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전투https://namu.wiki/w/%EA%B3%A0%EC%B0%BD%20%EC%A0%84%ED%88%AC
탄생
676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225년이 흘렀다. 태사공은 신라 효공왕 5년(901년 신유)에 경주 흥덕궁(興德宮)에서 탄생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뿌리를 추적할 수 없고 고창성주 이전에 어떤? 삶을 살으셨는지 알 수 없어 숙제로 남았다. 봉의 눈과 용의 수염, 별의 정기와 호랑이의 위엄을 갖추셨다는 기록으로 보아 늠름한 기상을 엿 볼수 있다.
년표
년도 | 왕대 | 년령 | 기록 | ||||||
901 | 신라 효공왕 5 | 1 | 경주 흥덕궁(興德宮)에서 탄생하셨다고 전승하는데 선대를 알 수없다. 후삼국시대로 900년 견훤은 완산주를 도읍지로 후백제라 하고 901년 궁예는 양길의 군대를 물리치고 소백산맥 이북을 평정하여 철원을 도읍지로 태봉을 세웠는데 기선을 잡기위한 치열한 각축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 ||||||
926 | 신라 경애왕 3 | 26 | 고창성주가 되셨는데 그 이전의 행적은 호족으로 고창(안동)지역에서 호장으로 활동하셨을 것으로 추정한다. | ||||||
927 | 신라 경애왕 4 | 27 | 견훤이 경주까지 쳐들어와서 경애왕을 살해하고 왕비를 능욕하며 재물을 함부로 빼앗아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9월 왕건은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구원하러 왔으나 공산성 전투에서 대패하여 신숭겸, 김락 등 많은 장수와 군사를 잃은 채 겨우 목숨을 건져 피신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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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9 | 고려 태조 12 | 29 | 후백제군에 의해 포위된 고창 지역을 구원하기 위한 고려의 원병이 시작되어 이듬해 정월까지 약 두 달 동안 계속되었다. | ||||||
930 | 고려 태조 13 | 7월 견훤이 직접 갑병 5,000명을 이끌고 출정, 의성부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12월 후백제와 고려가 운명을 건 고창의 병산 전투가 있었다. 그곳 호족으로 고창성주 김선평, 권행, 장정필 등은 병사와 식량으로 고려를 도와 3~4일 간의 접전 끝에 지원를 받은 고려군이 후백제군 8,000명을 사살하고 대승을 거두었는데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때 30고을과 동해안 지방의 명주(현재 강릉)에서 흥례(현재 울산)에 이르는 100개의 성이 왕건에게 귀부했다. | |||||||
935 | 신라의 귀부(歸附)를 받은 고려는 그 힘이 더욱 커졌다. | ||||||||
936 | 고려가 후백제를 멸하고 삼국을 통일하였다. |
시대적인 배경
군웅활거하던 시대로써 각처에서 호족들이 춘추전국하였으니 신라의 천년사직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치열한 각축전속 끊임없이 견훤(867 - 936)과 양길 그리고 뒤를 이은 궁예의 공격에 시달렸는데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지방의 성주들에게 함부로 나가서 싸우지 말고 성을 굳게 지키라는 지시만 할 뿐이었다.
후삼국시대로 견훤은 900년(효공왕 4)에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로 도읍을 옮기고 후백제(後百濟)라 하고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궁예는 898년 패서도(浿西道)와 한산주(漢山州)의 성들을 점령하고 양길(梁吉)을 물리치고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 전체를 평정하고는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철원을 도읍지로 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이라 하였다. 그는 세력이 커지자 독선과 아집에 빠져 폭군화 되어가고 있었다. 이는 그 권위를 왕건에게 빼앗기게 됨을 스스로 자초하여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여 개경을 도읍지로 하였으니 한반도의 주체가 되려는 후백제 고려의 각축전은 더욱 치열하였고 신라는 망국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고려 개국에 큰 힘이 되신 시조님
926년(신라 경애왕 3), 26세에 고창성주가 되셨는데 그 이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로 견훤(甄萱)과 궁예(弓裔)가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을 때다.
927년(경애왕 4년) 포악한 견훤은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경주까지 쳐들어와서 경애왕을 살해하고 왕비를 능욕하며 재물을 함부로 빼앗아 그 피해가 막심하였으나 힘이 약한 신라로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궁예를 대체한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하고 개경을 도읍지로 하여 힘을 키우고 있었는데 소식을 들은 왕건은 군사 5천 명을 이끌고 구원하러 왔으나 오히려 대구 부근의 공산동수전투(公山桐藪戰鬪)에서 대패하여 신숭겸, 김락 등 많은 장수와 군사를 잃은 채 겨우 목숨을 건져 피신할 수 있었다.
체제를 정비한 고려군은 929년(태조 12년) 12월 후백제군에 의해 포위된 고창 지역을 구원하기 위한 고려의 원병이 시작되어 이듬해 정월까지 약 두 달 동안 계속되었다. 고려군은 죽령을 넘어 풍기와 영주를 거쳐 봉화 방면으로 진행하여 지금의 안동군 도산면 운곡리를 거쳐 예안 지역에 이르러 저수봉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함으로써 고창 전투가 시작되었다.
○ 고창 전투(古昌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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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년 신라 고창(현재 안동)에서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치른 결전으로 927년 공산 동수 전투와 함께 후삼국 시대 중요한 전투로 꼽히며, 왕건이 승리해 후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지고 후백제는 쇠퇴했다.
배경
927년 9월 후백제군은 견훤이 친히 이끌고 공산 동수 전투에서 왕건을 사실상 사로잡았고, 왕건의 주요 부장인 신숭겸, 김락, 전이갑, 전의갑 형제 등을 전사시키고 대승을 거둔다. 공산 동수 전투 이후 사기가 오른 후백제군은 930년 7월 견훤이 직접 갑병 5000명을 이끌고 출정, 의성부를 공격해 함락시켰고 그곳의 성주이자 왕건의 지지자였던 홍술이 전사했다. 그 해 930년 12월 후백제군은 교통의 요충지 고창으로 몰려들었고 이에 왕건은 그곳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전투 과정
왕건이 고창에 오자 고창성주 김선평, 호족인 권행, 장정필은 왕건을 도울것을 결의하고 군대를 파견하고 병참으로 지원했다. 고려군은 먼저 후백제군의 식량 보급대로 공격해 보급로를 끊었고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고창 병산으로 진격해 3~4일 간의 접전 끝에 삼태사의 지지를 얻은 고려군이 후백제군 8,000명을 사살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결과 및 영향
이 결정적인 전투로 후삼국의 판도는 바뀌었고 경상도 일대의 견훤 세력을 몰아낼 수 있었으며, 이어서 영안(현재 안동시 풍산읍), 하곡(현재 안동 부근), 송생(현재 청송), 직명(현재 안동 부근) 등 30고을과 동해안 지방의 명주(현재 강릉)에서 흥례(현재 울산)에 이르는 100개의 성이 왕건에게 귀부했다. 신라의 경순왕도 왕건에게 축하 편지를 보내며, 은근히 항복할 뜻을 보였다. 고려 는 이 전투로 후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고창전투와 진모래 전설
929년 안동의 호족인 삼태사(김선평, 권행, 장정필)의 활약에 의해 고려군이 견훤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었는데 전승에 따르면 견훤은 원래 지렁이의 화신이었고 모래땅에 진을 쳐 신변이 위태로우면 모래 속으로 들어가 웬만해선 그를 물리칠 수 없었다고 한다.
삼태사가 현재의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견훤은 그 동쪽 낙동강변 모래땅에 진을 쳐 대전하였는데, 싸움이 수십 번 계속되어도 끝이 나지 않고 견훤은 싸우다가 불리해지면 모래 속으로 들어가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삼태사 군사들은 전략을 세워 못을 만들어 물속에 소금을 수없이 넣어 염수를 만들어 놓고 접전했다.
치열한 접전은 계속되었고 견훤은 싸움이 점점 불리해지자 당황하여 지렁이로 둔갑해서 모래 속으로 기어들었다. 삼태사군은 이때다 하여 염수의 못물을 터뜨렸다. 아무리 둔갑한 지렁이일지라도 견딜 재주가 없었다. 견훤은 겨우 목숨만 건져 패주 하여 안동 땅에서 물러갔다고 한다. 또 ‘밥 박골’의 안중 할머니가 고삼 뿌리를 섞은 독한 술을 빚어서 후백제군의 장수들에게 제공하여 대취하게 한 후, 이 사실을 삼태 사군에게 통지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의 시랑 김악(金渥)이 생포되고 전사가 8천여 명에 이르렀다. 」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하신 태사공 시조님
고창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하자 영안, 하곡, 직명, 송생 등 30여 군현이 고려에 귀부하였으며, 다음 달에는 강릉 지역에서 울산 지역에 이르기까지의 110여 개 성이 뒤 따랐는데 주도권이 고려로 넘어가면서 결국 신라는 고려에 자진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산성 전투에서 크게 패한 고려 그러나 삼태사의 도움을 받아 후삼국 통일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호족, 고려를 건국하는 데 이바지한 정치 세력
삼태사도 호족출신이고 호장을 거치셨는데 지방 토착세력인 이에 관하여 알아보자. 통일 신라 말기ㆍ고려 초기에, 지방에서 성장하여 고려를 건국하는 데 이바지한 정치 세력. 대개 촌주(村主) 출신이며, 고려의 중앙 집권 체제가 이루어지면서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거나 향리로 전락하였다.
신라말∼고려초에 활동한 지방세력으로서, 장군(將軍)·성주(城主)·성수(城帥)·수(帥)·적수(賊帥)·적(賊)·웅호(雄豪)·호걸(豪傑)·호족(豪族) 등 다양하게 불리던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그 특징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호족은 신라말에 등장한 새로운 사회세력이다. 둘째, 호족은 지방에 기반을 가진 세력이다. 셋째, 일정한 지역에서 백성을 직접 지배하며 독자적 군사력을 보유했다. 넷째, 신라의 골품체제로부터 벗어나려는 경향이 강했다.
신라말에 호족이 등장하게 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신라 하대에 진골귀족의 수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신라 말에 골품귀족의 수가 크게 늘어나자 진골이라도 높은 관등·관직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으며 경쟁이 치열해졌다. 경쟁에서 진 집안 사람들은 지방으로 낙향하여 정착하였고, 자연스럽게 지방세력으로 변했다.
둘째, 중앙과 지방을 차별하는 골품제의 특성 때문이다. 신라의 골품제는 중앙의 진골귀족이 지닌 특권을 보장하는 제도였다. 이 때문에 지방사회의 실력자들은 중앙으로 진출하기보다 지방에서 세력기반을 확대해 정치·군사적 실력자로 성장하는 길을 택해야 했다. 이들은 잠재적인 독립세력으로서 적절한 기회가 오면 언제든 신라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입장이었으며, 신라의 지방통치가 현저히 약화된 신라 하대에 마침내 기회가 온 것이다. 특히 진성여왕 때에는 전국이 내란 상태에 놓이며 지방세력의 호족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호족은 그 출신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 낙향한 귀족출신의 호족이다. 이들은 국가의 사민(徙民)정책이나 진골귀족의 분지화(分枝化)로 인한 자기도태 과정에서 지방으로 낙향했다. 특히 5소경(小京)과 9주(州)의 치소(治所)를 중심으로 정착하여 정치·경제적 기반을 구축하고 훗날 호족으로 성장했다. 명주(溟州)를 중심으로 성장한 김주원(金周元)계의 호족이 대표적 사례이며, 또한 서원경(西原京;청주), 중원경(中原京;충주) 등도 유력한 지방세력의 거점이 되었다.
둘째, 군진(軍鎭)을 기반으로 성장한 호족이다. 신라는 변경 수비를 위해 곳곳에 군진을 설치하였는데, 황해도 평산(平山)지방의 패강진(浿江鎭)과 전라남도 완도에 설치한 청해진(淸海鎭)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경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변경지역이었던 패강진은 신라의 지방통제력이 약해지자 가장 먼저 중앙정부의 통제를 벗어났다. 또, 청해진의 장보고(張保皐)는 해적을 소탕하고 황해·남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해 무역을 독점하며 부를 축적했다.
셋째, 촌주(村主)출신의 호족이다. 촌주는 촌락의 정무를 담당하는 대표적 재지세력(在地勢力)이었다. 촌주는 국가로부터 촌주위답(村主位畓)을 받는 등 정치적 지위를 인정받는 존재였으며, 경제적으로도 일반 촌민보다 우월한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군현 정도이거나 그보다 작은 지역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확실한 사례가 기록으로 남진 않았지만, 군(郡)·현(縣)의 성(城)을 거점으로 활동하며 성주(城主)라고 불리던 호족들 중에는 촌주 출신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호족 [豪族] (두산백과)
안동은 본향
김창협이 기록한 안동김씨 태사묘단기(太師墓壇記) 처음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시조 태사공의 휘(諱)는 선평(宣平)이니 신라말에 고창성주(古昌城主)가 되었다.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을 토벌함에 공이 권행(權幸) 장길(張吉)과 더불어 군(郡)으로서 귀부(歸附)하니 태조가 얻어 드디어 병산의 승첩이 있고 이로 말미암아 의성(義聲)이 더욱 떨치었으며 마침내 견훤을 멸하게 됨은 공등 3인의 힘이다. 공을 봉함에 으뜸으로 대광(大匡)에 배하고 권행과 장길로 대상(大相)을 삼으며 모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호(號)를 주고 태사의 벼슬을 시키며 고창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하였다. 공이 卒함에 안동의 백성이 그 공덕을 생각하여 부사(府司)에 묘(廟)를 세우고 권(權) 장(張) 이공(二公)과 함께 향사하여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
고창지역이 삼태사의 공헌에 힘입어 견훤의 대군을 병산에서 물리치니 고려개국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에 태조 왕건은 동쪽이 평안해졌다는 뜻으로 안동부으로 개칭하였는데 『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상주목 안동부(安東府)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안동부는 원래 신라의 고타야군(古陁耶郡)인데, 경덕왕이 고창군(古昌郡)으로 고쳤다. 태조 13년(930)에 후 백제왕 견훤(甄萱)과 이 군 지역에서 싸워 승리하였는데, 그때 이 군 사람인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 등이 태조를 도와 공로가 있었으므로, 김선평을 대광(大匡)으로, 권행과 장길은 각각 대상(大相)으로 임명하고, 군을 안동부로 승격시켰다가 후에 영가군(永嘉郡)으로 하였으며, 성종 14년(995)에 길주자사(吉州刺史)라고 불렀다. 현종 3년(1012)에 안무사로 하였고 9년(1018)에 지길주사(知吉州事)로 고쳤으며, 21년(1030)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그러한 연유로 安東을 삼태사의 관향(本貫)으로 하사받았고 안동부민들은 삼공신의 공덕을 기리고 찬양하기 위하여 부중에 廟를 세우고 춘추로 제향을 거행하여 義行을 추모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太師廟는 안동시 북문동에 위치한다.
태장재사
시조 김선평(金宣平, 901~?)의 묘단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워졌다. 영조 25년(1749)에 처음 지어졌고, 정조 17년(1793)에 다시 지어진 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김선평은 고창(안동의 옛 지명) 지역의 성주였다. 930년 고려 태조 왕건(王建, 918~943 재위)과 후백제의 견훤(甄萱, 867~936)이 고창에서 전투를 벌이자, 김선평은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 888~?)과 함께 고려가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왔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고려는 936년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고, 왕건은 세 사람을 공신으로 추대하며 태사(太師)의 벼슬을 하사하였다. 또한 고창에 ‘동쪽을 평안하게 하다’라는 뜻의 ‘안동’이라는 새 이름을 내렸다.
태장재사는 재사, 누각인 이상루(履霜樓), 관리사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년 10월 10일에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재사 건물은 경내에서 가장 안쪽 높은 곳에 세워져 있다. 제수를 준비하는 유사실, 제관들이 사용하는 참제원실과 전사청 등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공간과 외지에 사는 후손들이 모였을 때 사용하는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상루는 제사를 마친 후 음식을 나누어 먹거나 문중 회의를 여는 장소로 사용된다. 위층은 창호로 된 문을 달고 밖으로 쪽마루를 돌렸으며, 계단이 있는 자리를 제외한 모든 면에 난간을 달았다.
태사공 이후의 세거지
1,
2, 김득우가 하회리 풍산류씨 입향조 류종혜의 숙부인 류개(柳開)의 사위임]을 기반으로 풍산읍 불정촌(佛頂村,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하리리 부)에 정착하였다.
3, 김삼근이 불정촌에서 지금의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당시에는 금산)에 입향하였다.
http://www.sungssi.com/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1000000&gisa_idx=11271
http://www.gotaek.kr/coding/sub4/sub2.asp?code_area=1&menu=3&sv=&seq=35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5669
https://www.duhocchina.com/wiki/ko/%EC%95%88%EB%8F%99_%ED%83%9C%EC%82%AC%EB%AC%98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519
https://ncms.nculture.org/traditional-stories/story/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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