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직계조상님

(10) 조선(朝鮮)의 자존심

추읍산 2009. 6. 16. 09:03

강화도로 가는 길이 청군에 의해 막히자 인조대왕(仁祖大王 1595~ 1649)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습니다. 그때 인조는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 1645)와 문무백관(文武百官)을 거느리고 청군에게 대항하였습니다. 신경진[申景禛 1575~ 1643 |자: 군수(君受)|시호: 충익(忠翼)]에게 성(城)을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근왕병(勤王兵) 모집격문을 발하고 명나라에 급사(急使)를 보 내어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청나라 선봉군은 남한산성에 이르고 1637년 1월 1일 청태 종은 이곳에 도착하고 남한산성 탄천에는 청군 20만이 집결하여 성을 겹겹이 포위하여 성은 고립무원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성안에는 군사 13,000명, 식량은 50일 뿐으로 명나라 구원병과 8도 근왕병은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성 밖에서는 무고한 백성이 청군에 의해 무참히 유린당하고 성을 지키는 군사들도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죽어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내 에서는 항복을 해서라도 종묘사직(宗廟社稷)을 구(救)하자는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 1586~ 1647 |자: 자겸(子謙)|호: 지천(遲川)|시호: 문충(文忠)]의 주화파(主和派)와 오랑캐인 청군에게 죽을 각오로 싸워 나라를 지키자는 김상헌(예조판서)의 척화파(斥和派)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두 분은 나라 사랑하는 방법만 틀리지 충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조정은 항복하기로 하고 최명길은 항복문서를 썼습니다. 이를 본 김상헌은 이를 찢었습니다. 이를 최명길은 다시 주워 수습하였습니다. 여기서 열지자도 충신, 섭지자도 충신[烈之者 忠臣, 攝之者 忠臣]이라는 그 유명한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청음 김상헌은 원칙과 절개를 지킨 민족의 자존심이었고 지천 최명길은 현실과 실리를 중시한 민족지도자이셨습니다.

 

조선은 치욕적인 군신관계 설정과 청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하고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항복의례를 행하였습니다. 당시 청은 볼모로 소현세자,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과 끝까지 항전하는 삼학사(三 學士)인 [윤집,尹集 1606~1637 |자: 성백(成伯)|호: 임계(林溪)| 시호: 충정(忠貞)] [오달제,吳達濟 1609~1637 |자: 계휘(季輝)| 호: 추담(秋潭)| 시호: 충열(忠烈)] [홍익한,洪翼漢 1586~1637 |자: 백승(伯升)|호: 화포(花浦)|시호: 충정(忠正)] 등을 데리고 갔습니다. 삼학사는 청에 끌려가서도 끝까지 항거 죽음으로서 충성을 다했습니다. 청에 항복한 치욕을 통분해하던 청음 김상헌은 자결을 시도했으나 나만갑에 의해 저지당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안동의 청원루(淸遠樓)에 거처하다가 그 근처인 학가산(鶴駕山) 아래 몇 칸 초옥을 지어놓고 목석헌(木石軒) 이라는 편액을 달아놓고 울분을 달래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와심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강조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2년 후인 1639년, 이번에는 청은 명나라를 칠 군사를 요구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김상헌은 반대상소를 올려 이 때문에 청의 노여움을 사 심양(瀋陽)으로 70세의 나이로 노구인 몸을 이끌고 압송(押送)되어 갑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다시는 못 올지도 모르는 고국을 떠나가야만 하는 그의 충절스런 마음이 이 시에 녹아 있습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최명길은 조선이 청에 항복하게 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명(明)에 알리고 명나라에 협조하였습니다. 이를 알게 된 청은 최명길마저 심양으로 압송하고 그곳 남관(南館)에서 두 분은 감방 벽 하나 사이로 만났고 서로 조국을 향한 굳건한 충성심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때 김상헌이 최명길을 향해, 양대(兩 代)의 우정을 찾고 백년의 의심을 풉니다. 이에 최명길은 “그대 마음 돌과 같아 끝내 돌리기 어렵고 나의 도(道)는 고리와 같아 믿음에 따라 돈다. ” 라고 말하였습니다. 청나라 연호(年號)를 쓰지 않았다고 심양에 끌려와 위 두 분과 함께 옥고를 치르던 이경여[李敬輿 1585~1657 |자: 직부(直夫)|호: 백강(白江)|시호: 문정(文貞)]가 두 분의 모습을 보면서 지은 시가 있습니다.

 

 

두 어른의 경권(經權)이 각기 나라를 위한 것인데,

하늘을 떠받드는 큰 절개요 한때를 건져낸 큰 공적일세.

이제야 원만히 마음이 합치는 곳,

남관(南館)의 두 노인 모두가 백발일세.

 

 

당시 청 태종은 조국을 향한 김상헌의 충절 어린 기개에 탄복하고 나도 저런 신하를 가져 봤으면 했다고 합니다. 1645년 그의 충성심을 존경한 청 태종은 김상헌, 최명길, 이경여와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 일행을 고국인 조선으로 돌려보냅니다. 김상헌은 귀국할 때 청 태종에게 사배(四拜)하라는 청의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그의 강직 청렴하고 충절스런 마음은 당시 관리들이 부정할 것을 아예 포기했다고 합니다. 귀국한 해인 1645년(인조 23) 좌의정, 1650년 대로(大老)로 양주 석실 마을에서 석실산인(石室山人)으로 여생을 조용히 보내고 1652년 83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합니다. 이후 조선에서 청음 김상헌은 충절의 상징으로 추앙되었고 묘소는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마을에 있습니다. 청음을 깊이 있게 쓴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11) 동아닷컴 신동아 1996,2 전란 속에 꽃핀 이상주의자 김상헌. -- 출처: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702/nd_44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