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贊成公(達行) 가문

순원왕후의 슬픔

추읍산 2009. 6. 22. 13:41

조선왕조실록의 김유근의 졸기를 보고 느낌 점을 후손의 처지에서 쓴 글입니다.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김유근(金逌根)이 졸서(卒逝)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중신(重臣)의 곧고 성실한 모습과 넓고 높은 식견과 밝고 통달한 재주를 다시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또한 의리로 고락을 같이하고 능히 선대(先代)의 무공(武功)을 뒤이어 변함 없이 나라를 위하여 근로한 것이 오래 드러났으니 국가에서 의중(倚重)한 것이 어떠하였겠는가? 불행히 집에서 병으로 오래 앓아 내가 보지 못한 지 이제 몇 해 만에 문득 서단(逝單)을 보니 내 마음이 이처럼 몹시 슬픈데, 더구나 우리 동조(東朝)의 매우 절박한 슬픔이겠는가? 졸한 판돈녕 김유근집에 동원 부기(東園副器)1부(部)를 실어 보내고 원치부(元致賻) 외에 별치부(別致賻)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넉넉히 실어 보내게 하고, 성복(成服)하는 날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라.”하였다.


김유근의 자(字)는 경선(景先)인데,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아들이다. 성품이 결백하고 솔직하며 곧고 성실하여 뜻에 옳지 않은 것을 보면 문득 용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굽히지 않고 귀한 체한다는 이름이 있었는데, 만년에는 절조를 굽혀 공근(恭謹)하였으나, 그 미워하는 것이 너무 심하므로 남을 용납하는 도량에 있어서는 끝내 논할 만한 것이 있었다. 임진년이후로 군국(軍國)의 사무가 그 몸에 모였는데, 공사(公事)에 진력하여 사정(私情)을 끊었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요구하지 못하니, 중외(中外)에서 모두 칭찬하였다. 사무의 경륜(經綸)은 그의 잘하는 바가 아니나,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감싸는 일념은 대개 명확하였다. 문학을 좋아하고 시(詩)에 능하였는데 시에는 원대(元代) 사람의 기풍이 있었다. 병을 얻어 말을 못한 지 4년 만에 졸하니, 상하가 모두 탄식하며 슬퍼하였다.

인용: 조선왕조실록.    출처: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영안 부원군 金祖淳(1765~ 1832)은 아들이 셋이 있습니다. 큰아들에 황산 김유근(黃山 金逌根 필자의 5대조, 1785~ 1840), 둘째는 취정 김원근(翠庭 金元根(1786~ 1832). 셋째는 하옥 김좌근(荷屋 金左根(1797~ 1869) 입니다. 순원왕후(1789~1857)는 큰 딸입니다. 가장 촉망받는 아들 황산 할아버지는 그러나 종가댁의 대를 이어가려는 부원군 할아버지의 큰 뜻에 따라 종 백부인 김용순(金龍淳 저의 6대조 1754~ 1823) 에게 입후 되었습니다.

 

황산 할아버지는 세칭 안동김씨 1차 세도정치 때 실세라고 합니다. 부정적 의미의 세도정치, 그러나 또 다른 역사적 기록은 황산 할아버지의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이 압도적 이어서 후손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합니다. 시, 서, 화 3절로 이름을 떨친 황산 할아버지는 19세기 전반부 선배이시나 각별한 자하 신위, 문암 유본학 , 석교사이로 일컷는 추사 김정희, 이재 권돈인, 등과 학문을 연구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하였는데 이분들은 19세기 문화계에 한 축을 이루었던 분 들입니다.

 

1835년(헌종 1년)경쯤 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사 김정희의 소개로 알게 된 유진길로부터 중국 일본 이외에 천주교와 서양이라는 또 다른 넓고 큰 세상을 알게 됩니다. 세분은 이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당시 안동김씨의 천주교에 대한 정책은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황산은 1837년 말경부터 병을 얻어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되고 은퇴하십니다. 여기에다 실어증까지 겹쳐 고생하십니다. 유명한 묵소거사자찬 시는 이때(1837~1840) 탄생합니다. 이를 통한 추사 와의 가슴 뭉클한 우정은 2006년, 추사 서거 150주년 기념전에서 새롭게 조명되었습니다.

 

순원왕후는 1828년 어머님인, 부부인 청송심씨가 운명함을 시작으로 1830년 외아들 효명세자를 잃었고 1832, 4, 3 부친인 김조순이 별세하였습니다. 같은 해인 5, 12 복원공주가 6, 13일엔 명온공주가 세상을 등집니다. 둘째 오빠인 김원근도 12월 27일 운명하십니다. 1834년 11월 13일, 부군인 순조대왕 께서 붕어하십니다. 가까운 가족과 부군을 잃은 순원왕후의 슬픔은 인생무상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큰 오빠인 황산 할아버지에게 더욱 의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1834, 11, 18일 손자인 헌종이 8세의 나이로 즉위합니다. 순원왕후는 수렴청정하게 되고 이때 순원왕후를 적극적으로 보필한 분이 황산 김유근입니다. 그러나 황산은 위에서 밝힌바와같이 병을 얻어 1837년 은퇴하십니다. 순원왕후 에게는 남동생인 하옥 김좌근이 있었지만, 아직 젊었고 6촌 오빠인 춘산 김홍근(春山 金弘根 1788~1842)이 후원자로 남게 되지만 이미 조정은 풍양조씨의 조만영 일파가 장악하게 됩니다.

 

안동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조만영 일파는 황산 김유근의 병환 중임을 기회로 순원왕후를 압박하고 1839년 기해박해를 일으킵니다. 실어증과 움직이지도 못하는 중병속에서 김유근은 유진길에게 1839, 5 세례(代洗: 사제를 대신하여 예식을 생략하고 세례를 주는 일)를 받습니다. 이때 추사 김정희도 입교하기로 약속했다는데 박해의 광풍 속에서 기회를 잃은 것 같습니다. 기해년인 1839년 조만영 일파에 둘러싸인 순원왕후는 그러나 마음에도 없는 조인영이 지은 척사윤음을 윤허하게 되지요. 수많은 순교자를 낳은 기해박해는 1841년까지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1840, 12, 17 가장 사랑하는 오빠인 황산 김유근이 별세합니다. 당시는 순원왕후께서 수렴청정 하였으므로 김유근 졸기에서의 <하교하기를,> 이는 순원왕후를 가리킵니다. 순원왕후의 슬픈 마음은 이렇도록 구구절절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순원왕후는 8일 후인 12, 25 수렴청정을 거둡니다. 저는 조선왕조실록 속의 여러 사람의 졸기를 보았습니나. 졸기는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가장 정확하게 평가한다고 생각합니다. 뒷부분 김유근의 자는 경선인데 이하 기록은 사관들이 쓴 황산 김유근의 평가입니다. 황산 김유근도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많은 삶의 굴곡 속에서 잘못한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과거를 깊이 반성하고 깨달음으로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