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군면 향리가 선영으로 된 역사를 추적하다
시조 김선평(金宣平)
김상헌(金尙憲)-광찬(光燦)-수항(壽恒)-창집(昌集)-제겸(濟謙)-달행(達行)
20세 金達行(1706~1738)
21세 | 履慶 1738~1756 |
履中 1736~1793 |
履基 1724~17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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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 | 明淳 生父 履基 1759~1810 |
祖淳 1765~1832 |
龍淳 1754~1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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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 | 興根 1796~1870 |
應根 1793∼1863 |
弘根 1788~1842 |
左根 1797~1869 |
元根 1786~1832 |
유근逌根 生父 祖淳 1785~1840 |
24세 | 炳德 1825~1892 |
炳始 1832~1898 |
炳溎 1824~1855 |
炳冀 生父 泳根 1818~1875 |
炳地 1830~1888 |
炳㴤 生父 弘根 1827~1887 |
25세 | 宗圭 1862~1922 |
容圭 1864~1902 |
性圭 1846~1896 |
用圭 1867~1927 |
錫圭 生父 炳洙 1864~1905 |
定圭 1862~1903 필자의 曾祖 |
안동김씨 문정공파 세보와 묘표
♢ 族譜: | 字 脩甫 | 肅宗 丙戌 12 月 11 生~ 戊午 6 月 29 日 卒, 贈 左贊成
配贈貞敬夫人 韓山李氏 丙戌生 丁卯 10 月 9 日 卒
父 監司潗祖郡守廷龍曾祖文府使穧外祖參判兪櫶本杞溪
墓 驪州 介軍面 香里 亥坐合窆 誌 兄 渼湖公撰 表 孫男 祖淳撰
♢ 墓表의 일부: 始 葬 驪州 草峴里 先塋之次 丁卯 移奉于其北十餘里趨揖山下香谷里亥坐之原 夫人 李氏 韓山牧隱先生之裔 監司諱潗之女
위를 요약하여 풀이하면,
○ 族譜: 1706(숙종 32)죽취 김제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시고 1738년(영조 14) 운명하시다. -- 지은(撰) 분은 묘지명은 형 미호 김원행이고 묘표는 손남 김조순이다.
○ 墓表: 개군면 향리로 이묘할 때의 흔적을 추가 하였다. 해제하면, 초장은 여주군 등신면(현 대신면) 초현리 선영이다. 9년 만인 1747년(영조 23)에 한산이씨께서 돌아가셨고 이때 북쪽으로 십 리 거리에 있는 추읍산 아래 향곡리로 이묘하고 할머니와 합장 되시었다. 한산이씨는 목은의 후예로 감사 집의 여식이다.
이에 대하여는 필자가 직계조상님을 소개하는 글에 기술하였으므로 더 언급 하지 않겠다. 다만, 공의 조부인 김창집의 집은 연못으로, 그리고 가솔들은 7개 군으로 유배[찬성공께서는 강원도 흡곡(歙谷)] 되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위 하셨을까? 33세라는 짧은 삶을 사신 것도 증조 할아버지 이하 4대의 걸친 피눈물을 목격하신 마음의 병이 가져왔을 것이다.
어디서 사셨을까?
나름대로 추적하였다. 문곡 김수항 할아버지 후손들이 사셨다는 종로구 송석원 길 2, 3, 4, 5일대인(옥인동 47번지) 육청헌(六靑軒) 자리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이곳에서 공의 조부인 몽와 김창집, 부친 죽취 김제겸과 큰형님 취백헌 김성행 이하 6형제가 사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로 가문은 몰락 직전에 놓여 있었다. 부친인 죽취 김제겸은 1722년 4월 24일 유배지를 찾아온 셋째아들 김원행에게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긴다.
-- 생략. (내가 이제 죽게 되니) 달행(金達行)은 글공부가 끊기게 되어 가히 애닯지만, 장인 섬기기를 나를 섬기듯 하며 글을 배우도록 하여라. 이하생략. --
이후 글공부를 하셨는지는 모르겠다(추기: 밝혀진 바로는 가문의 화(禍)의 근원이 된 글공부는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때 할아버지 가정의 어려운 경제사정은 한중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7대조 김이기 편에서 소개하겠습니다.)숙종때 김수항, 경종 때 김창집, 김제겸, 김성행의 4대의 희생은 모두 복권되고 일묘사충(一廟四忠)으로 추앙을 받게 되지만 이로 말미암은 고통은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계속되었을 것이다.
미호 김원행 할아버지가 향리 선영을 잡으시다.
세보상 밝힌 바와 같이 문정공파 세보 金達行편 끝 부분에서 窆誌 兄 渼湖公撰 이라고 기록되었다. 영조 대왕의 출사요구를 사양하고 석실서원에서 후진양성을 위해 일생을 보내신 미호 김원행(1702-1772) 할아버지는 저의 8대조 김달행의 바로 위 형님이시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당숙 김창협의 대를 잇기 위해 그 아들 숭겸에게 입적되었다.) 미호 할아버지는 생가의 선영인 여주군 대신면 초현리를 항상 생각하셨을 것이다. 미호집에서 보면 뱃길을 이용하여 여흥(지금의 여주)을 다니시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신임사화 때(1722) 돌아가신 조부 김창집, 부친 김제겸, 큰형님 김성행의 묘역을 참배함일 것이다. 그리고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운명한 동생 김달행(1706-1738)이 잠든 곳도 살폈을 것이다. 1747년(영조 23) 향곡리(향리)에 저희 선영이 자리 잡은 것은 8대조(諱 達行) 묘역이 조성되었기 때문이고 이는 처음부터 미호 할아버지께서 주선하신것으로 판단합니다.
2014, 11, 25 추기
- 渼湖集卷之十五 墓誌銘
- 從弟修甫墓誌銘 幷序
미호집 제15권
묘지명(墓誌銘)
옮긴이 주 : 여주시 대신면 초현리 초장지 때의 글이다. 이는 글속에서 우산이란 현 몽와(휘 창집 - 죽취( 휘 제겸) _ 취백헌( 휘 성행)이 잠든 곳을 가리키고 공 또한 이곳에 모셔졌기 때문이다. 후 이장지인 현 개군면 향리 128-3도 처음 장사 지낼때의 것으로 판단한다.
종제 수보 묘지명 병서〔從弟修甫墓誌銘 幷序〕
나의 종제 수보는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달행(達行)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고려 태사(太師) 휘 선평(宣平)의 후예로, 좌의정 문정공(文正公) 청음 선생(淸陰先生) 휘 상헌(尙憲)의 5세손이며,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문곡 선생(文谷先生) 휘 수항(壽恒)의 증손이다. 조부인 영의정 몽와 선생(夢窩先生) 휘 창집(昌集)과 부친인 예조 참의 죽취공(竹醉公) 휘 제겸(濟謙)은 모두 임인년(1722, 경종2)의 사화(士禍)를 당하였다. 외조부는 의금부 도사 은진(恩津) 송공(宋公) 휘 병원(炳遠)이 바로 그 분이다.
군(君)은 병술년(1706, 숙종32) 12월 11일에 태어나 무오년(1738, 영조14) 6월 29일에 작고하니, 사망 당시 나이가 33세였다. 군은 자라면서 준엄한 기상이 있어 둘러대거나 악착같이 구는 사람을 보면 그 얼굴에 침을 뱉어주고 싶어 하였다. 성격이 통찰력이 있고 사리에 밝아 사물의 기능에 거의 막힘이 없었으며, 재주 있고 명민한 데다 심지가 굳어 일을 성사시켜 내었기에 아는 사람들은 모두 군을 유용한 인재라고 생각하였다.
군은 황해 감사(黃海監司) 한산(韓山) 이공(李公) 휘 집(潗)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다. 아들 이기(履基)는 현재 상복(喪服)을 그대로 입고 상관(喪冠)을 쓰고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강보를 벗어나지 못했다. 딸은 장녀는 이득상(李得祥)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어리다.
종형 원행이 눈물을 훔치며 명을 쓴다.
驪水之北
牛山之陽
有負才俊抱寃恨而埋者
是吾弟修甫之藏
嗚呼千秋萬歲兮
無或以畊犂見傷耶
우산 남쪽에뛰어난 재주를 지니고도 통한을 품은 채 묻혀 있는 자 있으니
나의 아우 수보의 무덤이로다
아 천년만년 지난 뒤에누군가 밭 갈다가 가슴 아파해주지 않을까
[주D-002]상복(喪服)을 …… 있으며 :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아들이 관례를 행할 기일이 잡혀 있는 상황에서 자최, 대공, 소공의 상을 당하게 되면 그대로 상복을 입고 상관(喪冠)을 쓴다.〔如將冠子 而未及期日 而有齊衰大功小功之喪 則因喪服而冠〕”라고 한 데서 온 말로, 곧 관례를 치를 나이가 되었다는 의미이다.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강여진 (역) ┃ 2013------------------ - -----------------
미호집 제20권 / 제문(祭文)
종제 수보에 대한 제문〔祭從弟修甫文〕
- [주-D001] 수보(修甫) :
- 김달행(金達行, 1706~1738)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수보이다. 미호의 생부인 김제겸(金濟謙)의 넷째 아들이다. 미호가 지은 김달행의 묘지명이 《미호집(渼湖集)》 권15에 〈종제수보묘지명(從弟修甫墓誌銘)〉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 [주-D002] 백춘(伯春) :
- 미호의 자이다.
- [주-D003] 곤궁한 …… 오래되었네 :
- 《시경》 〈소아(小雅) 육아(蓼莪)〉에 “작은 병의 텅 빔은 큰 병의 수치라네. 곤궁한 백성의 삶이 죽음만 못한 지 오래되었네. 아버지가 없으면 누구를 믿으며 어머니가 없으면 누구를 믿을까. 나가면 근심을 품고 들어오면 이를 곳이 없어라.〔甁之罄矣 維罍之恥 鮮民之生 不如死之久矣 無父何怙 無母何恃 出則銜恤 入則靡至〕”라고 한 데서 보이는데, 여기에서는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조부 김창집(金昌集)과 부친 김제겸(金濟謙)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여 김달행이 생전에 지극한 원통함을 품고 곤궁하게 살아서 삶이 죽음만 못했던 것을 이른 것이다.
- [주-D004] 하늘의 …… 이기는 :
- 때로는 사람이 하늘의 이치도 무시하고 나쁜 짓을 할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옳고 그름이 결정되어 하늘의 이치가 결국 사람을 이기게 된다는 뜻으로,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신포서(申包胥)가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는 경우도 있지만,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역시 사람을 능히 이기는 법이다.〔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송(宋)나라의 소식(蘇軾)이 〈삼괴당명(三槐堂銘)〉을 지으면서 이 말을 인용하여 더욱 유명한 격언이 되었다. 《史記 卷66 伍子胥列傳》 《古文眞寶後集 三槐堂銘》 여기에서는 김달행의 조부와 부친을 해친 역당들이 처음에는 천리(天理)를 무시하고 악행을 저질러 하늘을 이기는 듯하였으나 끝내는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역당들은 토죄되고 김달행의 조부와 부친은 신원될 것임을 이른 것이다.
- [주-D005] 여강(驪江) …… 있는데 :
-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함께 죽은 김달행의 조부인 김창집(金昌集), 부친인 김제겸(金濟謙), 맏형인 김성행(金省行)의 묘가 모두 여주(驪州) 등신면(燈神面) 초현리(草峴里)에 있다.
- [주-D006] 이릉(二陵) :
-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世宗)의 능인 영릉(英陵)과 효종(孝宗)의 능인 영릉(寧陵)을 가리킨다.
ⓒ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김광태 (역) | 2013
출처 :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519A_0200_010_0010
풍고집 해제본의 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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