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강화도 수비 담당자는 검찰사 김경징(金慶徵 1589~ 1637)으로 그는 영의정 김류[金瑬 1571~ 1648 |자: 관옥(冠玉)|호: 북저(北渚)|시호: 문충(文忠)]의 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주색에 빠져 근무를 게을리하였고 심지어 세자빈 강씨마저 괄시했다고 합니다. 당시 지휘체계는 엉망이었고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침공준비를 완비한 청군은 1만 6천 명의 병력으로 1637년 1월 22일 일제히 공격 개시하였고 바로 그날 강화도는 청군에 의해 점령당하였습니다. 검찰사 김경징, 부검찰사 이민구는 겁에 질려 어찌할 줄 몰라 쩔쩔맸고 주사대장(舟師大將) 장신은 해전을 벌이다 말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제대로 된 저항 한번 못하고 강화도는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상황은 미루어 짐작해봐도 그 비참함은 가히 극에 달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김상용은 죽음을 준비하였습니다. 77세의 그였지만 왜 더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이와 반대로 목숨을 부지하고자 도망가는 관리들도 많았습니다.
--생략 .- 1637년 정월 적이 강화에 입성하자 선원 선생은 남문에 올라 안쪽에 화약궤를 쌓아놓고 좌정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르고자 하였다. 그는 모두 물러가라고 외쳤지만 손자 수전[壽全 - 1637년(13세)]과 종자 한분이 끝내 물러가지 않았고, 별좌, 권순장(權順長 1607~1637 |자: 孝元|시호: 忠烈), 생원 김익겸(金益兼 1614~1637 |자: 如南 |시호: 忠正)이 함께 죽겠다고 애원하므로 할 수 없이 묵인하고 선원은 평소에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갑자기 담뱃대를 가져오라고 하여 불을 당겨 화약궤에 부치니 그 순간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누각은 산산히 공중으로 날아가 간곳이 없고 문루에 있던 사람은 자취도 찾을 수 없이 되었다. 이에 앞서서 계하에 있던 사람이 김상용 선생에게 "배를 마련해 두어 급할 때 대비하십시오"하고 권했으나 그는 "전하께서 적에게 포위당해 계시어 안후를 알 수 없고 종묘사직과 원손께서 모두 여기 계시니 만약 불행한 일이 있으면 죽을 뿐이요. 어찌 살기를 도모한단 말이요" 하고 응하지 않아 그 뒤에는 아무도 감히 권하지 못했다. 김상용 선생은 위인이 성실 순후하고 겸손 신중하였으며 겉과 속마음이 한결같았고 덕이 높은 군자로 알려져 있다. --생략. 10) 인용: 강화군청 홈페이지. -출처: http://www.ganghwa.incheon.kr/
물론 그분들의 시신은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의 강화도 선원면 선행리에 있는 충렬사(忠烈祠)는 당시 선원 김상용의 신발이 떨어진 자리라고 하며 이곳에서는 김상용을 비롯한 당시 순절했던 26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매년 10월 이들의 충절을 기리는 제향이 올려지고 있습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석실마을) 산 6번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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