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수(三壽)는 청음 김상헌의 아들인 김광찬[金光燦 1597~ 1668 |자: 사회(思晦)|호: 운수거사(雲水 居士)]의 세 아들인 김수증, 김수흥, 김수항을 일컫는 말입니다.
김수증[金壽增 1624~ 1701 |자: 연지(延之)|호: 곡운(谷雲)]
김광찬의 장자입니다. 1650년(효종 1) 생원이 되고 1652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 형· 공조 정랑을 거쳐 각 사(司)의 정(正)을 지냈다. 젊어서부터 산수(山水)를 좋아했 다. 1670년(현종 11)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동에 복거할 농수정사(籠水精舍) 를 지었다. 1675년(숙종 1) 성천 부사로 재직 시 막냇동생 수항이 송시열과 함께 유배되자, 그때부터 벼슬을 버리고 농수정사로 들어갔다. 그때 주자의 행적을 모방 그곳을 곡 운이라 하고 조세걸에게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두 동생인 김수흥, 김수항이 죽음에 이르는 화를 입자. 그곳 화음 동에서 1699년까지 10년간에 걸쳐 송풍정, 삼일정, 부지암, 유지당 등 정자를 짓고 그 생애 마지막을 성리학에 심취하고 문학을 즐기며 살았다. (그는 1694년 갑술옥사로 재기용 한성부좌윤, 공조 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치 않았다.) 이후 그는 만년에 금강산 등을 노닐며 시를 짓고 기행문을 쓰고 아름다운 생의 마지막을 보냈는데 사화(士禍)로 목숨을 잃은 두 동생과 대비된다. 30년간 그의 삶의 보금자리였던 곡운구곡은 훗날 정약용, 유인석, 최익현 등 명사들의 순례지로 오늘날에도 문화유적 답사 코스로 주목받고 있다. 78세로 생을 마감하셨다. 춘천에 춘수영당에 배향되고 문집에 곡운집이 있다.
김수흥[金壽興 1626~ 1690 |자: 기지(起之)|號: 퇴우당(退憂堂), 동곽산인(東郭散人) |시호: 문익(文翼)] 김광찬의 둘째아들입니다. 1648(인조 26) 사마시를 거쳐 1655(효종 6) 춘당대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666년(현종 7) 호조판서, 1673년 판의금부사,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1688년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평소 우암 송시열을 숭모하고 주자대전 어류(朱子大全, 語類)등을 탐독하였으며 시폐소(時弊疏)를 올려 백성의 편에서 정치하기를 힘썼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장기(長鬐)로 유배되고 그 이듬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김수항[金壽恒1629~ 1689 |자: 구지(久之)|호: 문곡(文谷)|시호: 문충(文忠)] 김광찬의 셋째아들입니다. 일묘사충 편에서 소개하겠습니다.
육창(六昌)은문곡 김수항의 아들은 여섯 분인데모두 당대의 대학자로써 문화계에 우뚝 섰습니다.
김창집[金昌集 1648~1722|자: 여성 (汝成)|호: 충헌(忠獻)] 큰아들입니다.
일묘사충 편에서 소개하겠습니다.
김창협[金昌協 1651~ 1708 |자: 중화(仲和) |호: 농암(農巖), 삼 주(三 洲)|시호: 문간(文簡)] 둘째아들입니다. 우암 송시열의 으뜸가는 제자였으며 1669년(현종 10년) 19세로 진사, 1682년(숙종 8) 증광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다. 청풍부사(淸風府使)시 1689년 기사환국으로 부친인 김수항이 사사되자 영평(永平, 지금의 포천)에 산중에 은거 1694년 갑술환국으로 부친의 죄가 사면되고 나서 숙종(肅宗)의 출사요구(대제학 예조판서등)를 사양하고 후에 석실서원에서 후진양성에 일생을 보냈다. 당대 문장의 대가이며 그의 학설은 이기설(理氣設)로 이이(李珥)보다는 이황(李滉)에 가깝고 호론(湖論)을 지지하였다. 문장에 능하였다. 숙종 묘정에 배향되고 석실서원, 영암의 녹동서원에 제향 되었다.
김창흡[金昌翕 1653~ 1722 |자: 자익(子益)|호: 삼연(三淵)|시호: 문강(文康)] 셋째아들입니다. 이단상(李端相)에게 수학하고 1673년(현종 14) 진사, 1684년 장악원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백악(白岳)기슭에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동지들과 산수를 즐겼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부친이 사사되자 형 창협과 함께 영평에 산중에 은거하였다.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나 형 창협과 함께 이이 이후 대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이기설에서는 이황의 주리설(主理設), 이이의 주기설(主氣設)을 절충하는 형 창협과 같은 경향을 띠었다. 한때 형 창협과 함께 석실서원에서 후진양성에 진력하였고 만년에는 양평 서종면 노문리, 포천, 금강산 등 산수 좋은 곳에서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석실서원, 양근(지금은 가평군 설악면)의 미원(迷源)서원, 울진의 신계사(新溪祠), 강릉에 호해정영당(湖海亭影堂)등에 제향 되었다.
김창업[金昌業 1658~ 1721 |자: 대유(大有)|호: 노가재(老稼齊)] 넷째아들입니다. 1681년(숙종 7)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마음이 없어 나가지 않고 한양의 동교송계(東郊松溪 서울 성북구 장위동)에서 전원생활을 하였다. 위 세분 형님과 함께 도학(道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큰 형님 김창집이 1712년(숙종 38) 사신으로 청나라 연경에 가자 동행하고 기행문인 노가재연행일기(燕行日記)를 쓰다. 시, 그림에 뛰어나고 산수화, 인물화를 잘 그렸다. 1721년 신임사화로 큰형 김창집이 진도에 유배되자 울분에 병이 나서 그해에 죽었다. 그의 그림은 아들 김윤겸에 의해 조선후기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화양서원(華陽書院)의 송시열(宋時烈) 인물화, 추강만박도(秋江晩泊圖)가 전하고 저서에 노가재집이 있다.
김창즙[金昌緝 1662~ 1713 |자: 경명(敬明) |호: 포음(圃陰)] 다섯째아들입니다. 조봉원(趙逢源)의 문인이다. 1684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마음이 없어 나가지 않았다. 1689년 부친이 사사되자 학문에만 전념하고 1700년 아버지의 문집인 문곡집을 간행하였다. 1710년 왕자사부(王子師父), 예빈시주부(禮賓侍主簿)를 지내고 문장과 훈고(訓詁)에 능하고 성리학에도 밝았다. 저서에 징회록(澄懷錄) 1권, (20세에 쓰다.) 문집에 포음집 6권이 전한다.
12) 김수증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김창립[金昌立 1666~ 1683 |자: 탁이(卓而)|호: 택재(澤齋)] 여섯째아들입니다. 17세에 서하 이민서의 딸과 혼인하고 18세에 요절했다. 일찍부터 문학에 통달하다. 사(死)후 1684년(숙종 10) 동학(同學)들이 85수의 시를 모아 택재유타(澤齋遺唾)를 간행하다.
13) 참고: 백촌 거사와 함께하는 한시여행. 출처: http://blog.daum.net/baikchon001/998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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