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직계조상님

(8) 병자호란과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형제

추읍산 2009. 6. 16. 08:50

필자의 직계(直系)로 13대조 되시는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 1652 |자: 숙도(叔度)|시호: 문정(文正)], 그리고 그 형님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 1561~ 1637 |자: 경택(景擇)|시호: 문충(文忠)]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두 분은 김극효(金克孝)의 아들이었으나 김상헌은 백부 김대효(金大孝) 앞으로 입적됩니다. 안동에 세 거 해있던 저의 16대조 김번[金璠 1479~1544 |자: 文瑞]이 서울로 이주하면서 그의 자손 중 위 두 분이 가장 현 달하였습니다. 김상용은 1590년, 김상헌은 1596년 출사, 광해군(光海君 1575~ 1641)의 폐모정책(廢母政策)에 반대하고 정계 은퇴하였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해 정의가 구현되자 정계에 복귀하였습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은 당시 명(明)나라를 향한 사대주의가 가져왔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로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바로 읽지 못하고 이로 말미암은 숭명배금(崇明排金) 정책은 후금 누루하치의 대를 이은 훙타이치의 분노를 일으켜왔고 이는 1627년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을 불러왔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당시 오랑캐라고 얕잡아보던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과 형제의 의를 맺었고 후금군은 철수하였습니다. 1636년 4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연호(年號)를 숭덕(崇德)으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에 대하여 여러 무리한 요구와 형제의 의에 서 군신(君臣)의 관계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를 거절한 조선은 1636년(인조 14년) 12월 4일 10만 대군을 동원한 청으로부터 침입당하는 병자호란을 불러오고야 말았습니다. 당시 야만시 되던 청군은 압록강(鴨綠江)을 넘어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 1594~ 1646|자: 영백(英伯)|호: 고송(孤松)|시호: 충민(忠愍)]이 지키는 백마산성(白馬山城)을 피해 서울로 진격하였습니다. 그들은 10일도 안 되어 서울에 육박하고 조선은 유린 되었습니다. 당시 원로대신(元老大臣)인 선원 김상용은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 강씨와 원손,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급히 피난하였습니다. 인조와 신하들은 강화도로 가는 길이 청군에 의해 막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