懿愍公祠宇로 연흥부원군 김제남(諱 悌男의 사당]와 분산(墳山), 그리고 김탄행[諱 坦行 1714(숙종 40) -1774(영조 50), 호 余樂軒] 묘역으로 향했다. 두 곳은 문막을 이웃으로 섬강을 끼고 마주하고 있는데 건등산은 물속에 어리었다. 잠자는 이미지를 일깨우려 함인가? 곳곳 지학순 주교 탄생 100주년 현수막이 걸려있다. 탐방 후 간현에서 점심을 들고 향곡에 도착하니 저녁으로 아직은 여유가 있어 보인다. 한 시간 반 정도 걸려 마쳤는데 깔끔해진 조상님 묘역을 뒤로하고 귀갓길에 올랐다. 4차선 6번 국도는 한강과 어우러져 빛 속에 묻 쳤는데 초생달이 서편에 걸려있다. 어느덧 양수대교 아래 팔당호가 드넓은데 운길산과 예봉산을 가로지르는 터널의 연속이다. 추억이라는 공간속에 또 하나 추가한다.
연흥부원군[의민공 김제남(諱 悌男 1562년(명종 17) - 1613년(광해군 5)]
의민공은 필자의 11대조 문곡 김수항(諱 壽恒)의 외증조다. 계축옥사에 얽힌 슬픈 이야기 광해군은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모후 인목대비(仁穆王后, 1584 - 1632)를 서궁에 유폐시켰으며 폐모정책으로 윤리마저 무너트렸다. 이도 모자람인지 인목대비의 친정 아버지 의민공과 그 아들 삼 형제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김래(諱 琜, 11대조 문곡 김수항(諱 壽恒)의 외할아버지로 의민공의 장자)를 뵙다. 인목대비의 8년 년 상의 오빠로 얼마나 슬퍼하셨을까? 계축옥사로 의민공과 그 아들 삼 형제는 유명을 달리하였다.
문곡 김수항[諱 壽恒 1629년(인조 7) - 1689년(숙종 15)]은 다섯 살(1633년) 때 어머니 연안김씨를 여의었는데 이 때 외조모 초계정씨에게 이끌리어 외가인 원주 안창리에서 자라시고 교육을 받으셨다. 1640년경 외조모 마져 돌아가시자 어느 봄날 아버지(同知公 金光燦)를 따라서 안동 청원루에서 할아버지( 청음 김상헌)를 뵈었다(문곡 김수항 열두 살). 그 때는 청음께서 삼전도의 치욕을 삼키며 안동의 학가산 아래 서미동과 청원루를 오가시던 때다. 할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사랑 속에 있었는데 그 해 (1840년) 11월 청음께서는 청의 심양으로 압송되셨다. 열심은 더했고그리움은 줄줄히 맺혔습니다.
급제후 안창리 외가를 찾았는데 성묘 때의 무슨 말씀을 나누었을까?
버선발의 마을 분들, 벅차 마주 잡은 손 따듯했고
누볍을 축하 행렬, 그 환희 (歡喜) 드높았습니다.
그때 그 모습을 그립니다. 계곡물은 굽이치고 부딧치면서 큰 물줄기 이루었고 글읽는 소리는 중심이 되었습니다. 하늘은 높고 넓고 깊습니다.
여락헌[余樂軒 金坦行(1714 - 1774)] 묘소를 찾아서
생애 및 활동사항
경종 연간에 신임옥사가 일어나 1722년(경종 2)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사사되고 어린 나이에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1726년(영조 2)에 풀려나 여주의 양지(陽智)에서 살았다. 소론이 몰락하고 노론이 집권하자 1755년 선공감역(繕工監役)과 익위사부수에 보직되었으나 동료관원 가운데 소론이 끼어 있다고 나아가지 않았다.
뒤에 내시교관(內侍敎官)을 거쳐 장흥고주부(長興庫主簿)에 승진하고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서흥현감·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원주판관·금산군수·남원부사를 지낸 뒤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러 여주에 돌아와 죽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탄행 [金坦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여락헌(휘 탄행으로 자는 叔平) 묘역과 묘막을 바라보면서 두 할아버지(휘 달행 그리고 휘 탄행)을 생각합니다. 신임사화로 삼 대( 안동김씨 창집, 제겸, 성행)가 화를 당했고 살던 집은 파여 연못이 되었습니다. 33년 전 기사환국까지 더하니 문곡(김수항), 그리고 대를 이은 흘린 피, 4대로 유일한 일묘사충(一廟四忠)이 되었습니다. 신임사화 때 수보(脩甫 휘 달행의 자)께서는 강원도 흡곡으로 여락헌께서는 금산으로 유배를 떠났습니다. 추모라는 공간이 묘소와 묘막으로 남았는데 향곡의 묘막은 물속으로 잠겼고 아마도 이곳 여락헌 묘막과 비슷할 것입니다. 두 사화로 흘린 피, 내를 이루었는데 찬란한 빛 후손에게서 빛나니 영, 정, 순조 때와 고종 때,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철종 때의 세도정치(勢道政治) 중심으로 되어 우러러 부끄럽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현실을 직시하며 하늘을 우러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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