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贊成公(達行) 가문

조선의 그리스도교 박해와 안동김씨

추읍산 2009. 6. 19. 15:08

우리나라 그리스도교 전래는 자생적으로 발생하고 성장한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2,000년 교회사에서 초기 로마박해에 못지않은 수많은 순교자를 낸 조선시대 박해를 제가 여기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까닭이 있습니다. 조선 기독교(천주교를 가리킴)는 이승훈이 북경 북당(성당 이름)에서 1783년 예수회 신부 그라몽 에게 서 세례를 받은 이후 초기 100년 동안을 박해기간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죽어간 10,000여 명의 순교자들! 당시 안동김씨 세도가?들은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었을 까요. (1) 세칭 안동김씨 세도정치 60년이 이 박해기간 속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2) 그리고 세계 기독교 역사상 조선에서의 박해는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처절했습니다. 그러면 안동김씨는 천주교라는 이름으로 전래한 이 기독교와 어떤 관계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대 박해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신유박해와 정순왕후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펴던 정조대왕이 1,800년 붕어하시고 어린 순조가 즉위합니다. 정순왕후는 대비의 자격으로 수렴청정 합니다. 정순왕후의 경주김씨 일파는 노론 벽파로써 당시 정적이었던 남인을 치려는 방편으로 박해령을 내립니다. 물론 명칭은 사악한 교라는 것이지요. 1801년 오가 작통법을 시행하고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 정약용, 권철신,권일신, 중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 등이 귀양가거나 처형되었습니다. 조선 에서의 최초의 박해는 100여 명이 순교하고 400여 명이 유배 되었다고 합니다.

 

2, 영안 부원군 김조순이 순조 대왕을 보필하던 시기(1804~ 1832)

1804년 1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1805년 정월 별세합니다. 김조순은 정조의 유언에 의해 순조를 보필합니다. 이때는 천주교에 대한 정책이 유연(柔軟)하였습니다. 금지령을 푼 것은 아니지만 조정에의한 박해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유박해에 의해 타격을 받은 교회는 다시 재건되고 이에는 신대보, 정하상, 유진길등의 힘이 컸다고 합니다. 1831, 9, 9 조선교구가 설정되리 만치 재건된 조선 천주교회는 1836~ 1838에는 앵베르, 모방, 샤스탕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선교하고 있었습니다.

 

3,기해박해와 안동김씨

여기에선 서울六百年史의 나타난 기록을 옮겨보겠습니다.

 

기해교난(己亥敎難)의 경위

기해교난(己亥敎難)은 두 번째의 천주교 박해로서 24대왕 헌종 5년(1839)에 일어났다. 이 교난의 원인도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이라고 여겨 배척함에 있었으나 내면적으로는 39년 동안 세도를 잡고 있던 시파인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려던 벽파인 풍양 조씨 세력과의 갈등에서 생긴 일이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김조순(金祖淳)은 그 딸 순원왕후를 순조의 왕비로 삼음으로써 1832년에 별세하게 될 때까지 32년동안 세도를 누리다가 이것을 아들인 김유근(金逌根)으로 하여금 물려 받게 하여 순조의 뒤를 이은 손자 헌종 5년에 이르게 하고 이 사이에 신유교난으로 말미암아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갔던 정약용을 1818년에 풀어주며 딸 순원왕후로 하여금 1834년에 즉위한 8세의 손자 헌종을 대신하여 나라 일을 대신 맡아보게 하였다. 따라서 순원왕후도 나라일을 맡아보는 6년 동안에 그 부친의 뜻을 받아 천주교를 감싸주는 태도를 보여 프랑스 성직자들이 입국하여 있음을 알면서도 그대로 보아주고 그의 오빠이던 세도가 김유근으로 하여금 1839년 5월에 세례까지 받게 하였다.

 

이러한 안동김씨일파의 천주교에 대한 관대 정책을 트집 잡아 천주교를 배척하던 벽파의 조만영(趙萬永) 일파는 마침내 기해교난을 일으킴으로써 세도(勢道)를 잡게 되었다. 이보다 20년전인 1819년에 조만영은 그 딸을 순조의 외아들이던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아내로 삼음으로써 1827년부터는 왕궁을 지키는 어영대장이 되고 이 세자가 1830년에 별세하고 그의 아들 헌종이 순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1835년에는 동생인 조인영(趙寅永)을 이조판서로 삼아 그 일파 사람들을 등용하게 하다가 이듬해에는 이를 의금부 판사로 삼아 4명의 천주교 신자를 잡아가두게 함으로써 세도를 잡고 있던 순원왕후 일족을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세도가 김유근이 병으로 누워 있었으므로 조만영은 외손자인 헌종을 더욱 가까이 하여 1838년에는 왕명을 만드는 홍문관 대제학이 되어 오직 하나의 대신(大臣)이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과 손을 잡고 그해 12월에 교회 성물(聖物)을 만들고 있던 권득인(權得仁)을 잡아가둠으로써 천주교 박해의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해년(己亥年) 2월 20일에는 조만영의 조카이던 조병현(趙秉鉉)이 형조판서로 되어 곧 경향 각지에서 많은 교우들을 잡아 가두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3월 초에는 궁녀 박희순(朴喜順) 등 수십명이 잡힘을 비롯하여 6월에는 정하상(丁夏祥) · 유진길(劉進吉) 등이, 7월에는 범주교(范主敎), 정(鄭) · 나(羅)신부 등이 잡히었다. 이 때 형조판서는 5가작통법을 써서 교우들을 남김없이 잡게 하였으므로 경향 각지의 감옥이 교우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신문이 끝나는 대로 사형(死形)이 집행되게 되어 4월 12일에 권득인 · 박희순 등 9인이 서울 서대문 밖 네거리에서 목을 잘림을 비롯하여 전라도, 경상도에서도 많은 교우들이 죽게 되고 8월 14일에는 범주교, 정 · 나신부가 한강가의 새남터에서, 다음의 추석 날에는 정하상 · 유진길 등이 서대문 밖에서 피를 흘리고, 이후 이러한 참수형은 그해 12월 28일까지 이르는 사이에 경향 각처에서 집행되어 이번 박해로 모두 200여명이 순교하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가 진행되는 사이에 조만영은 실제로 세도를 잡고 그해 10월 18일에는 동생인 조인영이 지은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전국에 내려 천주교를 뿌리 뽑도록 명령하고 그달 21일에는 이 동생으로 하여금 우의정 · 좌의정 · 영의정의 자리를 겸하고 있던 독상(獨相) 이지연을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함으로써 풍양 조씨 세도 시절을 가져오게 했다. 따라서 이번의 천주교 박해는 1841년까지 계속하게 되었는데 이 사이에 앞서의 세도가 김유근은 1840년 12월 17일에 죽고 그 누이동생이던 순원왕후도 이달 25일에 나라 일을 맡아보는 자리를 물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풍양 조씨 일족은 헌종이 서거한 1849년까지 10년 동안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한편 기해교난이 일어나자 정하상은 잡힐 것을 알고 미리 상재상서(上宰相書)라는 글을 지어 이를 독상(獨相)이던 이지연에게 올림으로써 천주교가 조금도 그릇된 종교가 아님을 역사적으로 변호하고 주자학의 허례공론(虛禮空論)을 논박하였는데 이 글은 1887년에 향항(香港)에서 책으로 출판되어 중국 전교에도 쓰여진 명저(名著)이었다. 그리고 교난 발생 이후 전교회장(傳敎會長)이던 현석문(玄錫文)은 그 아내, 누님, 딸이 잡혀 순교하였음을 알고도 거지 행세를 하면서 3년 동안에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하여 『기해일기(己亥日記)』라는 자료를 오늘까지 남기게 되었다. 이 기해일기에 수록된 78명의 순교자들 가운데서 가장 훌륭하게 순교한 70인은 김대건 신부들이 순교한 병오교난(丙午敎難) 때의 순교자 9인과 더불어 1925년 7월 5일에 로마 교황청에서 복자위(福者位)에 올림을 받는 시복식(諡福式)을 갖게 되었다.

 

4, 철종 대왕 시기

 헌종이 1849, 6, 6일 23세로 후사 없이 서거하고 강화도에 있던 철종이 19세로 즉위합니다. 순원왕후는 2차 수렴청정에 나서고 김문근 딸 철인왕후를 철종비로 맞게 됩니다. 순원왕후는 천주교를 보호하는 일에 전념한 듯 보였습니다. 김씨 세도가의 천주교 보호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실질적인 박해는 사라지고 체제를 정비한 교회는 1863년 흥선대원군 집권 직전까지 10명의 프랑스 성직자와 20,000명의 신자를 거느릴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5, 흥선 대원군과 병인박해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였습니다. 1866년 당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방법을 찾고 있던 흥선 대원군은 프랑스 성직자를 통한 한, 불, 영 3국 동맹을 맺어 이를 저지하자는 일부 신자들의 건의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불류, 베르뇌 주교의 대원군 면담약속이 지방전교 중이라 늦어지고 러시아의 위협도 한낮 기우라고 믿게 되면서 천주교 박해가 대두 됩니다.

 

박해령은 전국적으로 확산 되었고 이때 순교한 사람이 8,0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프랑스 성직자 12명 중 9명이 순교한 박해는 병인양요를 가져 오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순교성지를 남긴 병인박해는 척화비를 통해 보는 바와 같이 더욱 나라 개방의 문을 굳게 잠그고 발전을 더디게 했습니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조인되면서 100년이 넘게 지속한 조선에서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상. 참고 또는 인용 : 1, 2, 4, 5 . 서울 六百年史

 

맺는말

이상으로 안동김씨 가문과 조선에서의 그리스도교 박해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이는 특정종교를 알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것은 세계 순교 역사상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약 10,000여 명이 피를 흘리며 죽어갔고 이 초기 100년 박해사에서 세칭 안동김씨 세도정치 60년을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순교한 수많은 사람 중 103인은 성인품에 올라 있습니다.

'안동 김씨 > 贊成公(達行) 가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조순신도비(金祖淳神道碑)  (0) 2009.06.28
김병주, 김정규의 교지 등  (0) 2009.06.26
순원왕후의 슬픔  (0) 2009.06.22
옥호정과 백련사  (0) 2009.06.18
저희 가문 6대에 걸친 호패  (0) 2009.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