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贊成公(達行) 가문

저희 가문 6대에 걸친 호패

추읍산 2009. 6. 18. 08:27

 

 

 

 

저의 집의 호패를 소개합니다. 저는 ①(金達行)의 8대 종손입니다.

 

 

 

①8대조 김달행(金達行 1706~1738 숙종 병술 11월11일생)贈左贊成

 

죽취 김제겸(金濟謙 1680~1722)의 넷째 아들이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증조 할아버지 문곡 김수항, 1722년 신임사화때 할아버지 몽와 金昌集, 아버지 죽취 金濟謙께서 사사( 死)되시었다. 이때 큰형님 취백헌 金省行마저 고문으로 장사(杖死)되시었다.

 


 

한글박물관에 소장된 현대어 번역 돌아가신 아버님의 유서에 의하면 (충민공 죽취 김제겸 할아버지께서 1721년 12월 12일 울산으로 유배당하시고 나서 다음 해인 1722년 4월 24일 유배지를 찾아온 셋째 아들 미호 김원행 할아버지께 유언하시고 한글로 써 주신 것을 미호 할아버지께서 정리(整理)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시 상황이 처절하였다.

 

 

 

유언에 의하면 (내가 이제 죽게 되니) 달행(金達行)은 글공부가 끊기게 되어 가히 애닯지만, 장인 섬기기를 나를 섬기듯 하며 글을 배우도록 하여라. 라는 내용이 있다. 조선 유일의 일묘사충(一廟四忠) 산증인의 중심에 계셨던 할아버지께선 그러나 4대에 걸친 피눈물을 목격한 탓인가? 33세로 짧은 생을 마감하셨다. 묘소는 양평군 개군면 향리 128-3이며 兄 渼湖 金元行이 주선하시고 표(비석)는 孫男 영안 부원군 金祖淳이 세우다.

 

 

 

②7대조 김이기(金履基 1724~1790 경종 갑신 11월 17일생)

字 德汝, 光州牧使, 贈吏曺判書 (호패를 이어받지 못했다.)

 

김달행의 장자이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할아버지께선 이모인 혜경궁 홍씨의 어머니, 한산이씨의 보살핌 속에서 삶을 이어 가셨다.

 

 

 

한중록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이모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서 이종들을 자식같이 불쌍하게 여겨 양식과 옷을 대여 주셔서 배고픔과 추위를 잊게 하였다고 기록해 당시 상황을 짐작게 한다. 어렸을 적들은 구전에 의하면 공께서는 공부하실 때 훼초리로 종아리맞으시며 구더기를 파냈다고 한다. 엄격한 스승의 가르침일 것이다.

 

 

 

 ③6대조 김용순(金龍淳 1754~1823영조 갑술 2월 5일생)

字 施伯,1777년(정조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여러 외직으로 전전하시다가 1821년(순조 21) 황주목사를 마지막으로 귀경 잠시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증 좌찬성이다.

 

 

 

④5대조 김유근(金逌根(1785~1840 정조 을사 9월 19일생)

字: 景先. 號: 黃山. 시호: 文貞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장자이나 종백부인 김용순에게 입후 되었다. 1810년(순조 10년) 식년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판돈령부사에 이르렀다. 황산 김유근은 한 때 군국의 사무를 짊어지시기도 했으나 정치보다는 학문과 예술을 더 사랑하신 분입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이재 권돈인(彛齋 權敦仁 1783~ 1859), 동리 김경연(東籬 金敬淵 1778~1820), 그리고 선배이시나 각별하신 두 분,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 1847), 문암 유본학(問菴 柳本學 1770~?, 자: 伯敎) 등과 학문을 연구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하였는데 이분들은 19세기 문화계에 한 축을 이루었던 분들입니다.

 

 

 

⑤高祖 김병주(金炳㴤 1827~1887 순조 정해 1월 30일생)

 

字: 範初. 號: 小山 . 시호: 孝文

 

좌의정 春山 金弘根의 둘째 아들이나 이조판서 김유근에게 입후 되었다. 1851년 정시문과 을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침. 1863년 흥선 대원군 집권 이후에도 병조판서 이조판서 좌참찬 등을 역임하고 1875년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1885년 판돈령부사에 이르렀다. 강직(剛直)하셨다고 전한다.

 

 

 

 ⑥曾祖 김정규(金定圭 1862~ 1903 철종 임술 7월 14일생)

字: 戒前. 號: 兼山

 

1879년(고종 16) 18세로 식년시 병과에 급제하시고 1883년(고종 20) 선교관, 1886년 여주목사, 1890년 성균관 대사성, 1893년(고종30) 이조참의, 1899(고종 36) 종2품 가선대부 궁내부 특진관에 이르는 놀라운 출사모습을 보이십니다. 구한말 문호개방이라는 여명기를 격동(동학농민운동, 갑신정변 등) 속에서 보내셨는데 1903년(고종 40) 42세로 짧은 생을 마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