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직계조상님

삼구정(三龜亭)과 예천권씨(醴泉權氏로 18代祖妣) 할머니

추읍산 2021. 10. 27. 12:28

연산군 1년(1495)에 지은 정자로 여러 차례 보수하고 1947년에 다시 재현하여 오늘에 이른다.

먼저 읽을 곳으로 서유용씨의 글이다 

http://www.ugn.kr/coding/view.asp?domain=1&section=-1&seq=43250 

 

2006안동뉴스

삼구정(三龜亭) 서수용/한국고문헌연구소 소장 삼구정은 안동 김씨의 본향인 안동 풍산 소산(素山)을 대표하는 정자로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구정(55.0×38.0cm)  

www.ugn.kr

 

안동 풍산읍 지풍로 1975-1(소산리)로 소요산(素燿山) 끝자락 동오봉(東吳峯) 머리에 있다. 판관공(10世 諱 계권으로 配는 예천권씨)의 자녀들은 88세의 어머니를 모시고 오르 내리며 효행의 장소로 삼았던 곳이다.

 

이곳 금산마을(지금의 소산리)에는 비안공(9世 諱 三近)께서 입향하신지 한 세대가 흘렀다. 10世 판관동의 配 영인(令人) 예천권씨([1409년(태종9년) - 1496년(연산군2년)]께서는 부군(10世 係權)과 사별하여(1458년) 서울 장의동에서 낙향하시고 이곳 돈소당에 머무르신지 37년입니다.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작은 동산에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무정한 세월은 흘러 88세로 90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자식들은 승려로 관직으로 출사하셨는데 긴세월 한바탕 꿈속이었습니다. 불사에 열심이셨던 큰아들 학조는 국사로서 신임을 한몸에 떠 안았고 자녀들도 풍상을 격은 후라 만년을 노래하고 있을 때입니다.  

 

「삼구정이 지어질 때는 88세 이셨다. 5남 장령공(11世 諱 영수)이 1495년에 영천군수에서 퇴임하시고 고향(소산리)으로 돌아오셨는데 「 집 동쪽에는 띠로 엮은 작은 정자가 하나 있어 낙동강이 바라보이고 풍광이 아름다웠습니다. 깨달음은 순간으로 어버이를 모시던 곳인데 이제는 어머니께서 늙으시어 즐기지 못하시니 비록 화려하고 큰 집이 있다 하더라도 즐길 것이 없으니 한스럽기 그지없다. 그런데 띠로 이음이 잘 되어 있지 못하고 또 협소하여 거처하기가 어렵다 하고는 곧 맏형님께 편지로 알렸다. 맏형님도 이것이 바로 내뜻이었다 하여 많은 돈을 보내주어 도왔다. 이에 넓혀 짓고 五色 단청하여  삼구(三龜)라  하니 정자옆에 세 돌이 거북이 같고 수(壽)하는 것이 거북 같은 것이 없어 수친(壽親)하는 것을 붙쳤습니다. 또한, 남쪽으로 시내를 따라 버들을 많이 심고 또 빈땅에 밤나무 천 여주를 심었습니다.

 

날씨가 좋은 때에는 가마로 모셔놓고 형제자매를 비롯한 온 가족이 참여하고 주위 노인분과 어울리어 음식을 만들고 북과 거문고를 치며 번갈아 일어나서 헌수(獻壽)하니 영광스럽게 여기고 지나는 이 모두 우러러 감탄하였습니다. 참판 김극검(金克儉)이 부사로 듣고 아름답게 여기어 정자에 올라 헌수하고 그 일을 가영(歌詠)하여 송축(頌祝) 하였다고 합니다.」

 

삼구정(1495년, 연산 1)이 지어질 때 다섯 아들과 손자

다섯 아들
11世
학조(學祖)
1431 - 1514
영전(永銓)
1439 - 1522
영균(永鈞)
1441 - 
영추(永錘)
1443 - 1522
영수(永銖)
1446 -1502
65세  57세 55세 53세 50세
국사(國師) 지례현감     영천군수를 사직하고 고향에서 삼구정 건축을 주도함
손자
  정(挺)
호(琥)
위(瑋)
환(瓛) 
壻 이윤담(李胤聃)
壻이효장(李孝長)
壻 남의경(南義景)
수(琇)
연(瑌)
壻 경세호(慶世豪) 
壻 고세창(高世昌)
壻 김수돈(金守敦)
구(球)
壻 진공석(秦公奭)
壻 이형(李泂) 
壻 김수돈(金守敦)
영(瑛)
번(璠)
순(珣)
壻 김연손(金延孫)
壻 김유(金儒)
壻 금원수(琴元壽)
壻 김윤종(金胤宗)
壻 안임(安恁)
壻 이수남(李水南)

유상(游賞)하는 낙(樂)을 삼아 드렸는데 氷魚雪笋生前事(얼음 속 물고기, 눈 속 죽순)가 따로이지 않았습니다.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4면이 개방되어 주변 경치와 잘 어울린다.

서쪽에 일각대문이 있어 들어서면 동남향으로 정자가 서 있다. 정자 앞 좌측에 세 개의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다. 바닥은 우물마루로 깔고, 벽체 없이 개방된 형태다. 큰 잡석으로 기단을 쌓았으며,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고, 기둥은 굵은 원주를 사용하였다. 삼구정 안에는 안동김씨 후손들과 명현들이 주위 풍광과 김씨 형제들의 효행을 찬양하여 읊은 시의 현판들이 빽빽하게 걸려 있다. 조선 전기에 건립된 정자로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세부구조양식이 다소 변형되었지만, 당시의 배치, 평면구성, 건물규모 등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간 몇차례 중수한 것으로 보이나 1947년에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삼구정을 있게한 형제들의 효행으로 그들의 자손들이 번성하였다. 막내 김영수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 첫째가 김영(金瑛:1475 - 1528)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동부승지에까지 올랐으며 후손들은 안동김씨 소산파로 불리며 맏집으로 삼당공파라 한다. 둘째가 김번(金璠:1479 - 1544)으로, 역시 문과에 급제해 평양서윤을 지냈는데 서윤공파이고 셋째 김순(金珣)은 사마시에 합격해 찰방을 지냈으며 진사공파로 분류된다.

 

김번의 증손이 선원 김상용,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인데 이 후손들에게서 정이품(판서급 이상)이 줄지어 300년이니 금관자 서말 옥관자 서말의 근원이 되었다. 

 

예천권씨는 1409년(태종 9년) 2월 22일 태어나 1496년(연산군2년 병진년) 겨울 88세로 별세하셨는데 친정아버지는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제평공(齊平公) 권맹손(權孟孫:1390-1456)이고, 할아버지는 성주목사(星州牧使) 권상(權詳)이며, 증조는 영해부사(寧海府使) 권군보(權君保)이다. 외조는 종성부사(鐘城府使) 남적(南績)으로 본(本)은 의령(宜寧)이다. 또한 처외조 남씨(南氏)의 족보(族譜)를 상고(詳考)하건대, 제평공(齊平公) 권맹손은 곧 의정부좌찬성 증영의정 남을경(南乙敬)의 손녀사위이고, 찬성(贊成) 남적(南績)은 곧 남을경의 아들이며, 남적은 태조때 영의정을 지낸 충경공(忠景公) 남재(南在:1351-1419)의 종형제(從兄弟)이다. 

 

길잡이가 되신 외조(外祖) 권맹손(權孟孫)

학조대사가 출가하기전 중국 사신길에 13세의 외손자를 동행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찰라를 피해 출사하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판관공(휘 계권)께서  권맹손(權孟孫)의 사위가 됨으로써 자식들에게 출사의 길을 마련해 줄 수 있었고 이는 안동김씨 역사에서 분수령이 되었다.

 

권맹손(權孟孫,1390 - 1456)은 1408년(태종8년) 문과에 급제하고, 1429년(세종11년)에는 문과중시(文科重試:승진시험)에도 급제한 수재였다. 이조판서 예문관 대제학으로서 세종조의 문병(文柄:學文과文治상의권리)을 좌우 하였으며,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1388 - 1443)과 같은 문사와의 교유도 깊었다.

 효백(),  송당(), 시호 제평()
인물
조선
1390년(고려 공양왕 2) ~ 1456년(조선 세조 2)
문신
예천()
이조판서, 중추원사

생애 및 활동사항

1408년(태종 8)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427년(세종 9) 문과중시에 역시 을과로 급제하였다. 검열로 벼슬을 시작하여 1418년(태종 18) 헌납이 되었다. 1419년 병조정랑으로 경차관(敬差官)의 임무를 띠고 대마도 정벌군의 제장(諸將)과 선박들의 운용을 감독하였다.

이어 1421년 장령이 되고, 이듬해에는 강원도와 평안도에 기근이 들어 굶어죽는 자가 많이 생기자 의정부사인으로서 강원도에 파견되어 그들을 구휼하였다. 1425년 강원도찰방으로 나갔다.

1430년에 우사간, 이듬해 동부대언(同副代言), 1434년 좌승지, 1437년 형조참의, 1441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동지중추원사·한성부윤·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특히, 세종 때에는 아악 정리사업에 심혈을 기울여, 음악가 박연(朴堧)의 의견을 따라 세종의 악장사업에 적극 협력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이조판서로서 의창제도의 근본적인 모순과 운영의 불합리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한편, 관리들의 부정·부패·비리를 엄격하게 척결, 추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뒤 행중추원부사(行中樞院副使)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제평(齊平)이다.

 

행 중추원 부사 권맹손의 졸기(세조 2년 10월 15일 신해 1번째기사 1456년)

행 중추원 부사(行中樞院副使) 권맹손(權孟孫)이 죽으니, 조회와 저자[朝市]를 정지하였다. 권맹손의 자(字)는 효백(孝伯)이니, 예천군(醴川郡) 사람이다. 과거에 올라 예문 검열(藝文檢閱)에 선보(選補)하였고, 정미년 1427 세종 9년) 중시(重試 이미 과거에 급제한 조정의 관리들이 다시 치르던 시험. 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정3품 당상관(堂上官)에 승진시켰음.) 에 합격하여 벼슬을 거치어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제수하였고, 여러 번 옮기어 공조 판서(工曹判書) 숭정(崇政) 계급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죽으니, 나이 67세였다. 시호(諡號)를 제평(齊平)이라 하였는데, 마음 가지기를 능히 엄장(嚴壯)하게 하는 것이 제(齊)이고, 일을 다루기를 법제가 있게 하는 것이 평(平)이다.

 

 

예천권씨의 세계도로 시조는 흔적신(昕迪臣)입니다.

권맹순의 세계도 http://www.surname.info/gwon/ye_cheon-roots.html 

역사

시조 흔적신(盺廸臣)은 고려 중엽 보승별장을 지냈다. 3세 흔수창(昕壽昌), 5세 흔승조(昕昇朝)로 이어진다.

6세손(六世孫)이자 중시조 흔섬(盺暹)은 예빈경(禮賓卿)을 역임하였는데, 고려 충목왕(高麗 忠穆王)의 이름이 왕흔(王昕)이라서 국명(國命)에 의해 며느리의 성을 따라(權)으로 성(姓)을 바꾸어 권섬(權暹)으로 개명하였으며 충목왕 붕어 이후 1349년 권흔섬(權昕暹)으로 재차 개명하였다고 한다.

권흔섬(權昕暹)의 증손(曾孫)인 권맹손(權孟孫)이 1408년(조선 태종 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이르렀다.

그리고, 권선(權善)의 아들 오행,오기,오복, 오윤,오상 등 5형제가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서는 '오복문(五福門)'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조선 연산군 시절의 무오사화(戊午士禍) 이후 많은 자손들이 안동 권씨로 흡수되었다.

권오상의 손자 권문해(權文海)가 퇴계 이황(李滉)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