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조상님을 소개하는 글에서 세도정치와 영안 부원군 김조순에 대하여 후손된 입장에서 글을 쓴 바 있습니다. 한 사람을 평가할 때는 그 사람의 행적(行蹟)이 올바른 생각을 바탕으로 했는가? 그리고 이에 의해서 그 삶의 모습이 전개되었는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에 의해서 나타난 결과도 아름다웠다면 더 바랄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세도정치를 한 김조순 이라고 질타하는 글을 수없이 봅니다. 그러나 정직한 역사적 기록은 김조순이 어린 순조를 보필해 군덕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어린 순조(純祖)를 도와 국구(國舅)로서 30년간이나 보필한 공적이 컸다. 권세를 누리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 아니다. 시벽의 당파나 세도의 풍을 형성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등 올바른 평가가 이루 위지 고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 잘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행착오도 있었을 것입니다. 순조 대왕을 잘 보필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순조 임금님 운신의 폭을 좁혀 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그 기초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세도정치는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김조순은 생전에 부정적인 의미의 세도정치를 계획하지도 시도하지도 않았고 또한,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음에도 온갖 부정적인 글로 김조순을 꾸짖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후손 대의 잘못된 권세의 기반을 닦기 위해서 이를 시도하지 않았음을 물론입니다. 오직 역사가 그렇게 흘러갔음을 통탄할 따름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폐단이 오게 된 것은 김조순 별세 17년 후인 2차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기인 철종 대왕 재위기간(1849~1863)입니다. 이는 김조순과 는 무관합니다. 그분은 생존 시의 전혀 상상도 못 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부끄러운 가문의 모습을 저희 가문 후손들이 속죄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저부터 정직한 삶 속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그렇게 다짐함으로써 국가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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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백과사전에서 김조순 내용을 바로잡았습니다.
이의신청 전의 본문내용
김조순 [金祖淳, 1765~1832]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 정조 때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순조 2년에 딸이 순조의 비로 책봉되면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정조가 작고하자 어린 순조를 도와 국구로서 30년간이나 보필한 공적이 컸다.
본관 안동
호 풍고
별칭 자 사원,시호 충문, 초명 낙순 ·영안부원군
주요저서 《풍고집》
본문
본관 안동. 자 사원(士源). 호 풍고(楓皐). 시호 충문(忠文). 초명 낙순(洛淳). 1785년(정조 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 ·규장각대교를 거쳐 1792년(정조 16)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직각(直閣) ·이조참의(吏曹參議) ·승지(承旨) ·총융사(摠戎使)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등을 지냈다. 1802년(순조 2) 딸이 순조(純祖)의 비(妃)로 책봉되자,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때부터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정조(正祖)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정조가 작고하자 어린 순조(純祖)를 도와 국구(國舅)로서 30년간이나 보필한 공적이 컸다.
그러나 성격이 지나치게 너그러운 탓으로 아들 좌근(左根)의 소실인 나주 기생 나합(羅閤)의 손아귀에서 국사가 농락되는 폐풍을 낳기도 하였다. 정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고,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여주 ·이천의 현암서원(玄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풍고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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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d8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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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d8344 (2009-06-28 13:5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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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신청 내용
안녕하세요.
김조순의 아래 다음 글에서요.
그러나 성격이 지나치게 너그러운 탓으로 아들 좌근(左根)의 소실인 나주 기생 나합(羅閤)의 손아귀에서 국사가 농락되는 폐풍을 낳기도 하였다.
김조순이 1832년에 67세로 별세했고 그때 막내아들 김좌근은 32세입니다.
1, 김좌근은 1825(순조 25) 六品職에 調用되기도 했으나 조정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김조순 별세 6년 후인 1838, 1, 13 과거급제하고부터입니다.
2, 나합은 철종 대왕 재위기간(1849~1863)에 국정을 어지럽힌 여인으로 알고 있는데요(1855년 전후부터 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1832년에 별세하신 김조순이 나합 이라는 여인을 알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3, 김조순은 그 너그러운 성품이 아들 김좌근의 소실인 나합으로 인한 국사가 농락되리 만큼 가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분이 아닙니다.
4,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많은 사람이 나합을 김조순의 소실이라고 쓰고 있고 그로 말미암은 국정의 폐단이 온 것으로 잘못된 지식이 전파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소개한 김조순의 기록이 잘못 전달되고 있는 폐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저는 김조순의 6대손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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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d8344 (2009-06-30 17:23:37)
안녕하세요. 김조순에 관하여 이의 제기한 사람입니다.
내용 중 \"김조순이 1832년에 67세로 별세했고 그때 막내아들 김좌근은 32세입니다.\" 이를 \"김조순이 1832년에 67세로 별세했고 그때 막내아들 김좌근은 35세입니다.\“이 처럼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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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백과사전에 새롭게 반영된 김조순
김조순 [金祖淳, 1765~1832]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 정조 때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순조 2년에 딸이 순조의 비로 책봉되면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정조가 작고하자 어린 순조를 도와 국구로서 30년간이나 보필한 공적이 컸다.
본관 안동
호 풍고
별칭 자 사원,시호 충문, 초명 낙순 ·영안부원군
주요저서 《풍고집》
본문
본관 안동. 자 사원(士源). 호 풍고(楓皐). 시호 충문(忠文). 초명 낙순(洛淳). 1785년(정조 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 ·규장각대교를 거쳐 1792년(정조 16)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직각(直閣) ·이조참의(吏曹參議) ·승지(承旨) ·총융사(摠戎使)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 등을 지냈다. 1802년(순조 2) 딸이 순조(純祖)의 비(妃)로 책봉되자,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때부터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정조(正祖)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정조가 작고하자 어린 순조(純祖)를 도와 국구(國舅)로서 30년간이나 보필한 공적이 컸다.
정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고,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여주 ·이천의 현암서원(玄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풍고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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