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贊成公(達行) 가문

8대조 김달행의 모습과 개군면 향리가 선영으로 된 역사를 추적하다.

추읍산 2009. 8. 13. 23:35

개군면 향리가 선영으로 된 역사를 추적하다

 

 

 

 

시조 김선평(金宣平)


김상헌(金尙憲)-광찬(光燦)-수항(壽恒)-창집(昌集)-제겸(濟謙)-달행(達行)

 

20세 金達行(1706~1738)

21세                         慶                    
1738~1756
履中
1736~1793
 履基
1724~1790
22세  明淳
生父  履基
1759~1810
      祖淳       
1765~1832
 龍淳
1754~1823
23세 興根
1796~1870
 應根
1793∼1863 
弘根
1788~1842
左根
1797~1869
元根
1786~1832
유근逌根
生父 祖淳

1785~1840 
24세 炳德
1825~1892
炳始
1832~1898
炳溎
1824~1855
 
炳冀
生父 泳根  1818~1875
 
炳地 
1830~1888
 
   炳㴤 
生父 弘根 
1827~1887
 
25세 宗圭
1862~1922
容圭
1864~1902
性圭
1846~1896
用圭
1867~1927
 錫圭
生父 炳洙 
1864~1905
定圭
1
862~1903

필자의 曾祖

 

 

 

 

안동김씨 문정공파 세보와 묘표

 

♢ 族譜: | 字 脩甫 | 肅宗  丙戌 12 月 11 生~ 戊午 6 月 29 日 卒, 贈 左贊成

 

   配贈貞敬夫人 韓山李氏 丙戌生 丁卯 10 月 9 日 卒

 

   父 監司潗祖郡守廷龍曾祖文府使穧外祖參判兪櫶本杞溪

 

   墓 驪州 介軍面 香里 亥坐合窆 誌 兄 渼湖公撰 表 孫男 祖淳撰

 

墓表의 일부: 始 葬 驪州 草峴里 先塋之次 丁卯 移奉于其北十餘里趨揖山下香谷里亥坐之原 夫人 李氏 韓山牧隱先生之裔 監司諱潗之女

 

 

 

위를 요약하여 풀이하면,

 

○ 族譜: 1706(숙종 32)죽취 김제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시고 1738년(영조 14) 운명하시다. -- 지은(撰) 분은 묘지명은 형 미호 김원행이고 묘표는 손남 김조순이다. 

 

 

 

墓表: 개군면 향리로 이묘할 때의 흔적을 추가 하였다. 해제하면, 초장은 여주군 등신면(현 대신면) 초현리 선영이다. 9년 만인 1747년(영조 23)에 한산이씨께서 돌아가셨고 이때 북쪽으로 십 리 거리에 있는 추읍산 아래 향곡리로 이묘하고 할머니와 합장 되시었다. 한산이씨는 목은의 후예로 감사 집의 여식이다.

 

이에 대하여는 필자가 직계조상님을 소개하는 글에 기술하였으므로  더 언급 하지 않겠다. 다만, 공의 조부인 김창집의 집은 연못으로, 그리고 가솔들은 7개 군으로 유배[찬성공께서는 강원도 흡곡(歙谷)] 되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위 하셨을까? 33세라는 짧은 삶을 사신 것도 증조 할아버지 이하 4대의 걸친 피눈물을 목격하신 마음의 병이 가져왔을 것이다.

 

어디서 사셨을까?

나름대로 추적하였다. 문곡 김수항 할아버지 후손들이 사셨다는 종로구 송석원 길 2, 3, 4, 5일대인(옥인동 47번지) 육청헌(六靑軒) 자리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이곳에서 공의 조부인 몽와 김창집, 부친 죽취 김제겸과 큰형님 취백헌 김성행 이하 6형제가 사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로 가문은 몰락 직전에 놓여 있었다. 부친인 죽취 김제겸은 1722년 4월 24일 유배지를 찾아온 셋째아들 김원행에게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긴다. 

-- 생략. (내가 이제 죽게 되니) 달행(金達行)은 글공부가 끊기게 되어 가히 애닯지만, 장인 섬기기를 나를 섬기듯 하며 글을 배우도록 하여라. 이하생략. --

 

이후 글공부를 하셨는지는 모르겠다(추기: 밝혀진 바로는 가문의 화(禍)의 근원이 된 글공부는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때 할아버지 가정의 어려운 경제사정은 한중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7대조 김이기 편에서 소개하겠습니다.)숙종때 김수항, 경종 때 김창집, 김제겸, 김성행의 4대의 희생은 모두 복권되고 일묘사충(一廟四忠)으로 추앙을 받게 되지만 이로 말미암은 고통은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계속되었을 것이다.

 

미호 김원행 할아버지가 향리 선영을 잡으시다.

세보상 밝힌 바와 같이 문정공파 세보 金達行편 끝 부분에서 窆誌 兄 渼湖公撰라고 기록되었다. 영조 대왕의 출사요구를 사양하고 석실서원에서 후진양성을 위해 일생을 보내신 미호 김원행(1702-1772) 할아버지는 저의 8대조 김달행의 바로 위 형님이시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당숙 김창협의 대를 잇기 위해 그 아들 숭겸에게 입적되었다.) 미호 할아버지는 생가의 선영인 여주군 대신면 초현리를 항상 생각하셨을 것이다. 미호집에서 보면 뱃길을 이용하여 여흥(지금의 여주)을 다니시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신임사화 때(1722) 돌아가신 조부 김창집, 부친 김제겸, 큰형님 김성행의 묘역을 참배함일 것이다. 그리고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운명한 동생 김달행(1706-1738)이 잠든 곳도 살폈을 것이다. 1747년(영조 23) 향곡리(향리)에 저희 선영이 자리 잡은 것은 8대조(諱 達行) 묘역이 조성되었기 때문이고 이는 처음부터 미호 할아버지께서 주선하신것으로 판단합니다.

 

2014, 11, 25 추기

 

 

  • 渼湖集卷之十五  墓誌銘 
    1. 從弟修甫墓誌銘 幷序 
    吾從弟修甫姓金名達行。安東人。麗太師諱宣平之後。左議政文正公淸陰先生諱尙憲之五世孫。領議政文忠公文谷先生諱壽恒之曾孫也。祖領議政夢窩先生諱昌集。考禮曹參議竹醉公諱濟謙。皆被壬寅士禍。外祖義禁府都事恩津宋公諱炳遠是也。君以丙戌十二月十一日生。戊午六月二十九日死。死時年三十三。君生而有俊氣。見人之回互齷齪。欲唾其面。性通曉。於事物技能。鮮有滯礙。而其材力精敏。强幹又足以濟之。故知者皆以君爲有用也。君旣早以家禍自廢。平居不甚讀書。然與之論文字談經義。精識往往過人。尤工於古文隷字。能絶逼于古。亦未嘗甚用其力。亦可以見其才矣。惜乎其不能學而成也。雖然。以其之才。生於家國隆平之日。乘時自立。隨其能以致其用。則亦何渠不若人。而流離嶺海。備險艱而極窮約。抱至寃而終其身。天乎豈不悲哉。旣死之越三月二十九日。葬于驪州草峴之卯坐原。夢窩竹醉公之兆次也。生而飮恨。不如死而從先人于地下。此猶足以爲樂歟。君娶黃海監司韓山李公諱潗之女。生三男二女。男履基今因喪而冠。其餘俱不離襁褓。女長適李得祥。次亦幼。從兄元行抆涕而爲之銘曰。驪水之北。牛山之陽。有負才俊。抱寃恨而埋者。是吾弟修甫之藏。嗚呼千秋萬歲兮。無或以畊犂見傷耶。아래 고전번역원의 한글역, 2015, 12, 13 옮김
    미호집 제15권    
      


     
     묘지명(墓誌銘)
     
    옮긴이 주 : 여주시 대신면 초현리 초장지 때의 글이다. 이는 글속에서 우산이란 현 몽와(휘 창집 - 죽취( 휘 제겸) _ 취백헌( 휘 성행)이 잠든 곳을 가리키고 공 또한 이곳에 모셔졌기 때문이다. 후 이장지인 현 개군면 향리 128-3도 처음 장사 지낼때의 것으로 판단한다.
     
     
     

    종제 수보 묘지명 병서〔從弟修甫墓誌銘 幷序
     


    나의 종제 수보는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달행(達行)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고려 태사(太師) 휘 선평(宣平)의 후예로, 좌의정 문정공(文正公) 청음 선생(淸陰先生) 휘 상헌(尙憲)의 5세손이며,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문곡 선생(文谷先生) 휘 수항(壽恒)의 증손이다. 조부인 영의정 몽와 선생(夢窩先生) 휘 창집(昌集)과 부친인 예조 참의 죽취공(竹醉公) 휘 제겸(濟謙)은 모두 임인년(1722, 경종2)의 사화(士禍)를 당하였다. 외조부는 의금부 도사 은진(恩津) 송공(宋公) 휘 병원(炳遠)이 바로 그 분이다.

     


    군(君)은 병술년(1706, 숙종32) 12월 11일에 태어나 무오년(1738, 영조14) 6월 29일에 작고하니, 사망 당시 나이가 33세였다. 군은 자라면서 준엄한 기상이 있어 둘러대거나 악착같이 구는 사람을 보면 그 얼굴에 침을 뱉어주고 싶어 하였다. 성격이 통찰력이 있고 사리에 밝아 사물의 기능에 거의 막힘이 없었으며, 재주 있고 명민한 데다 심지가 굳어 일을 성사시켜 내었기에 아는 사람들은 모두 군을 유용한 인재라고 생각하였다.

     

    군은 전부터 일찌감치 집안이 화를 당한 것을 이유로 벼슬길에 나갈 생각을 접어 평소 그다지 글을 읽지 않았지만, 그와 문자를 논하고 경서(經書)의 뜻을 담론해 보면 정미한 식견이 왕왕 보통 사람들을 능가하였다. 특히 고문(古文)과 예서(隸書)를 잘 써서 고법(古法)에 아주 가까웠는데, 여기에도 그다지 힘을 쏟은 적은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재주를 알 수 있으니, 제대로 배워서 성취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비록 그러나 그의 재주로 집안이 융성하고 국가가 태평한 날에 태어나 시운(時運)을 타고 자립하여 능력대로 역량을 펼칠 수 있었다면 어찌 그가 남만 못했겠는가. 그러나 영해(嶺海)를 떠돌며 고생만 실컷 하고 몹시도 가난하게 살다가 지극한 통한을 품고서 일생을 마쳤으니, 하늘이여!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죽고 나서 3개월이 지난 29일에 여주(驪州) 초현(草峴)의 묘좌(卯坐) 언덕에 안장하였으니, 몽와공과 죽취공의 묏자리 부근이다. 살아서 통한을 머금는 것이 죽어 지하에서 선인(先人)을 만나는 것만 못하니, 이 점은 그래도 낙으로 삼았을 것이다.

     


    군은 황해 감사(黃海監司) 한산(韓山) 이공(李公) 휘 집(潗)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다. 아들 이기(履基)는 현재 상복(喪服)을 그대로 입고 상관(喪冠)을 쓰고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강보를 벗어나지 못했다. 딸은 장녀는 이득상(李得祥)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어리다.
    종형 원행이 눈물을 훔치며 명을 쓴다.

    驪水之北
    牛山之陽
    有負才俊抱寃恨而埋者
    是吾弟修甫之藏
    嗚呼千秋萬歲兮
    無或以畊犂見傷耶

     

    여강 북쪽이며
    우산 남쪽에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도 통한을 품은 채 묻혀 있는 자 있으니

    나의 아우 수보의 무덤이로다

    아 천년만년 지난 뒤에

    누군가 밭 갈다가 가슴 아파해주지 않을까

     

    [주D-001]임인년의 사화(士禍) : 영조의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둘러싸고 소론이 노론을 공격한 사화로, 그 전해인 신축년(1721)에 일어난 사화와 연계하여 신임옥(辛壬獄), 혹은 신임사화(辛壬士禍)라 한다.
    [주D-002]상복(喪服)을 …… 있으며 :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아들이 관례를 행할 기일이 잡혀 있는 상황에서 자최, 대공, 소공의 상을 당하게 되면 그대로 상복을 입고 상관(喪冠)을 쓴다.〔如將冠子 而未及期日 而有齊衰大功小功之喪 則因喪服而冠〕”라고 한 데서 온 말로, 곧 관례를 치를 나이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강여진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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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호집 제20권 / 제문(祭文)  

종제 수보에 대한 제문〔祭從弟修甫文〕      

      

숭정(崇禎) 두 번째 무오년(1738, 영조14) 6월 그믐날에 나의 종제 수보(修甫)가 한 번 병을 앓더니 그만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의 종형인 백춘(伯春)이 마침 원수를 피해 호서(湖西)에 있다가 급보를 듣고 달려갔는데, 도착해보니 이미 그의 시신을 염습한 뒤인지라 제때에 미치지 못하였고 어떻게 손써 볼 수도 없었다. 마침내 8월 기유일(己酉日)에 여주(驪州) 선영(先塋) 부근에 종제를 안장하려고 하는데, 그 이틀 전 정미일(丁未日)에 변변찮은 제수를 장만하여 나의 애통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고한다.

 

아아, 수보여! 네가 오히려 나를 버리고 먼저 떠나고, 내가 오히려 또 요절한 너를 곡한단 말인가? 시인(詩人)이 이르기를, “곤궁한 백성의 삶이 죽음만 못한 지 오래되었네.〔鮮民之生 不如死之久矣〕” 하였다. 무릇 곤궁함에 시달리고 원통함을 품고서 이 세상에서 오래 살기보다는 차라리 저세상으로 훌쩍 떠나서 이와 같은 삶을 잊는 것이 통쾌할 것이니, 너는 지금 이후로 이러한 뜻을 이룰 수 있음을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길 것인가?
그러나 살펴보건대, 옛사람이 망극한 때를 만나 비통하고 억울한데도 하소연할 데가 없으면, 결국 속세를 초탈하여 신선(神仙)이 되는 설에 의탁하여 훨훨 날아 멀리 떠나가 초연하게 스스로를 보존하면서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사람을 이기는 지극한 이치를 목도(目睹)하고자 하였으니, 이것은 또 어떠한가? 사람의 수명은 유한하고 시운(時運)의 변화는 무궁하니, 유한한 수명을 가지고 무궁한 변화를 다 알고자 한다면 필시 불가능할 것이다. 장차 어떻게 인사(人事)가 번갈아 바뀌는 것을 궁구하고 천도(天道)가 반드시 회복되는 것을 징험하여 나의 눈을 통쾌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참으로 괴롭게 살다가 죽은 사람을 몹시 애석하고 가련하게 여길 만하니, 너는 이에 또 어떻게 편안히 눈을 감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신선에 관한 말은 이미 허탄하여 믿기 어렵고, 하늘과 사람의 승부는 또다시 뒤바뀌어 기필할 수 없으니, 내가 또 지극히 참기 어려운 바를 참으면서 그 믿기 어렵고 기필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아아, 하늘이 아득하여 일월(日月)이 밝게 비추지 못함에 따라 의리는 갈수록 어두워지고 세변(世變)은 날로 새롭게 일어난다. 이에 나는 이 세상에서 하루를 살면 하루만큼의 고통이 늘어나고, 1년을 살면 1년만큼의 고통이 늘어나서 10년, 100년, 무궁한 시간에 이르도록 또한 이와 같을 뿐일까 두렵구나. 그렇다면 산 자를 참으로 부럽게 여기고 죽은 자를 참으로 비통하게 여겨야 하는가? 죽은 자는 한을 품은 것으로 끝이 나지만 산 자는 아직도 기대하는 바가 있는 듯하다면, 죽은 자를 참으로 비통하게 여기고 산 자를 참으로 부럽게 여겨야 하는가? 나의 삶이 과연 너의 죽음보다 나은가? 너의 죽음이 과연 나의 삶보다 나은가?
여강(驪江) 북쪽의 한 언덕에는 우리 3대의 묏자리가 있는데, 너는 이제 이곳으로 귀의하게 되었다. 무릇 죽은 자가 앎이 있는지 없는지는 진실로 알 수 없거니와, 만약 할아버지와 손자,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가 모두 기쁘고 흡족하며 화락하며 단란하게 지내는 것이 오히려 옛날 산 아래에서 살았던 성대한 시절과 같아서 다시는 이승이 어떤 세상이었는지조차도 모르게 된다면, 너의 죽음은 과연 나의 삶보다 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서로 울분이 맺혀 억울해하고 비통해함이 이승에 살았을 때와 다름이 없다면 죽음도 너의 고통을 잊게 하지 못할 것이다.
무릇 너의 빼어난 기운, 민첩한 재주, 절묘한 기예로 좋은 때를 만나 곧바로 성취하고 시운을 타고 스스로 분발하였다면, 어찌 금세의 인물만 못하였겠는가. 그러나 슬픔과 근심 속에서 고생만 실컷 하다가 채 40세가 되기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남겨진 어린 자식들은 방 안에 가득하고, 과부 신세가 된 아내는 처량하게 있어 너의 뒷일을 수습하지 못할까 걱정스러우니, 이것도 금일에 원통하게 여기는 일들 가운데 한 가지이다. 아직 죽지 않은 나의 애통한 심사로 또 어찌 이 원통함을 참을 수 있겠는가.
아아, 외로이 살아남은 이 목숨이 세상에서 서로 의지하여 살아갈 사람은 오직 네댓 명의 형제들뿐인데, 타향에서 떨어져 살아 항상 답답하고 근심스러웠다. 네가 병을 앓고 있을 때에는 늘 보살펴 주지 못하였고, 네가 죽을 때에는 미처 대면하여 영결하지도 못하였는데, 이제 너를 황량한 산골짜기 구천(九泉) 아래로 보내니, 평생토록 끊을 수 없는 형제의 사랑이 진실로 이날에 그칠 것인가?
예전에 내가 남쪽 지방으로 내려갈 때 너는 이릉(二陵)의 모퉁이까지 나를 전송하러 나와 말에서 내려 머뭇거리면서 차마 돌아가지 못하였고, 나 역시 자주 뒤돌아보며 눈물을 훔쳤다. 이번 이별은 또 어떤 이별이기에 나만 피눈물을 닦으며 길이 통곡하게 하고, 너는 전혀 모르는 체한단 말인가? 만일 네가 앎이 있다면 나의 술잔을 받고 잘 가거라.
아아, 애통하도다! 부디 흠향하거라.

 

[주-D001] 수보(修甫) : 
김달행(金達行, 1706~1738)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수보이다. 미호의 생부인 김제겸(金濟謙)의 넷째 아들이다. 미호가 지은 김달행의 묘지명이 《미호집(渼湖集)》 권15에 〈종제수보묘지명(從弟修甫墓誌銘)〉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D002] 백춘(伯春) : 
미호의 자이다.
[주-D003] 곤궁한 …… 오래되었네 : 
《시경》 〈소아(小雅) 육아(蓼莪)〉에 “작은 병의 텅 빔은 큰 병의 수치라네. 곤궁한 백성의 삶이 죽음만 못한 지 오래되었네. 아버지가 없으면 누구를 믿으며 어머니가 없으면 누구를 믿을까. 나가면 근심을 품고 들어오면 이를 곳이 없어라.〔甁之罄矣 維罍之恥 鮮民之生 不如死之久矣 無父何怙 無母何恃 出則銜恤 入則靡至〕”라고 한 데서 보이는데, 여기에서는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조부 김창집(金昌集)과 부친 김제겸(金濟謙)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여 김달행이 생전에 지극한 원통함을 품고 곤궁하게 살아서 삶이 죽음만 못했던 것을 이른 것이다.
[주-D004] 하늘의 …… 이기는 : 
때로는 사람이 하늘의 이치도 무시하고 나쁜 짓을 할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옳고 그름이 결정되어 하늘의 이치가 결국 사람을 이기게 된다는 뜻으로,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신포서(申包胥)가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는 경우도 있지만,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역시 사람을 능히 이기는 법이다.〔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송(宋)나라의 소식(蘇軾)이 〈삼괴당명(三槐堂銘)〉을 지으면서 이 말을 인용하여 더욱 유명한 격언이 되었다. 《史記 卷66 伍子胥列傳》 《古文眞寶後集 三槐堂銘》 여기에서는 김달행의 조부와 부친을 해친 역당들이 처음에는 천리(天理)를 무시하고 악행을 저질러 하늘을 이기는 듯하였으나 끝내는 하늘의 뜻이 정해지면 역당들은 토죄되고 김달행의 조부와 부친은 신원될 것임을 이른 것이다.
[주-D005] 여강(驪江) …… 있는데 :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함께 죽은 김달행의 조부인 김창집(金昌集), 부친인 김제겸(金濟謙), 맏형인 김성행(金省行)의 묘가 모두 여주(驪州) 등신면(燈神面) 초현리(草峴里)에 있다.
[주-D006] 이릉(二陵) :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世宗)의 능인 영릉(英陵)과 효종(孝宗)의 능인 영릉(寧陵)을 가리킨다.

 

 

풍고집 해제본의 묘표

 

8대조(諱 達行) 증 좌찬성부군 묘표135

풍고집(楓皐集)은 풍고 김조순(永安府院君 金祖淳 1765 -1832)의 문집으로 원본은 16권 8책이다. 이는 장남 김유근(金逌根 1785 -1840, 종백부 金龍淳 앞으로 입후)이 유문(遺文)을 모아 편집(1832 -1837)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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